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현식의 휴먼다큐

1958년 1월 7일-1990년 11월 1일,한국 최고의 소울&블루스 싱어 김현식이 3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6집 녹음 중에 숨을 거두었던 그의 노래는 고독과 슬픔의 응어리였고 삶은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 그자체였다. 그가 떠난 지금도 그가 다하지 못한 노래를 그리워하는 추모 행사가 이어져 그가 남긴 가요계의 깊은 발자욱들을 더듬어 보게한다.
* 삶속에 숨겨진 고독,방황 그리고 음악 *
김현식은 1958년 1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분이었고 할아버지 역시 사업을 하셨던 분으로 충남 홍성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또한 충북 옥천에서는 유명한 만석꾼의 아들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온 영문학자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집안 환경 속에서 그가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울에서 바쁜 사업 관계로 김현식은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국민학교 때까지 아이들에게 서울 촌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과 융화되지 못한 채 항상 그들을 혼내주기에 바빴다. 그런 그의 시골생활은 진한 고향냄새를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낭만스럽고 자유로운 공간으로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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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아란 하늘,아주 깜깜했던 밤,별이 유난히도 많았던 밤. 그런 아름다운 추억으로 *
그 후,김현식은 아버지의 사업이 안정되면서 4학년 때 서울 삼청국민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후에 음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학교에 우연하게도 전인권이 6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김현식은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세고 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이것은 그가 음악생활을 하면서도 그러했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다시 6학년 때에 당시 학군제의 변경을 결정한 문교부의 방침 때문에 그는 수유 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잦은 전학은 그의 어린시절에 친구를 시귈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때서부터 그의 외로움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엄격했던 아버지 밑에서 그의 성적은 늘 상위권을 맴돌았으며 다른 어떤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는 당시 명문이었던 보성 중학교에 전교 4등이라는 성적으로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그때쯤 그는 처음으로 기타를 만지기 시작하였다. 선천적 소질이 있었던 탓인지 연주실력은 날로 향상 되어갔다.
당시 박인수의 ,비틀즈의 ,CCR의 등이 그의 단골 레파토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행복감이 깊어질수록 성적은 계속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평소 운동을 좋아하던 김현식은 음악 말고도 아이스하키에 들어가면서 급기야 공부만 하던 모범생에서 기타와 스케이트에 정신이 팔린 문제아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그러던 시기에 그에게 처음으로 시련이 닥쳤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더라도 간장공장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기울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가수가 아닌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입에 닥쳐 그는 다시 공부를 하였으나 명문 경기고에 낙방,잠시 방황기를 보내며 기타를 벗삼아 지내다가 후기로 명지고에 입학하였다. 그가 명지고를 택했던 이유는 단지 그학교의 밴드부가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전교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하였으나 그는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밴드부에 들었고 이때부터 음악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혀갔다.
겁없이 떠도는 거센 방황을 부드럽게 잠재우는 것이 음악이었고 몸서리치게 밀려오는 외로움을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또한 음악이었다. 그때는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밴드부는 그런 기대감과는 달리 그의 음악적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였다. 잔심부름이 고작이었고 걸핏하면 단체기합을 주는 선배들의 눈치를 보아야했고 그런 선배들이 없는 틈을 타 트럼펫을 불어본 것이 잘못 걸려 건방지다며 심하게 구타를 당하게 되었다. 그것이 김현식의 반항기질을 건드리게 되었고 '밴드부에 들어와 악기를 연주하고 싶었던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며 대들다가 선배들과의 주먹다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일을 계기로 그는 공부도 음악도 흥미를 잃게 되었고 깊은 좌절감으로 부모 몰래 학교에 자퇴서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결과적으로 김현식은 가수로서의 진로를 굳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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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면서 그는 무명 통기타 가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음악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무렵 음악다방에서는 가수 지망생을 위한 오디션이 있었는데 그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비틀즈,CCR의 노래를 즐겨 불러 그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명동의 '쉘부르','썸씽'그리고 당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국제호텔 나이트클럽 등에 출연하면서 다운타운가에 그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장희氏의 친동생 이승희를 만나 듀엣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나이트클럽과 라이브 업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서로의 음악성을 위하여 이승희와 헤어지기로 합의,다시 김동환을 만나 듀엣을 하기로 의기투합 함께 피나는 연습끝에 다운타운가에서는 꽤 인정받는 듀엣으로 불려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김현식은 이때에 심한 좌절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밤업소일에 지쳐있던 그가 피곤을 잊기위해 잠시 대마초에 손을 댔던 것이 경찰에 구속되었던 것이다. 