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군인의 아내
허름한 세이코 시계에, 넥타인 핀은 도금이 벗겨지고, 혁대는 헤져 있었다. 대통령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79 년 10 월 26 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을 만졌던 의사들이 증언이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라고 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그랬다.
박 대통령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빈한 군인으로 살았으며, 또 군인으로 살았으며, 또 검소하고 소박한 대통령으로 살다 , 그렇게 빈손으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던 것이다.
수천억원의 비자금이 들통나고 , 자식들의 불법 축재로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 우리네 대통령들의 한결같은 모습들이었다. 티끌만큼이라도 자신이나 자식들을 위해 부당하게 재산을 빼 돌리거나, 숨겨 놓지 않았던 대통령은 박 대통령 뿐이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서민으로서 정직하고 소박하게 살다 간 진정한 서민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런 서민 대통령 곁에는 온 몸을 던져 서민 속으로 파고 든 서민 퍼스트 레이디가 있었다.
육영수 여사는 본래 만석꾼 집 딸이었다.
충북 옥천의 대지주 육종관의 1 남 3 녀 중 둘째 딸이었다.
열네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온 육 여사의 어머니 이경령 여사는 평소 이웃들에게 인심을 많이 베풀고, 소작농들에게도 잘 대해 주었다 . 남편에게는 순종하고 자식들에게는 엄하지만 자애로운 모습으로 대했다. 육 여사는 6.25 피난 때 박정희를 만났다.
전시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가난뱅이 군인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아버지의 심한 반대를 무릎쓰고 박정희와 결혼했다.
결혼식장에는 아버지가 참석도 하지 않았다.
군인 박정희는 한국 전쟁 와중에 군인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했고, 이 때문에 무고한 국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봐야 했다. 천성이 정직했던 박정희는 이 때 , 자신은 결코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거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내 육영수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남편이 하는 일에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 적은 봉급으로도 알뜰살뜰 사는 것이 아내의 도리다. 돈이 없다고, 불평불만하면 남편으로 하여금, 부정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 가난한 군인의 아내 역시 그리 마음먹고 있었다.
달콤한 신혼생활 대신 가난한 군인 가족의 일상은 힘들었다. 전쟁중이라 대령이었던 박정희의 월급은 쌀 한가마니도 안 되었다. 당시 대령이면 손쉽게 돈을 빼돌려 식구들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새댁 육영수는 시집오기 전 생활은 완전히 잊어 버렸다. 쌀이 떨어지면, 옷가지를 팔아 죽을 끓였고, 개가 새끼를 치면 팔아서 양식을 구했다. 대구 신혼 시절 첫딸 근혜가 태어날 때 어머니 이경령과 동생 예수 그리고 조카 딸까지 네 식구가 단칸방에서 함께 보냈다.
1953 년 휴전 협정이 성사되면서, 박정희 대령은 3 군단 포병 단장으로 발령 났다. 가족들도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육영수는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해 남편이 구해 놓았다는 집을 찾았다.
지금의 대학로 동숭동 허름한 달 동네 전세집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볼품없는 집이었다. 그럼에도 비 피할 집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하는 마음에 기꺼이 짐을 풀었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근혜는 어설픈 집에서 넘어지고 굴러 떨어지는 통에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전세금을 깍고 또 깍아 20 평짜리 일본식 단층 집으로 이사를 갔다. 동숭동 생활 석달만에 고사북동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물이 나오지 않아 육영수는 매일 이웃에 물을 빌리러 다녔다.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즐겁게 생활했다.
당시 육영수가 수돗물을 빌리러 다녔던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회고담이다.
그 시절 장교댁이라면, 사병들이 들락거리고 군인들이 웅성거려야 할텐데 , 그 댁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절간 같았다. 그 집 아내는 워낙 말이 없는 분이라 남편이 무얼 하는 분인지 말씀이 없었다. 나중에 바깥 어른이 대령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대령쯤 되는 고급 장교가 저토록 어렵게 살고 있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고사북동 생활 1 년이 지날 때쯤 박정희는 준장으로 승진했고, 1954 년 미국 오클라호마 육군 포병학교로 6 개월간 유학을 떠났다. 그렇잖아도 궁핍한 사람이 가장이 없어지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육영수는 텃밭을 일궈 상추를 심으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육군 준장의 아내로서의역활도 잊지 않고 충실히 챙겼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박정희와 육영수는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확인하고 다져 나갔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정희는 미국에서 받은 아내의 편지를 고스란히 스크랩해 아내에게 선물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잘 참고 견뎌 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것이다. 박정희는 군인으로서 항상 빈틈이 없고 강한 인상이지만, 속마음은 여리고 부드럽고, 수줍기까지 한 구석이 있다.
