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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김수민 |2006.10.16 12:14
조회 33 |추천 0

 

  하지만 내가 이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일을 하기로 결정한 직후 한 대학생이 물었다.

  "재미있는 세계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

  이렇게 대답하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긴급구호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 맛보기로 갔던 케냐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곳의 이동 병원에 사십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를 만나려면 대통령도 며칠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한 의사였다. 그럼에도 그런 강촌에서 전염성 풍토병 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치료하고 있었다.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이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러자 이 친구, 어금니가 모두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일고 머릿속이 짜릿해졌다. 서슴없이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 의사가 몹시 부러웠고, 나도 언젠가 저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방금 그 말을 한 것이다.

  그 의사의 다음 말도 떠오른다. 그는 구호 일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기술을 습득하느냐보다 어떤 삶을 살기로 결정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했다. 거칠게 이분화한다면 이런 게 아닐까. 자기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힘있는 자에게 보태며 달콤하게 살다가 자연사 할 것인지, 그것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세상의 불공평, 기회의 불평등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할 것인지. 혹은 평생 새장 속에 살면서 안전과 먹이를 담보로 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할 것인지, 새장 밖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창공으로 비상할 것인지.

 

 

 

 

   태어날 때부터 전문가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누구든지 처음은 있는 법. 독수리도 기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가. 처음이니까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많겠지. 저런 초자가 어떻게 이런 현장에 왔나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일을 시작한 지 겨우 6개월이 된 나와 20년 차 베테랑을 비고하지 말자.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만을 비교하자. 나아감이란 내가 남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데 있는 거니까.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고 실수하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야.

 

 

 

 

   현장으로 떠나기 얼마 전에 받은 이메일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당신들이 목숨 바쳐 일한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받는 사람 전체 중 얼마를 돌볼 수 있느냐, 잘해봐야 10만분의 1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맏는 말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면 맥이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되새긴다.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주었다.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했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이것이 내 마음이다. 그리고 전 세계 긴급구호 요원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나랑 두 살 차이인 남동생은 최근 몇 년간 경제적인 부침을 겪었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할지 뼌히 알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보낸 이메일 한 통이 나를 울렸다.

   '막내누나, 난 지금 권투 시합중이야. 센 상대방 선수에게 잽을 많이 맞아 비틀거리다가 방금 정통으로 한 방 맞아서 링 위에 뻗어 있어. 심판이 카운트를 하기 시작했어. 하나, 둘, 셋. 그러나 나, 정신은 놓지 않았어. 숫자 세는 소리 똑똑히 듣고 있어. 그러면서 힘을 비축하고 있지. 열 세기 전까지만 일어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때 일어나서 다시 싸우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막내누나, 지금 링 위에 누워 있다고 걱정하지 마. 열까지 세기 전에 꼭 일어날게.'

   약속대로 내 동생은 다시 일어나주었고 지금도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뜨겁다고 해서 어떻게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하는 일마다 다 잘할 수 있겠나. 그럴 리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다. 처음 먹었던 마음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도 없다. 그러나 하기로 한 일을 끝까지 할 자신은 있다. 그 일을 하면서 내가 가진 어떤 힘도 아끼지 않을 자신도 있다. 물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처럼 안 되는 일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진인사(盡人事)'했노라 말할 수 있다면 그 일에 미련도, 후회도, 원망도 없다.

   이 일을 하면서 좋은 일 한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긴급구호 요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런 얘길 듣는 건 정말 쑥스럽고 민망하다. 그러나 처음의 마음 변치 않고, 있는 힘을 다했으리라고 믿어주는 그 마음만은 기꺼이 받고 싶다. "저 사림이 최선을 다했다고 하면, 그 말은 믿어도 좋아."라는 말은 내가 받고 싶은 최고의 찬사다. 나는 천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놓은 일보다 보통 사람이 몇 년에 걸쳐 땀과 열정을 바쳐 이룬 일이 훨씬 값지다고 생각한다. 진인사 후 대천명(盡人事後貸天命)이다. 사람이 할바를 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늘의 도움을 청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떳떳하다.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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