바로 1978년의 일이었다. 8개월동안 실의와 죄책감에서 고생을 겪은 후 그가 다시 돌아갈 곳은 밤업소 일과 음방다방 뿐이었다. 이 시기에 만든 노래가 이었다. 그때 그의 음악성과 열정을 지켜보던 음악선배 이장희가 그에게 서라벌레코드를 주선해 주었다. 하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고 난 직후의 김현식의 이미지를 염려한 탓에 그의 앨범은 녹음이 끝나고 2년이 지난 80년에 비로소 데뷔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앨범엔 김현식의 데뷔곡이자 훗날 그가 결성한 그룹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 이 수록되어있다. 이라는 곡은 김현식이 스무살 즈음 만든 곡인데 그가 애착을 가진 곡으로 어디서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면 꼭 이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래서 2집에도 다시 수록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그의 옆에 세운 '노래비'에 그 노랫말로 채워넣기도 하였다.
그는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조그만 무대에서 어설픈 몸짓으로 노래를 불러도 그에게 박수를 쳐주고 비록 얼굴을 많이 내보이지는 않았지만 간혹 알아봐주고 반가워하는 팬들이 있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가수의 커다란 숙원인 독집앨범을 내어 정식가수로써 한걸음 내딛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유모를 공허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진정 음악을 위한 길인가'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꼬리표처럼 그의 생각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다시 방황을 하며 거리를 헤매이던 시기 신촌에서 옷가게를 경영하던 김경자氏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외롭고 쓸쓸한 서성임 끝에 만나게 된 사랑이었고 허전한 마음을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은 그 두사람은 82년 봄 명동의 YMCA 강당에서 잘아는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막상 사랑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앨범 한장을 낸 무명가수가 현실을 지탱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부인의 솜씨를 빌어 피자가게를 내게 되었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최신식 설비를 갖춘 대형가게에 밀려 문을 닫게 되고 그에게 음악만이 삶을 다시 개척하는 길이었다. 그때가 84년이었다.
김현식은 2집 준비를 위해 서라벌에서 동아기획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동아기획은 들국화를 방송에 의지하지 않고 라이브무대만으로 대단한 인기를 모우고 있던 의식있는 프로덕션이었다. 동아기획은 무명이지만 김현식의 음악적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었고 김현식은 동아기획이라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세계를 가장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동아기획과 김현식은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었고 그런 서로의 생각은 기대 이상이였다. 데뷔앨범에서도 몇편의 자작곡을 발표한 바 있는 김현식은 2집에서 10곡 중 9곡을 작곡해 실력파 싱어송라이터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그 중 는 많은 대중들에게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 등도 다운타운가를 중심으로 꾸준한 인기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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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은 이처럼 자신의 인기가 급속도로 오르자 본격적인 자신의 그룹을 결성해 보다 활동적인 무대를 갖게 되었다. 그는 평소 함께 음악을 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모았는데 그 멤버는 현재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전태관과 '빛과 소금'의 박성식,장기호,그리고 ,라는 명곡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유재하였다.
그는 자신의 데뷔앨범에 있는 곡명을 그대로 딴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고 팀명을 정하고 그들과 함께 방송보다는 콘서트와 라이브 무대에서 생생하고 살아있는 음악을 들려주었고 콘서트 문화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키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86년 4월부터는 개인적인 음악활동 뿐아니라 이정선,엄인호,한영애,정서용 등 실력있는 가수들과 뜻을 같이해 연대 앞에 위치한 '레드 채플린'에 모여 잼 형식의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정해진 형식에 갇혀있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이 타 가수들처럼 방송에 얽매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펼쳐 이른바 '얼굴없는 가수'로 유명해졌으며 이러한 가수들을 통칭하는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리는 것도 이즈음이었다. 방송을 타지 않고 음악만으로 대중과 교류를 이루는 실력파 가수들의 대명사처럼 쓰인 '언더그라운드'의 대부분은 동아기획의 가수들이었고 그 중 김현식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연출하는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해 나아갔다.