특히 아내에게는 더 없이 부드럽고 자상했다.
유학에서 돌아 오면서 박정희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이요, 태평양 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맑은 마음의 우물이 샘솟는 나의 집이거늘 없는 것이 무엇이냐, 영원한 마음의 양식이 우리 가정을 지켜줄 것이다.
둘째 딸 근영이 태어나 식구는 더 늘었다. 그러나 장군 박정희의 가족은 여전히 셋방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량진 셋방에서 살 때의 모습을 육영수 어머니 이경령은 수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방에는 불도 들이지 않고 방바닥에서 물이 줄줄 나서....그 때 군인의 우의인 고무로 만든 장옷을 방바닦에 깔면 축축한 누기가 차서 도무지 앉지도 눕지도 못하여, 밤이나 낮이나 서성거리고 밥이라고 풍로에 해서 끼니로 때우고, 그 때 참말로 고생은 말할수 없이 하고요, 손녀 딸 근혜는 아파서 울곤 했어요.
1956 년 4 월 박정희 가족은 마침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신혼 때 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푼 두푼 모은 돈과 은행에서 빌린 돈을 보태 서울 충현동에 집을 장만해 들어간 것이다.
습기가 많고 볕도 잘 들지 않는 눅눅한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박정희가 육군 대학으로 발령 받으면서, 다시 진해 여좌동의 셋방으로 떠나야만 했다. 후에 서울 신당동의 작은 기와집에 둥지를 틀고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다.
이처럼 늘 궁핍했던 생활과 잦은 이사 , 그리고 집없는 설움 등 가난하고 정직한 군인의 아내로서 또 가족으로서 살면서 감내해야 할 어려움이 한두가지 아니었다. 그러나 육영수는 이 시절의 아픔과 경험을 통해 서민들이 생활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되었고, 훗 날 퍼스트 레이디가 되는 밑거름이 됐다.
책 대한민국과 결혼한 박근혜 중에서 옮김.
원문내용(작성자:이성도)-----------------------------------
하얀 연꽃이 핀 줄 알았다...
그 날 설핏 눈발이 날렸던가
마음은 벌써 봄을 향해 내쳐 달렸으나, 동장군은 쉬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듯 했다.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남쪽에선 곧 동백꽃을 보게 될 것이란 소리가 있었으니 ....
아마 3 월이 다 되어 갈 때 쯤이었나 보다.
그 날 박근혜 의원을 처음 만났다. 봄 날 설핏 스쳐간 상서로운 눈발 탓인지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였다.
하얀 연꽃이 핀 줄 알았다.
어쩌면 하얀 목련 같기도 하고, 그러나 여자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성의 구별을 초월한 관세음 보살 기운이 강하게 풍겼다.
처음 보는 박근혜 의원은 관세음 보살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그런 편안함이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다.
손을 내밀어 잡아보니 도무지 형언하기 어려운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얼굴의 육상은 한없이 부드러운 기운이 베어 나오는 상이었고, 돌아가신 육영수 여사께서 생전에 우리에게 보이신 그런 느낌이었다.
골상은 강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했다.
사주에 금이 많아 강한 리더십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의 기운을 타고 난 것 같았다. 박 의원은 아버지의 강한 지도력과 어머니의 자상함과 너그러움을 함께 물려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 의원을 보는 순간 부처님과 함께 내 마음의 군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나는 박 의원을 바라 보면서, 두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박 의원은 이 순간 합장을 하는 나의 모습이 부담스러웠던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살며시 머리 숙여 답례 했다.
이제 우리 7 천만 동포를 위해 일해 주십시요. 지금 이 나라가 정말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민족 모두가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도록 큰 일을 해 주십시요 !!
나는 진실된 마음으로 박 의원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또 박 의원에게 약속했다.
박 의원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나는 박 의원이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것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이겨 나갈 것 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보았다.
이미 혹독한 자기 수련으로 내공을 쌓아 높은 경지에 오른만큼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가 뜻하는 바를 이루어 내고야 말 것이라 믿는다.
나는 오늘 부처님 앞에서 기도한다.
"부처님 이 나라 이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나라가 어리석은 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미륵 보살을 보내 주셨으니
이제 그 미륵 보살이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 정말 행복하게 잘 사는 길로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요 "
책 대한민국과 결혼한 박근혜 중에서..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