착,한 여자.
그리고 그 옆에는 이렇게나 험한 세상에
착한 것은 죄악이라도 된다는 듯.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듯.
항상 존재하는 악인이 되는 남자.
언제나 착한 여자는 인내하고,
악한 남자에게도 연민을 가지고, 참고, 또 참고.
그게 그 시대 트랜드가 된 여인상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지금도 존재하는.
착한 여자에게는 큰 욕심이 없다.
그저 소소한 일상에서 서로 상처를 보듬고
함께 따뜻한 가정 하나 꾸리고 살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
하지만 그 하나마저도 짓이겨지고
결국 여자는 상처에 상처를 거듭해서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드는 잔인함.
너무나도 사랑받고 싶었던,
사랑이 필요했던 그녀,
착,한 여자.
착한여자, 공지영
94
고통은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나보다 더 크게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고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할 뿐.
95
불행하지 않은 자신을 느끼게 되면 더럭 겁이 나는 것이다.
98
객지에 나가 겨울을 맞아 본 사람들은 안다. 몸보다 먼저 싸늘해지는 계절의 공포를. 창호지 문으로 비집고 들어서는 싸늘한 냉기, 빨리 내리는 저녁 그리고 창 밖을 불어가는 바람소리가 등을 시리게 만드는 그런 계절의 공포를.
129
이를테면 사랑은 그렇게 온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날마다 바라보던 그 낯익은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흐린 아침, 가까운 산이 부드러운 회색 구름에 휩싸이고 그 낯익은 풍경이 어쩐지 살아 있었던 날들보다 더 오래된 기억처럼 흐릿할 때, 그 때 길거리에서 만났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렸을 한 타인의 영상이 불쑥 자신의 인생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 그 느낌이 하도 홀연해서 머리를 작게 흔들어야 그 영상을 지워버릴 수 있는 그 때.
129
마치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것처럼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그 끝에 도달해버리는 것이다.
139
우체국 일이 새삼 걱정스러웠지만 정인이 읽은 모든 소설책과 수필집에서 바로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걸 희생하는 것, 그래도 아깝거나 계산하지 않는 것, 불리한 줄 알지만 달려가는 것, 달려가서 그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만나는 것 이 외에 이 세상에 어떤 중요한 일도 존재하지 않는 것...
139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
166
타인의 시선이 결국 자신의 시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1
그것은 자신이 이 지루함을 덜어 보려고 만들어낸 법칙이었지만 마치 그것이 자신이 여기 앉아 있는 이유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정인은 어쨌든 거기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를 만나고 싶다는 그 간단한 마음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203
약속만이 깨어질 수 있는 것이고, 온다는 사람만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심술궂은 진리를 그녀는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204
배가 부르면 슬픔도 덜해진다는 진리를 정인이 같은 여자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인은 짜장면 집으로 들어가 짜장면을 먹었다.
205
슬플 때 짜장면을 먹어 본 사람들은 안다. 비는 내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짜장면을 먹어 본 사람은 안다.. 그 때, 나무 젓가락을 쪼갤 때 나는 작은 소리조차 마음을 가르고.. 그 짠맛과 그 값싼 기름기가 비벼주는 위안.. 숟가락을 따로 들지 않고 단촐한 접시에 담긴 그 검은 액체에 비벼 먹는 국수의 후두둑거림이 주는 위안에 대해서.
208
언젠가 어떤 남자와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밤이 새도록 그와 많은 이야기를 하리라고 정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혼자 웃는 것이 많은지. 누군가가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상처를 감싸주고 안아주고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라고 정인은 믿고 있었다.
221
그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갔다는 여자들 중에 그녀도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녀는 바람이 아니라 그 바람 속에서도 혼자 날아온 씨앗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날아와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고 지금껏 커가는 나무 같았다.
237
그렇다. 기억들은 살갗을 뚫고 버섯처럼 돋아난다.
244
누가 인간들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싫다고 하는 사람은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 쫓아오는 사람에게는 달아날 수 있을 때까지 달아나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더욱 더 애틋하게 마음 속에 화인을 남기게 되는 것일까.