그의 활발한 활동이 지속되면서 이어 86년 3집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관계자나 대중들에게 명곡으로 평가 받으며 김현식의 대표곡이라고 꼽힐 수 있는 ,,유재하 작사.곡인 등이 수록되어있다. 이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적절히 조화된 앨범으로 그의 독특하고 개성있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높은 음반판매량,작사,작곡,녹음,쉴틈없는 연습 그리고 수차례의 라이브 공연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인 음악열정을 가진 그에게 있어 최고의 전성기였고 가장 바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생활은 잠시,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을 공허감이 있었다. 노래를 하면 할수록 그 공간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는 늘 그런 공허감과 이유모를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끝내 그에게 다시 대마초를 접하게 하였고 87년 10월 김현식을 비롯한 들국화의 전인권,허성욱 등 마약상용혐의인 차디찬 철창이 내려졌다. 그의 미래를 단절시켜버린 듯한 침침한 철창안은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는 헤어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비록 2개월 남짓한 시간이었으나 그에게 있어 그 기간은 2년도 넘는 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던 날 그는 긴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참회의 뜻으로 머리를 삭발을 하였다. 구속기간동안 깊은 고통과 참회의 마음이 팬들에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두려움과 재기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삭발을 한 채 라이브콘서트를 열었다.
그러나 6천명 넘게 모인 팬들은 그를 용서하였다. 그리고 진심어린 따스함으로 그의 재기를 반가워했고 그의 음악열정에 박수를 보냈다.을 부를 때 이미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해 말 3집 앨범판매고와 의 인기를 통하여 제3회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다. 골든디스크상 수상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로서는 최초였으며 한국적인 감성과 혼을 허스키하면서 샤우트한 음성으로 토해낸 노래가 대중에게 꾸준한 사랑을 모았으며 평론가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그의 재기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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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블루스와 소울을 가미한 를 타이틀로한 4집 앨범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그가 아끼던 끈끈한 하모니카 연주곡인 이 담겨져있다. 그는 신촌블루스와 , 등이 담긴 앨범도 함께 발표하는 등 왕성한 음악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는 술을 마셨다.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음악열정과 현실에 대한 괴리감,음악을 하는 가수로서의 위치와 안정된 생활 사이에 겪는 내적 갈등을 늘 술로 달랬다.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주위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과 자신의 생활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술과 방황을 하였다. 그럴수록 그의 건강은 나빠만 갔고 항간에는 그가 간암에 걸렸다,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다는 소문도 커져만 갔다. 그런 소문들을 불식시키고자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감에도 불구하고 89년 신형원,권인하,강인원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앨범 를 발표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음악활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술을 떼어놓지 못하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모든 일에서 자유롭고 싶던 그에게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날로 상해가는 얼굴색과 붓기가 가라앉지 않는 몸을 보면서 많은 동료가수들이 안타까와했고 그는 마지막 투혼을 노래에 쏟아 붓고 있었다.
