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히는 일은 늘 쑥스럽고 부끄럽다”는 최미애.
그는 한국인 최초로 도쿄 ?파리 컬렉션에 진출한 한국 패션모델의 대명사다.
홍익대 근처로 이사 온 지 1년 반, 아직 길 건너 골목은 구경도 못해 본 그는
서울 ~ 파리, 아프리카를 버스 한 대로 왕복한 여행가다. 올 해로 마흔 두 살,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대학 교수인 최미애의 꿈은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해질녘, 홍익대 근처의 한 커피숍에서 최미애를 만났다. 키가 크고 눈이 깊었다. 그는 인사를 받자마자 무표정한 얼굴로 용건을 물었다.
“어디라고 했죠?”
말투가 나른하면서도 또박또박했다. ‘대학생 아니면 만들 수도, 만들 이유도 없는 매체’라고 소개했더니 다행히 반가운 기색을 보인다.
“난 학생들이 좋아요, 순수하니까. 어른들은 피곤하거든, 아부만 하고….”
백제예술대학에서 모델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는 실제로 일주일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안팎에서 제자들과 보내고 있다. 그나마 일 문제로 어른들과 주말약속을 잡았어도 제자들이 선생님을 찾으면 선약을 깰 정도라고.
커피숍 밖에는 하늘색 스쿠터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는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더니 뒷좌석을 가리켰다.
“타요.”
농구가 싫었던 키다리 소녀
최미애는 1965년 의정부에서 태어났다. 여느 아이들처럼 그의 손도 흙장난으로 깨끗할 새가 없었다. 겨울이면 오빠와 함께 얼음배를 탔다. 양말이 젖는 일이 잦아 부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벽에 툭툭 쳐서 말리곤 했다. 그 시절 기억속의 아버지는 바람둥이(?)였는데 술만 마시면 어머니랑 다퉜다. 그 때마다 그는 분홍 보자기로 짐을 싸놓고 울면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다행히 ‘가출’할 일은 없었다(지금의 당신은 두 아이의 훌륭한 할아버지다).
그는 영어를 잘했다. ‘넌 영국 사람처럼 생겼으니 앞으로 영어를 쓰면서 살 것’이라고 말해 준 선생님이 좋아서였다.(이 말은 현실이 됐다) 그러나 또래 남자 아이들보다도 키가 크다는 점은 콤플렉스였다. ‘키가 크니까 외국 남자랑 결혼해야겠어.’(이 철없던 꿈도 현실이 됐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에게 억지로 농구를 시켰다.
“고2 때까지 합숙소에서 살았죠. 농구가 싫었어…. 그래서 아버지한테 ‘그만 두겠다. 왜 딸의 인생을 당신 마음대로 결정하느냐’고 대들었다가 처음으로 따귀를 맞았어요. 그러곤 한 1년 반 동안은 서로 말도 안 했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농구에 시달리는 동안 공부하던 친구들은 이제 하나 둘 대학에 가는데 유독 자신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키 때문이야.’
“졸업하면 자살하려고 했어요. 그 후엔 내 인생 같은 거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학교 안 가고 집에 있으니까, 아무도 나한테 키 크다는 얘기를 안 하는 거야…. ‘어? 내가 왜 죽으려고 했지?’싶더라고요. (웃음)”
영양사 안 되길 잘했지
담임의 체대 입학 권유를 외면한 그는 친구 따라 가서 본 시험에 덜컥 합격, 한 전문대의 식품영양학과에 들어갔다. 엉겁결에 들어간 대학, 그러나 ‘내 길 아니다’ 싶긴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기왓장에 삼겹살 얹어서 술 마셨어요. 남자 친구랑 여관에 틀어박혀 ‘영진 구론산’ 마시면서 야한 비디오도 보고…. 공부는 뒷전이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가 남는 시절이었죠. 대학생 때 보고 듣고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아마 제가 전공 살려서 영양사 됐으면 여러 사람 다쳤을 거예요. (웃음)”
1985년, 그는 남자친구의 소개로 모델라인에 들어갔다. 패션모델은 ‘운동 말고도 키 큰 여자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매력적이진 않았다.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 일에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 게다가 당시 패션모델의 위상은 요즘과 많이 달랐다.