250
때로 말이라는 것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더 많이 필요한 법이었고, 진실 앞에서 사실은 아무 말도 필요 없을 때가 많은 법이다.
나는 아직도 수련이 부족합니다. 오래 전부터 갈구하던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부족합니다. 내게 힘이 부족한가요? 나의 의지가 병든건가요? - 세월은 흘러가고 있으며 나는 때때로 삶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내 주위에는 실제적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산만합니다. ㅡ 라이너 마리아 릴케 '편지'
261
모르겠어요. 온 힘을 다해서 행복해 보이고 싶었어요. 그게 누구든.
말하자면 불행은 내게는 어쩌면 익숙한 것이었고, 더 이상 동정 같은 것은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이 저를 지배한거죠. 또 다시 어린 시절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동정까지 받는다는 것은 정말 싫었어요. 이해하시겠어요?
281
고통이라는건 말야. 고통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그것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공포에서 오는 거야. 하지만 이것도 끝나. 끝난다는 사실을 생각해. 길게 느껴져도 영원히 계속된다고 느껴지는 건, 바로 고통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고 그렇게 겁을 주는 거라구. 기억해. 설사 그것이 길게 느껴진다 해도 고통은 언젠가 끝난다는거.
290
남녀간에 느끼는 매력이라는 것은 약간의 금기와 약간의 가능성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아닌가 말이다.
(하)
10
누군가 말했었다. 기억은 단지 머릿속에만 저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아마 자명이었던가, 기억은 몸의 곳곳의 혈에도 남아있다고. 침을 놓으면 때로 환자들은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는데 자신들도 왜 울고 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른다고. 하지만.. 확실히 그 혈에 기억들은 남아서 마음보다 오래 간직되는거라고. 그는 재미있는 말을 보탰다. 웃음은 위로 올라가 증발되는 성질을 가졌지만 슬픔은 밑으로 가라앉아 앙금으로 남는다고. 그래서 기쁨보다 슬픔은 오래오래 간직되는 성질을 가졌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상처라고 부른다고 했다.
29
명수는 노파의 자세를 이해한다. 빼앗기는 것에 익숙한 세대. 아마 어머니도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늘 누군가 자신의 것을 넘보고 있다는 불안. 자꾸만 참견이라도 하지 않으면, 악을 쓰고 버티지 않으면 겨우 이룬 이 행복이 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을 숙명처럼 안은 그 세대들.
33
이 세상에는 어쩌면 두 가지 감정만 존재한다고 명순느 요즘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기쁨과 분노였다. 모든 다른 감정은 그것에서 파생되거나 아니면 그것을 가장하기 위한 가면들이었다. 예를 들면 우울 같은 것, 그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분노에 대한 자기 기만이었다.
36
연민이야말로 증오의 다른 표현이지. 멋들어진 속임수야, 자네는 그걸 알겠나?
55
이 세상에는 한마디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관계들이 있긴 했다. 미송이 그렇고 자신과 현준의 사이가 그렇고 또 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단어의 의미로 자신과 타인의 거리를 메우려고 애쓰고 있을것이다. 관계라는 것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이름을 짐작할 뿐.
78
강을 건넜으면 나룻배는 버려두고 가야지요. 고맙다고 나룻배를 이고 산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인연이라는 게 그렇지요.
109
그랬다. 한번도 그를 사랑한 일이 없었던 것도 같았다. 정인이 사랑했던 것은 자신의 순결- 만일 순결이란느 것이 그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있기나 하다면 - 자신의 선택 그리고 그 사랑은 고집으로 오기로 바뀌어져 있었다. 결혼한 이후부터 그녀는 그저 그 결혼을 유지하게 위하여 살아왔던 것이다. 정인이 배반하고 싶지 않아 버텼던 것은 현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믿음이었다.
114
우연히 뒤진 호주머니 안처럼, 불쑥 비어져 나온 기억 앞에서 두 여자는 마주보고 웃는다.