90년 3월에는 자신의 미처 내뱉지 못한 마음을 담은 듯 를 타이틀로 한 5집 앨범을 발표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반추해 보며 그가 자전적으로 꾸며본 앨범이었다. 그리고 다시 바로 6집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병원측에서는 김현식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절대 안정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무시하고 음악에만 매달렸다.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남겨두고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을까. 그의 그런 활동은 외로움과의 처절한 싸움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6집 앨범을 채 마치지 못하고 90년 11월 1일 세른 둘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가 담긴 6집에는 그 공백을 그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겼던 예전의 노래들로 채워져 유작앨범으로 발표되었다. 그의 습작을 엮어 내놓은 날 많은 동료가수와 그를 아끼던 팬들은 그의 짧았던 생을 아쉬워했고 그가 가지고 떠난 무한한 음악적 가능성이 너무도 그리워 91년 2월 9일 추모콘서트에는 63빌딩 공연장에 빼곡히 모여 그가 남겼던 노래를 부르고 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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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이 전부였던 삶 *
혼신의 힘을 다해 블루스와 소울 창법으로 토해내는 그의 뛰어난 가창력, 록이나 블루스를 통한 한국적 소리를 자신의 독특한 빛깔로 채색한 진한 노래, 불꽃같은 열정을 피웠던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은 또 무슨 말을 남겼을까. 또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마지막까지 투혼을 불사르며 병실에서 녹음을 하였던 그가 미처 세상에 내놓지 못했던 곡들이 빛을 보게 되는 날 우리는 다시 가슴에 묻어둔 김현식의 음악에 대한,김현식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1958년 1월 7일
서울 인현동에서 출생했다. 친가는 충남 홍성에서 조그만 사업과 농사를 함께 하는 유지 집안이었고, 외가는 충남 옥천의 명문가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캐나다에서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동생이 있다.
1965년
서울 혜화국민학교 입학. 3학년 때 옥천 외가에서 시작하는 갈포공장에 참여하려 아버지가 식솔들과 함께 내려가 죽향국민학교로 전학했고, 1년 후 다시 서울 삼청국민학교로 전학한다. 동료 가수 전인권이 이때 삼청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물론 둘은 서로 몰랐다.
197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 중학교 시절, 초반의 성적은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아이스 하키, 기타 등의 과외 일에 몰두하면서 하락했다. 이 시절 그에게 기타와 60년대 미국 록큰 롤을 함께 가르쳐준 사람이 사촌형 양국정이다.
1974년
전기 경기고에 낙방하고 후기 명지고에 입학. 밴드부에서 음악을 배우다 2학년초 자퇴하고 종로 제일검정고시학원 등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상은 이때부터 기타를 메고 종로, 명동 등지의 통기타 업소를 드나들기 시작한다.
1976년
포크송 가수 이장희의 주선으로 김현식 1집 녹음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장희가 갑작 스런 부도사태 이후 미국으로 도피해버려 마스터 테이프까지 나온 상태에서 첫 번째 독집 출반이 무산된다.
1980년
서라벌레코드사에 의해 계획보다 2년 늦게 김현식 1집이 출반됐다. 아직은 앳된 목소리에 소울, 록, 트로트들이 융합된 김현식의 초기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앨범이었으나 거의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김현식은 주로 밤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1982년
우연히 신촌의 한 의상실에 들어갔다가 만난 김경자 씨와 결혼한다. 동부이촌동 공 무원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인근에 피자가게까지 열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결혼이 가져다준 행복에 빠져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83년
그가 늘 '나의 분신' 이라고 부르던 아들 완제가 태어난다
1984년 10월
[사랑했어요]를 타이틀로 2집 앨범 출반. 다운타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다. 조원익이 리드하던 그룹 '동방의 빛' 리드싱어를 맡았고, 그룹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리드하던 '메신저스' 의 싱어도 맡으면서 서서히 밤무대 최고의 싱어로 부각되어간다.
1985년
김종진, 전태관, 고(故) 유재하와 함께 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조직한다. '봄 여 름 가을 겨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가 리드하기 시작한 최초의 그룹이다. 그러나 누나, 어머니 등 가족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고 부인 김경자 씨와도 별거에 들어가 개인적으로 는 가눌 길 없는 고독이 시작되던 때이다.
1986년
[비처럼 음악처럼]을 타이틀로 '봄여름 가을 겨울'과 함께 3집 출반. 2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음악대중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는다. 서서히 여기저기서 "김현식이 도대체 누구냐"는 말들이 나오면서 얼굴 없는 가수로 통하기 시작한다.
1987년 10월
전인권, 허성욱 등과 함께 마약상용 혐의로 구속된다. 이때 복용한 마약이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
1988년 2월
63빌딩에서 삭발한 채 재기 콘서트.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관중들은 그의 재 기를 열화 같은 박수로 성원해주었다. 스스로 자신에게 가장 기억되는 콘서트라고 말했다.
