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신2 -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전제를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많으신 듯 싶습니다...
저는 남녀평등이라던지 시집살이에 대한 불평 불만이라던지 그런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저희 신랑 막내아들이고 분가해 사는 입장에서 제가 시집살이를 논한다면 돌 맞겠죠!!!)
또한 시댁에 먼저 가는 게 싫어서 이런 얘기를 쓴 것도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시댁에 먼저 가는것이 왜 당연해야만 하느냐>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흔히들 전통이라느니 풍습이라느니 하는 말로 당연시 여기며 넘기는 실정에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2000여년을 이어왔던 모계사회에서 바뀐지 몇백년밖에 안 됐으며 그것 또한 본래의 유교적 개념과는 다르게 잘못 뿌리내려진 것에 대한 것을 말입니다.
호주제도 폐지 된 마당에 언제까지 잘못 뿌리내린 관습에 얽매여 당연하게만 받아들여야 하냐는 겁니다.
추가로 말씀 드리면 저 또한 시댁 먼저 갑니다!! 왜 그렇게 하냐구요?
저희부모님도 시어른들도 당연하게 알고 계십니다!! 아마 여기에 제가 이런 글 올린 걸 아신다면 아마 저희 아버지 집에 발도못 붙이게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아버지 또한 이 나라 대부분의 아버지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니까요!!
옳다고 생각해서 따르는 건 아닙니다...
일종에 효도? 어른으로써의 대우? 그런 맘으로 따르는 거라고 보심 되지 않을 까 싶네요... 암튼 전 그렇습니다....
저 또한 아직까지는 그러한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딸이자 며느리이지만 제 딸만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길 알고 본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라는 마음인 겁니다.
1일날 "칠공주" 본 사람....
미칠이...
간만에 옳은 소리 좀 한다...
말하는 게 좀 4가지 없는데다 포인트를 벗어나긴 했지만...
(아니~~내가 벗어나고 있는 걸지도...
)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한가지!!
왜 명절은 항상 시댁부터 가야하는 걸까
아니 명절 뿐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일의 대부분이 시댁 위주이고,
그러고나서 처가 일이다...
처가 위주가 되다보면
주위에선 그걸 불쌍하게보거나 한심한 눈초리로 보기도 한다...
전통이라는, 고유풍습이라는 말로 설득하지 마라...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흔히 <장가간다>는 말을 쓴다.
장가는 한문으로 표기하면 杖家, 곧 처가집을 이름이다.
그러면 왜 장가를 간다고 표현한 것일까?
이것은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나오는 2000여년을 우리와 함께 해온 전통 혼례 풍습이다.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남녀가 혼인을 약속하면 여자 측 집에서는 본가 뒤에 작은 집 한채를 짓는데 이것이 사위집이다.
기록에 보면 남자는 저녁에 여자 집에 찾아와 대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 앉아 절하면서 여자 집에 묵을 것을 청하고 여자의 부모가 청을 들어주었을때 비로소 남자는 사위집에 머무른다. 이때 남자는 천과 돈을 주비해야하고, 아이를 낳아 성장하면 그때서야 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고대사회의 풍습은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었고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전제였으며 봍오 혼기가 찬 딸을 가진 부모는 집을 미리 지어 놓기도 했었다. 시대적으로 모권제 발달로 장가를 드는 것이었고 시집을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풍습이 고대 사회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13세기 초, 문인으로 유명한 이규보의 장인 애도문을 보면 "처가에 의거하게 되니 처부모의 은혜가 친부모와 같다"는 기록이 나오고, 2세기 정도 뒤인 1415년 <태종실록>권29에 혼인풍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옛풍습에 따르면 혼인의례가 남귀여가(男歸女家)하고 아들의 손자까지도 외가에서 출생하여 성장하게 되므로 외가 친척을 더욱 은혜롭게 생각한다"
남귀여가란 남자가 여자의 집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실록>권 40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처가살이를 하기 때문에 한 어미의 자손들이 한집에 같이 살게되니 서로 친애하는 풍속이 대단히 성하다"고 말하고 있는것으로 봐서 역시 마찮가지 였음을 알 수가 있다.
주자가계의 친영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풍속은 조선왕조의 개국을주도한 신유학파가 가족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고, 주자가례의 "친영(親迎)"을 주장한다. 처가살이혼의 대응이 친영이니 소위 시집살이혼인 셈이다.
혼례규범집인 <사례편람>에 보면 혼례의 과정을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네단계로 나누고 있다.
@ 의혼(議婚) - 중매쟁이를 시켜 양쪽 집에 허락을 받아내는 과정
@ 납채(納采) - 신랑 집에서 청혼을 하고 신부집에서 허혼을 하는 절차
@ 납폐(納幣) - 신랑 집에서 납폐서를 써서 사자를 통해 신부집으로 보내면 이것을 받고 주인이 붇향하여 재배한 다음 음식과 술로 사례한 다음에 답장을 써주는 과정
@ 친영(親迎) - 혼례식을 실제로 거행하고 신부를 맞아들임
당시는 파격적인 친영을 최초로 실행한 왕운 태종인데 1407년 세자가 김한로의 딸을 친영으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세종때는 왕세자의 친영을 결심하고 의식절차를 정하는 과정에서 격론이 벌어지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단다.
과도기시대에 친영제도는 사회무넺로 등장을 하고, 심지어 친영파는 법으로 규제를 해야한다는 강경론을 들고나오기도 했으나 사실 이문제는 사대부들의 다툼이었을 뿐 서민들에게는 뿌리가 깊은 서류부가혼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타협점인 반친영
이러한 다툼은 결국 반친영으로 타협을본다.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3일 친영이 그것이다. 결혼을 하고나면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3일만 자고 오는 3일 친영이 16세기 후반 서울지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3일만 자고 돌아오는 이, 아이를 낳아서 기르다 오는이 등 제각각이다가 서서히 절충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3일 친영이 아닌 하루로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조선말기에 들어오며서 가부장적 봉건질서가 확고하게 자리하면서 모권제의 유습인 처가살이는 차츰 사라지게 된 것이다.
<출처 - 여기저기...>
남자들아...
결혼을 하고 명절이 되거나 하면,
시댁부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그럼 한마디 해주고 싶군...
됐거든요~~
저는 한 집의 딸이며 며느리이고 딸아이를 가진 엄마이기도 합니다.
저희 친정도 시댁도 시댁에 가서 명절을 보내고 친정으로 가는 것을,
행사가 같은 날 있다면 시댁으로 가야하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저도 결혼 전엔 그런 거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몇번 속상한 일이 있고보니
저뿐만 아닌 대부분의 우리나라 며느리들이 겪는 일이더군요...
당사자들 조차 의구심을 갖기보다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았죠...
하지만 왜 당연해야하죠?
두사람이 의논하면 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주위 어른들이 가만히 계셔주실까요?! 과연 몇%나 봐주실까요?!
저도 저 글을 썼습니다만 한쪽으로 치우쳐 잘못 뿌리내린 고정관념으로
인한 관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 나라의 며느립니다.
저런 치우친 관습을 딸아이한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않은
엄마의 심정으로 쓴 글일뿐입니다!!
추신 - 이글을 보시고 옳지않다고 판단되신다면 이글만 비판해주세요...
저의 식구들,제 아이까지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넘겨 불쌍하다느니 하는 그런 말... 최소한의 에티켓은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부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