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슈만
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6.8 ~ 1856.7.29)
슈만은 1810년 6월 8일 독일 작센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나 1856년 7월 29일 역시 독일의 본에 가까운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슈만은 라인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자살을 기도하고,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은사인 동시에 장차 장인이 될 뷔이크와 법정에서 대결하는 등, 그의 전기에 많은 화제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사생활이 다사다난 하였지만 그는 낭만주의 음악을 위해서도 선두에서 싸웠고 또 많은 업적도 남겼다. 아버지는 저술도 하는 서적상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심과 음악적 감성이 깊은 사람으로 슈만은 아버지의 문학적 취미와 어머니의 섬세한 감수성을 이어받았다. 7세 때 교회의 오르간주자로부터 지도를 받고 11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나 16세 때 누나가 정신병으로 죽고 이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보다 내성적이고 몽상적으로 되어 문학과 음악에 인생의 위안을 찾았다. 모친은 그를 법률가로 입신시키기 위해 1828년 라이츠찌히에서 법률공부를 시켰으나, 본인은 오히려 철학이라든가 역사에 흥미를 가졌고, 라이프치히에서 당시의 명교사 프리드리히 뷔이크를 알게 되어 본격적인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뷔이크의 딸인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클라라와 알게 되었다. 또한 슈베르트의 영향이 많이 풍기는 가곡과 피아노곡 등의 작곡도 시작하였다. 1829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티보 교수에게 이끌려 잠시 그곳으로 옮겼으나 1830년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슈만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격한 나머지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모친의 승낙을 얻어 뷔이크에게 피아노 지도를, 극장 지휘자인 도른에게 음악이론을 배우고, 독학으로 작곡 연구도 하였다. 또 1831년경부터는 참신한 필치로 음악평론도 쓰기 시작하여 1832년 '쇼팽'을 소개한 유명한 글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미 20살이 넘은 슈만은 손가락이 잘 돌지 않아 너무 무리한 훈련을 한 결과 1832년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다쳐서 사용불능이 되자 피아니스트가 될 꿈을 단념하고, 작곡으로 방향을 돌려 지휘자인 도른에게 이론을 배웠고 바흐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이때부터 작곡과 평론만을 지향하여《나비(op.2, 1832)》,《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에 의한 연습곡(op.3, 1832)》 등의 피아노곡을 작곡하였으며, 1834년에는《사육제 Carnaval(op.9,1835)》와《교향연습곡(op.13, 1834)》등을 내놓았다. 1834년에는 J.크노르, L.슝케, 비크 등과 함께 잡지《신·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발행하여 주필로서 독일음악의 전통과 진정한 낭만주의 음악의 새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들의 음악적 주장은 주로 이 잡지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1844년 드레스덴으로 떠날 때까지 많은 평론을 실었다. 1836년 어머니를 잃고, 스승 뷔이크의 딸 클라라에 대한 친밀감은 더욱 강렬해져 연애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클라라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슈만은 이를 법정에 제소하여 1840년에 결국 결혼에 성공하였다. 그때까지 거의 피아노곡만 써 왔던 그는 갑자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그의 생애를 통하여 작곡한 가곡의 반수를 이 1년 동안에 내놓았다. 하이네의 시에 의한《가곡집(op.24)》과《미르테의 꽃(op.25)》,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의한《가곡집 Liederkreis(op.39)》, 이 밖에《여자의 사랑과 생애 Frauenliebe und leben(op.42)》,《시인의 사랑 Dichter Liebe(op.48)》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교향곡에 전념하여 제1번과 제4번의 2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다시 1842년에는 실내악으로 전향하여 3곡의 현악4중주곡 ·피아노4중주곡(op.47), 피아노5중주곡(op.44) 등의 고전적 폴리포니(polyphony 다성음악)와 낭만적인 서정이 곁든 중요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843년에는 멘델스존이 창립한 라이프치히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이듬해 4개월에 걸친 아내의 러시아 연주여행에 동행하여 정신과 육체적 건강의 악화로 전지 요양을 권유받았다. 1844년 라이프치히를 떠나 드레스덴에서 '리더 타펠'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847년에는 합창단의 지휘자로, 1850년에는 힐러의 후임으로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여기에서《라인교향곡》으로 알려진 제3교향곡, 첼로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 등을 작곡했다. 1853년에 평론으로는 마지막 것이 된 젊은 브람스를 소개한《젊은 길》이 슈만의 명성을 남긴 논문이다. 그의 정신장애의 징후는 이미 1833년경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1844년경부터는 창작력이 왕성한 시기와 우울증에 빠진 시기가 서로 교차되어 나타났으며, 1854년 2월 27일 심한 망상에 사로잡혀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조되어 그 후부터 본 교외의 엔데니히·정신병원에 수용되고, 1856년 여름 2년간의 투병 끝에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은 소년 시절부터 쟌 파울이라든가 호프만등의 문학작품을 가까이 함으로써, 낭만적인 환상을 풍부히 하고 감정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이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하여, 그 의 음악은 자연 낭만적인 시정이 넘치게 되었다. 따라서 슈만의 음악은 순수한 음악적인 구성보다는, 시적으로 노래를 하고 자기의 낭만적인 환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슈만은 같은 시대의 리스트나 바그너처럼 기교주의나 화려한 외면을 꾸미는 방향에는 공감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바흐나 베토벤, 슈베르트 등으로 이어 내려온 전통에 입각한 자기 나름의 방향에서 창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멘델스존을 높이 평가하고 브람스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한편 슈만의 음악은 규모가 큰 곡에 있어서는 고전적인 구성에 집착된 느낌도 있고, 피아노 외에는 악기의 취급이나 균형이 미숙하게 다루어지며, 특히 관현악의 기교에 숙달되지 못하여 높이 평가되지는 않지만 내객에 내포된 낭만적인 환상과 정열, 그리고 꿈과 동경은 대단히 신중한 것이다.
슈만의 작품은 고전파 작곡가처럼 모든 분야에 걸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질적으로 가장 뛰어나고 작품수가 많은 것은 피아노독주곡과 가곡이다. 이 가운데 3곡의 피아노소나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적 서정성이 담긴 낭만주의 향기가 풍기는 표제적(標題的)인 음악이다. 특히 가곡은 슈베르트가 개척한 리트형식을 계승하고 거기에다 시와 음악을 밀착시켜 보다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주요작품 중 오페라에는《Genovena》(1848), 교향곡으로는《제1, 봄의 교향곡 Frühlingssymphonie》(1841),《제3, 라인교향곡 Rheinishe Symphonie》(1850), 피아노곡으로는《피아노협주곡》(1845),《사육제》(1835),《환상소곡집 Fantasiestücke》(1837),《교향적 연습곡 Etudes symphonique》(1834, 개작 1852),《어린이의 정경 Kinderszenen》(1838), 관현악이 딸린 대합창곡으로《Paradies und die Peri》(1843), 가곡으로는《유랑의 무리 Zigeunerleben》(1840),《Myrthen》(1840) 등이 있으며, 주요저서로는《음악평론집 Gesammelte Schriften über Musik und Musiker》(4권, 1854)와 서한집 《R.Schumanns Jugendbriefe》(188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