“심하게 말하면 그 때 사람들은 모델을 술집여자처럼 여겼어요. 그러니 모델로서 ‘뭐가 돼 보겠다’는 생각도 없었죠. 난 단순했어요. 그냥 내 일만 철저하게 하자, 단 잘못된 건 잘못 됐다고 하자… 그런 마음이었죠. 그런데 아무 욕심 없이 살다 보니까 일이 잘 풀렸는지 ‘신인 유망주’ ‘톱 모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최미애는 10년 동안 패션모델로 활동하면서 궂은 일을 많이 겪었다. 좋은 일도 있었다. 지금의 남편이자 사진작가인 장 루이 볼프를 만난 게 첫 번째, 직접 만든 포트폴리오를 들고 해외를 동분서주, 도쿄와 파리 콜렉션의 ‘한국모델 1호’가 된 것이 두 번째였다. 이 일로 그는 한국 패션사에 한 획을 긋고 자기 일에서 자부심도 찾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전업하고 외환위기 등 어려운 고비들이 수시로 찾아왔지만 특유의 ‘단순함’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인내심 하나는 끝내줘요. 한 번 마음 먹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순순히 받아들이죠.”
여행,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자리를 잡아갈 무렵 두려움이 엄습했다. 삶이 정체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일에 미쳐 있는 만큼 일에 지쳐갔다. 자유와 변화에 대한 목마름은 깊어졌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난 벌레를 싫어하고, 겁이 많아요. 혼자 밥도 잘 못하고요. 지금 사는 동네 길도 잘 몰라요. 그런데 종종 ‘지금 떠나면 내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가 있어요. 그 때는 앞뒤 안 보고 떠나야 해…. 대부분 쉬운 여행은 아니죠. 그래도 가슴이 이끄는 대로 덤벼요. 복잡하게 생각하면 절대 못 할 테니까.”
최미애는 남편 루이와 의기투합, 생활비를 털어 버스를 장만했다. 그리고 직접 여행용으로 개조했다. 최미애 가족은 이 버스에 몸을 싣고 318일간 서울에서 파리로, 다시 서울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얼마 후에는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았다. 하나같이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여행이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방랑벽’은 여전하다. 올해도 대학생 2명과 함께 오토바이 전국여행을 다녀왔다고.
“한 명은 자신감이 많이 부족했어요. 늘 바닥 내려다보고 신발만 긁적긁적…. 다른 한 명은 겸손함이 부족했고요. 그 친구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넌 사람들 얼굴 거리낌 없이 볼 수 있게 해 줄게, 넌 사람을 잘 대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다녀와서는 정말 제 말대로 됐어요. 여행을 하면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이라도 도울 줄 아는 삶을 배우게 되거든요.”
이 여로를 담은 최미애의 4번째 여행기는 연말쯤에 책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좋은 어른은 단순하다
“어른도 꿈과 삶의 목표를 가지고 늘 긴장하면서 살아야 해요.”
어느덧 마흔이 넘은 최미애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다. 다름 아닌 ‘좋은 어른’이 되는 것. 그가 보는 지금의 기성세대는 돈, 집, 아이 학원비 따위에 생각이 고정돼 있고, 젊음을 향수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늘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원하는 ‘형식화된 어른’일 뿐이다.
“전 모아둔 돈이나 땅 같은 거 없어요. 제자들 밥 사줄 만큼만 있으면 되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동대문에서 2만원, 3만원 주고 샀고…. 뭔가 자꾸 가지고, 꾸미려는 사람은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자기 꿈이 있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가 내린 꿈의 정의도 그를 닮아 단순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부조리한 일을 억지로 하고,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손 비벼야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원하는 일을 찾아서 하다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참을 수 있다. 많이 가져야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많이 베풀어야 어른이 된다.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게 어른이 아니라 노인의 주름진 미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게 어른이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어른이 되는 게 가능할까?
“(자신을 가리키며) 여기 가능하다는 증거가 하나 있잖아요. 믿기지 않겠지만 전 정말 제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처음 모델 할 때 선배들한테 시달리기도 많이 했고, 왕따 비슷하게 된 적도 있었죠. (웃음) 그래도 말이죠, 내 마음이 원하는 길을 성실하게 가다 보면, 처음에는 주위에서 손가락질해도 나중엔 결국 인정받게 돼 있어요. 너무 미리 겁먹지 마세요.”
최미애는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이 ‘머리를 그만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요즘 친구들은 너무 머리를 많이 굴리는 것 같아, 젊은이 답지 않게…. 머리를 써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어요. 머리만 쓰면 오래 못 가요. 머리 잘 써서 편하게 사는 게 꿈이라면 노인보다도 못해. 청년이 아닌 거예요. 불행하죠. 어떤 경우에도 머리와 몸을 함께, 말과 행동으로 옮기세요. 꿈을 미련하고 힘들게 행동으로 옮기는 시간동안 우리는 진실로 자유롭습니다. 여행은 그것을 느끼게 해 주죠.”
스쿠터에 몸을 싣고 흐르듯이 어두운 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복잡해진 머리를 비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졌다.
단순하게.
글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 사진 신경미 Studio Zip
출처는 '대학내일'이고요, 밑줄과 굵은 표시는 제가 한 것입니다. 제게 공감가는 부분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