119
글너데 이제, 그 혼자, 라는 사실을 그녀는 생각한다. 언제든 사람은 결국 혼자가 아니겠냐고 묻는다면 뭐 할 말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렇구나, 생각하는 순간.. 나는 혼자구나, 라는 생각이 뼈에 사무치는 그런 순간.. 체온이 식어 내리고 쓸데 업슨 인간들에게 모두 연락을 해서라도 부질없는 농담이라도 나누고 싶은 그런 순간이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혼자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119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결국 혼자 태어나 혼자 죽어간다는 사실처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실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순간 거부하는 게 또 있을까. 하다못해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더라도 인파로 와글바글한 극장 쪽을 택한다. 낯선 거리의 식사시간에 기웃거리다가 사람들이 많은 식당을 택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돌아보면 모두가 혼자였다 .하지만 살맏르은 그래도 몸을 비벼 보는 것이다. 인간의 훈기, 다른 사람들의 입김, 매순간 그 인간들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때론느 내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끼지 모여 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122
쉽지 않은 인생길을 걸어온 인간들의 머릿속은 온통 나쁜 일만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프로그램만 입력된 컴퓨터와 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은 언제나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에 대한 상상력이 뛰어나니까.
135
아직 젊기 때문이었을가 아니면 아직 아무것도 잃어 보지 않은 자가 가지는 삶에 대한 얄팍한 확신이었을까
180
어릴 때는 생각했었다.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되는 나날들에 대해서, 그날들이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얼룩진 것으로 상상된 적이 있었던가.. 왜 삶이 이렇듯 힘겨울 거라는 걸, 삶이라는 건 상처 위에 상처가 얹히고 그 상처 위에 다시 상처가 나서 그것은 언뜻 붉고 선연한 장밋빛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는걸 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193
사는 일이 쓸쓸해질 때 꺼내서 들여다 볼 추억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193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여러 가지 금기가 생겨나는 일이구나, 하는 상투적인 진실을, 명수는 문득 마음으로 깨닫는다.
199
좋은 걸 볼 때 생각나는 것이 사랑이다.
203
그거 말이야. 좋은 옷보면 생각나는 거, 그게 사랑이야. 맛있는 거 보면 같이 먹고 싶고, 좋은 경치 보면 같이 보고 싶은 거,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거 있을 때, 여기 그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거, 그게 사랑인거야. 그건 누가 많이 가지고 누가 적게 가지고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닌거야.
213
정인의 입술이 하얗게 질린다. 미송의 말이, 단 한 마디도 빠짐없이 심장을 쓰윽쓰윽, 베며 지나간다.
216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구별해내는 일이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 중에서, 사랑하지 않았으면 한낱 군중일 뿐인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그 사람을 구별해낼 줄을 알아지는 것이다.
218
눈앞의 벽이 정인에게 캄캄히 쏟아져 내린다. 누렇게 바랜 장ㅂ아형의 벽지가 장방형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흘러내리는 자리, 또 다시 벽이 으깨진 두부처럼 무너져 흐물흐물 쏟아져 내린다. 버림 받는다는 감정처럼 이 여자의 인생에서 선명했던 것이 또 있을까.
219
평생을 두고 되풀이한데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 아니 상처 위에 상처가 쌓여서 더욱 생생해지는, 부푼 풍선 같은 고통을 정인은 무릎 아래로 억지로 깔고 앉아 있다.
223
오늘에서야 결심을 하고 정인을 찾아온 것을 미송은 후회한다. 혼자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감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혼자 내버려두는 편이 좋았던 것은 미송 자신이었다 .미송은 그럴 때 혼자 있는 편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사람마다, 경우마다 모든 것은 같을 수가 없는것이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 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그 순간에조차, 모두 그저 제 자신의 경우에 비춰 보고 행동하는 것이다.
226
깨어진 희망들은 이제 정인의 몸 구석구석으로 유리파편처럼 퍼져갔으리라.