1989년 1월
이정선, 엄인호, 한영애와 함께 '신촌불루스' 3집 앨범에 참여한다. [골목길] [환상] [바람인가 / 빗속에서] 등의 곡들에서 강한 재즈, 블루스 지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1989년 11월
강인원의 주도로 권인하, 신형원과 함께 영화음악앨범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 참여한다. 이 가운데 싱글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각종 방송 차트에 오르면서 가끔씩 방송에 얼굴을 비친다. 그러나 마약에 이은 폭음으로 건강은 계속 악화돼 이때부터 병원을 주기적으로 드나든다.
1990년 3월 15일
[넋두리]를 타이틀로 한 5집 앨범과, '신촌블루스' 3집을 동시 출반한다. '신촌블루스' 3집에는 그가 부른 [이별의 종착역] 등이 있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6집 녹음과 '신촌블루스' '비오는 날의 수채화' 팀과 전국 각지를 누비며 라이브콘서트를 연다. 이때는 어쩌면 다분히 술의 힘에 의해 그의 몸이 유지되던 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1990년 11월 1일
지병인 간경화로 자택에서 사망. 장례식장에는 많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참석해 요절한 가수의 명복을 빌었다. (하오 5시 20분)
1991년 2월 9일
63빌딩에서 김현식추모콘서트 열림. 김수철, 이정선, 전영록, 강인원, 조하문, 한영애, 김태화, '봄여름가을겨울' 최호섭, 권인하 등 30여 명의 가수들이 참가, 김현식의 노래를 불렀다.
1991년
투병생활중 녹음작업을 했던 음악들을 묶어서 내 사랑 내 곁에를 타이틀로 제6집이 출반됨.
2002년 1월 22일
병실에서 투병생활중에 통기타반주로 불렀던 노래들이 녹음된 카세트 테잎을 원본으로 제작한 제8집 The Sickbed Live가 발매됨.
[故 김현식 유작시 모음]
#그대에게
서러운 겨울비가 내리는 밤
그대를 향한 그리움으로
오늘도 나는 뜬눈입니다.
이름만 남기고 떠나간 사랑은
슬픈 그림자로 남고
내 빈 가슴을 두드리며
한 줄기 여우비로 오는 그대
그대를 만나 사랑에 눈 뜨고
내 영혼은 숨쉬기 시작했지
기억할 수 없는 날들이 흐른다 해도
그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고
오늘도 나는 한쪽 어깨가 불편합니다.
#나는 언제나 나를 가둔다
1
깨닫는다는 것은 즐겁다
즐겁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 때문에 두렵다
두렵다!
두려움은 괴롭다
괴롭기 때문에 아프다
2
나는 언제나 나를 가둔다.울타리 안에서 처음엔 그
울타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넓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도
울타리 안에 있다. 내가 스스로 쌓은 울타리 안에.
3
병원엘 자주 간다. 가면 가루록 자주 가게 된다. 아픈
곳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것이 병이다. 병원을
다닌지 벌써 5년째나 된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4
잠을 자는 시간은 항상 틀리다. 꼭 그 시간에 자야 되는
건지 모르지만 나는 늘 나를 한정된 곳에 두지 않는다.
아침에도 자고 낮에도 자고 저녁에도 자고 새벽에도 잔다.
항상 잔다.
5
마음이 가는 대로 애기하고 싶다. 얘기할 사람이 없다. 진실성 결여.
6
보이는 건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고 들리는 건 생소하고
의심쩍고 언제나 벗어날지. 나를 밝은 곳으로. 너무
늦지도 그리 이르지도 않은 바로 지금 우리 함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찬양이 바른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거룩한 삶'이
되기를 바라며, 고백적인 삶의 연장선상에서 드려지는
진솔한 경배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러한 찬양과 경배가
고통 속의 자연 만물까지 메아리쳐 나가 이 땅이 새롭게
변혁되길 바라옵니다.
7
정말 잊혀질 수 있을까. 이 밤이 지나가면 또 다시 찾아오는
아침 햇살 아래, 또 그렇게 야윈 얼굴로 살며시 내다보는
나의 수줍은 마음, 무엇이 주저하는지(하고 있는지)
세상은 나를 보고 손짓하며 부르는데......
