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2006/10/16~10/20)
언젠가 TV드라마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역사책에서 "사도세자"라는 이름을 몇번 들어보기도 하였지만,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뒤주속에 갇혀 8일만에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운명은 내 머리속에 그저 단편적인 해프닝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하지만 왜 그는 뒤주 속에 갇혀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역사의 전후 과정의 흐름은 무엇이었을까?
이렇듯 조선 왕조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내게 이 책은 숙종대부터 경종, 영조,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역사를 밝히고 그 의미를 더해 주었다.
저자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한 그의 후서 <조선왕 독살사건> 에서 언급한 경종과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죽음을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과 함께 세세한 흐름을 들려주어 깜깜하기만 하던 내 역사지식의 한 켠에 작은 등불이나마 되어 준것만 같아 이 책 <사도세자의 고백>은 참 반갑기만 하다.
숙종이후 즉위한 경종과 그를 폐하려는 이복동생 영조와 집권 노론.
결국은 경종 독살설까지 돌게 하면서 즉위한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당을 초월한 정책을 펼치려 한다.
하지만 선왕(경종)을 폐위하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노론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임인옥사 때의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영조)의 이름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과, 영조의 생모가 천한 신분이라는 두가지 컴플렉스에 그는 발목을 붙잡히고 만다.
이로써 영조는 경종 독살설에 이어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극이 비극을 낳는 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르른다.
결국 영조는 이름뿐인 탕평책 아래 집권당인 노론 중심의 정치로 치닫게 되고, 자신과는 달리 소론과 함께하는 세가가 비행을 저지른다는 노론의 계략을 빌미삼아, 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하다 뒤주속에 가두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하지만 훗날 영조를 뒤이은 정조(세손)는 즉위를 하자마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또 다른 비극이 싹트기 시작한다.
아버지 세도세자가 노론의 계략속에 영조의 미움을 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영조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숨죽어 있던 정조가 드디어 자신의 속내를 내보인 것이다.
꺼져가는 조선역사의 마지막 등불이라 할 수 있는 정조는 세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의 무리들을 하나 둘 처단해 나가기 시작하고, 집권 노론의 국가가 아닌 군주의 국가, 그리고 백성을 위한 조선을 만들기 위해 개혁정치의 뜻을 펼쳐 나가려 한다.
즉, 장용영과 규장각을 설치해 노론과 맞설 세력을 키우는 한편,노론 인사들로 가득찬 한성이 아닌, 자신의 뜼을 펴지 위한 새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기 위해 사도세자의 융릉을 화성으로 이장하고 수원화성을 중축한다.
그리고 숙종이후 재야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남인들, 즉 정약용 등을 등용하는 등 개혁군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간다.
그러나 결국은 그 뜻을 다 펴보기도 전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노론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정조 독살설과 함께 정조는 역사의 뒤편으로 아스라이 사라지고 그의 개혁의지는 미완으로 끝이 나고 만다.
국사 교과서에서도 몇 마디 언급되지 않았던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이렇듯 그의 아버지 영조와, 아들 정조에 이르기까지 인과관계의 다리가 되어 조선의 역사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받지않고 영조를 뒤이어 즉위를 했다면 조선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었을까?
아니, 정조가 노론의 방해 없이 그의 개혁의지를 제대로 펼 수 있었던 세상이었더라면 조선의 최후가 그리 비참하지만은 않았을 것을..
정조에 이어 즉위한 순조 때부터의 세도정치와 일제 강점기의 상황 모두가 조금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을, 사도세자의 반대편에 섰던 집권노론과 세자와 같이한 소론 인사들 양편이 완충장치 없이 좁은 뒤주에서 맞부딪친 결과 발생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