240
상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 아닌 것들로부터 온다. 그러니 상처는, 사랑이 아닌데도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들 혹은 사랑할 때 함께 올 수밖에 없는 나와 타인의 잘못들,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262
왜 대체 사람은 항상 마지막 순간에야 입을 여는 것일까, 왜 지나가버린 다음에야 알게 되는 것일까, 그러니 우리는 언제까지나 뒤돌아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때는 이래야 했어...
278
내가 말긑에 결혼 실패라는 말을 꺼내니까 그 여자가 그랬어요. 자신은 실패를 한 게 아니라 실패를 인정하는 데 성공한거라구.
280
내가 아무리 아쉬워도 감정이 안 오는 사람이랑 연애를 할수는 없잖아.
283
아이들이 놀다간 그 네, 저만치 누군가 두고 간 로봇의 머리가 떨어져 있다. 아이는 집에 가서 저 얼굴을 찾겠지. 어쩌면 울고 떼를 쓸지도 모른다. 엄마는 집 안을 뒤집어 저 얼굴을 찾을 것이다. 소파 밑에가지 막대기를 넣어 휘이이 저어 볼지도 모른다 .저 얼굴을 여기 있는데... 정이은 오각형의 로봇 머리를 바라본다. 열심히 찾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디서 찾느냐도 중요한 것이다. 남호영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288
그녀는 긴 강을 건넌 기분이었다. 돌아볼 수는 있지만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289
하지만 이제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요, 당신을 사랑했다고 생각했어요. 이 세상 남자를 다 가져다 준대도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게는 당신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에요. 미안해요, 저한테 속으셨던 거지요, 그래요, 미안해요, 저도 속았으니까요.. 어릴 때 나는 착한 아이였어요. 엄마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요. 그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엄마, 내가 말 잘 들을게, 날 좀 사랑해줘, 엄마, 내가 착해질게, 떠나간 아버지만 바라보지 말고 제발 날 좀 사랑해줘, 날 낳은걸 후회하지 말아줘.. 날 버리고 죽지 말아줘, 제발!... 그리고 어른이 되었어요. 한 남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런 거래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흥정 말이지요. 내가 착할게, 날 좀 사랑해줘, 내가 참을게. 내가 노력할게. 내가 밥을 해주고, 내가 빨래를 해주고 밤늦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주고 술국을 끓여주고 뭐든지 다 해줄게.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나를 때리고 나를 내팽개치고... 희망을 주었다가 그것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그걸 빼앗아가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벼랑까지 날 밀어버린다 해도 내가 이를 악물고 참을 테니 제발 날 사랑해줘! 그랬던 거지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건 거래였다는 말이지요... / 그런 거래를 하는 나를 사람들은 착한 여자라고 부르더군요. 저는 이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어요.
295
죽고 사는 일은 생명이 달린 일이지만, 결혼과 이혼은 생활이 달린 일이다.
298
우리 어차피 나이 들면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아니겠니? 쟤 늙었구나 생각하면 그게 내 모습인데 뭐..
320
정인씨도 알지? 나이 먹는다고 전부 성숙하지 않는다는 거.. 나이는 고통으로 먹는거야.
325
언젠가 신문에 본 기사가 생각났다. 동해안에서 횟감으로 쓸 생선을 가져다 파는 수족관 차 운전사의 말이었다. 그들은 그 수족관에 횟감용 고기의 천적을 한 마리 넣어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서울에 오는 동안 멀미로 늘어지는 고기들이, 천적이 한 마리라도 있으면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하다고 그는 말했었다. 아마 긴장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330
정인은 겁이 난다. 더 이상은 누구로 인해서도 가슴 아프지 말자고, 노력해서 되는 일만 하자고, 체념을 익히고 그것이 썩어 문드러져서 거름이 될 때까지 고요하자고, 밤이면 두 손을 모으고 죽음까지 편안히 생각했지만, 죽음조차도 삶을 초월할수는 없다. 삶은 죽음보다 생생한 것이다.
333
이 두려움도 언젠가는 끝이 있겠지. 물 속에 가라앉을 때 그 끝에서 발이 닿으면 반등할 수 있듯이 언젠가는 이것도 끝나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끝까지 가보자, 하는 생각때문에 나는 겨우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