#너와 나
나는 틀림없이 여기 있어요
그러나 너 없이는 소용없는 나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너는 그것을 몰랐겠지요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그것을 몰랐답니다.
먹을 것이 내 입에 들어가야만
나는 살 수 있어요
먹을 것이 네 입에 들어가야만
너도 살 수 있어요
이것은 너와 내가 따로라는 것
(혼자라는 것)
혼자 낳고 혼자 죽는다는 것
(같이는 못 죽는 것)
그러나 너 없이는 소용없는 나
너와 나는 틀림없이 여기 있어요
# 너와 나의 곳
여보시오
술, 술, 술, 술 술을들어 이 술 한 잔
너와 나와 둘이서 마주 앉아서
속상하는 생각일랑 흘려버리고
오늘의 피로를 술로 씻으면
내일 있는 이 세상의 낙원이라오
여보시오
노, 노, 노, 노 노래를 노래부르세
너와 나와 둘이서 나란히 앉아
엉클어진 사연을 털어내 놓듯
우렁차고 힘차게 목청 울리면
어지러운 그림자 사라진다오.
여보시오
춤, 춤, 춤, 춤 춤을 춥시다
너와 나와 둘이서 손을 붙잡고
쌓이고 쌓인 가슴속 회포 풀면서
장단 맞춰 즐겁게 춤을 추면은
찌푸러진 하늘도 맑아진다오.
여보시오
다, 다, 다, 다 다른 곳에 무엇이 있어
너와 내가 있는 곳 이 곳이 그 곳
노여움과 기쁨이 서로 엉키고
슬픔과 즐거움이 오가는 곳
이곳이 바로 너와 나의 곳
(두 사람의 곳)
# 넋두리
쓸쓸한 거리에 나홀로 앉아서
바람에 떨리는 소리를 들었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설레이는 이내 마음이여
꺼질듯 타오는 거리에 네온을
내품에 안고서 헤매고 있었지
멀리로 떠나는 내님의 뒷모습
깨어진 꿈이었지
힘없는 내 발길에 다가선 님의모습
인생을 몰랐던 나의 길고 긴 세월
갈테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 들면
가다가 지치면 또 일어나겠지
# 비망록
내 영혼은 죽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나는 내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내 영혼은 뜨겁게
아주 뜨겁게, 살아있습니다.
내 마음은 오염됐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나는 내 마음을 버렸습니다.
아니, 내 마음은 아이처럼
항상 그렇게, 순수합니다.
내 영혼은 죽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 사랑I 사랑II 사랑III 사랑IV 사랑V
사랑 I
누구나 다 같이
사랑한다고
절실한 그리움과
애타는 정열 속에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요
지구의 끝, 아니 우주의 끝까지
같이 갑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니예요.
죽음도 우리를 갈라 놓지는 못해요.
아아, 누구나 다 같이 사랑한다고
너와 나 밖에 없다고
애틋한 절규가 오열처럼 터질 때
우리 둘의 포옹은 화석으로 변해도 되요
사랑은 영겁의 불길이기에.
사랑 II
마디마디 얼킨 손가락
살며시 풀어지며
허리를 감싸안은 그대와 나
그대는 누구일까요
지금 나는 없는 것 같아요
내가 느껴지네요
사랑한다고 몇천 번을 되풀이해도
채워지지 않는 이 목마름은 무엇일까요
당신이 무엇이길래 내가 없어졌나요
당신이 무엇이길래.
사랑 III
비가 옵니다
그대로 맞고 가지요
흠뻑 젖은 머리카락에서 어깨로
차가운 물방울이
손끝으로 떨어져오면 그 손으로
당신의 입술을 어루만지고 싶어요
야릇한 탄력이 전류처럼
손가락 끝에 떨리면
심장의 고동이 멎을 것만 같아
얼굴을 하늘에 대고
하염없이 빗줄기를 맞아봅니다.
사랑 IV
아버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직 당신 생각만으로
나를 때려도 사랑하기에 맞습니다
매를 드는 이유가 엉뚱하여도
또 하나의 사랑을 눈빛에 느껴
나는 조용히 매맞습니다
바다사람을 산사람이 모르고
산사람 바다사람 모르니
가보고 올라봐야지
틀림없이 사랑은 있는 것 같아
매를 드는 사랑도 사랑이려니
납득할 수 없는 매를
무릎꿇고 맞아드려요.
사랑 V
사랑은 이별의 시작
이별은 아픔의 시작
아픈 마음에 남아 추억에 잠들게 해
만나면 사랑을 하고 때로는 미움으로
상처를 남기게 해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
그런 사랑은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
그런 아픈 만남은
소중히 간직했던 아름다운
내 사랑을
다시 만날 때까지.
# 사랑할 수 없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잊혀져간 그 모습 찾으러 갔었네
부는 바람에다 속삭여도
슬픔으로 젖은 나의 두 눈빛
내 맘에 와닿는 외로움은
그대 모습으로 달래도 보지만
이젠 너무 멀리 떠나버린 그대이기에
우리는 사랑할 수 없네
바람 결에 부는 내 사랑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이젠 내 맘 속에 추억만 남아 흐르는
저 세월 속에 잊혀져 가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잊혀져간 그 모습 찾으러 갔었네
부는 바람에다 속삭여도
슬픔으로 젖은 나의 두 눈빛
# 손톱
풀어야지
웅크린 내 마음을
풀어야지
엉킨 실마리를 푸는 것처럼
웅크린 내 마음을
풀어야지
고양이처럼 움추린 이 자세는
공격을 위한 것일까
습격을 피하려는 것일까
손톱을 감춰야지
손을 붙잡혀 잘리지 않도록
그리고 잽싸게
할퀴듯이 막아내야지
# 술
너 술 마실 줄 아니?
너 여자가 왜 그렇게 술을 마셔?
남자는 술을 그렇게 마셔도 돼?
술이 뭐지?
마시면 취하는 거지.
취하면 좋아?
이 꼴 저 꼴이 전부 좋은 꼴 같아져.
그럼 술이 깨면 어떡해?
또 마시면 되지.
그럼 자꾸자꾸 마셔야 되니?
그럼 자꾸자꾸 마시지.
(술이) 맛있다고 마시는 사람
(술) 먹지 말라는 사람
그래도 술이 없어진 일이 없잖아.
이꼴 저꼴이 있으면
술도 꼭 있어야 하나봐.
흐렸다 개었다가
생각났다 잊으면
술을 마셔야 해.
너 술 마실 줄 알어?
# 여름과 가을의 사이
돌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
젖은 바위의 피부가
햇빛을 머금고 반짝인다
마치 자연의 한숨인 양
나뭇잎을 간지르며
가을을 예고하는 바람
시끄러웠던 여름은 가고
바다에는 조용한 파도소리
먼산에는 소쩍새 우는 소리
때 이른 나뭇잎이 떨어지면
외로운 졸음만이
눈가에 서성이네
# 외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외롭다고 생각하지마
혼자라고 생각하지마
쓸쓸할 때엔
내가 너의 마음을 위로할텐데
웃지마
내가 너의 곁에 있어줄텐데
세상은 모두 그런 거야
그러면서 한평생 살아가는 거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린 똑같이 외로운 사람들이야
우린 똑같이 외로운 사람들이야
# 지상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
이 내 몸이 죽어가도
가슴에 맺힌 사연들은
내가 떠난 그 후에도
잊혀지지 않을 거야
이 내 몸이 병들어도
못다한 말 너무 많아
수북수북 쌓인 눈에
쌓인 눈에 묻혀질까
이 내 몸이 죽어가도
가슴에 맺힌 사연들은
내가 죽은 그 자리에
들꽃 한 송이로 피어날 거야
# 하나...,,,열
하나
깨닫는다는 것은 즐겁다.
즐겁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 때문에 두렵다.
두렵다!
두려움은 괴롭다.
괴롭기 때문에 아프다.
둘
나는 언제나 나를 가둔다.
울타리 안에서, 처음엔 그 울타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넓은 즐 알았다.
그러나 그것도 울타리 안에 있다.
내가 스스로 쌓은 울타리 안에.
셋
병원엘 자주 간다.
가면 갈수록 자주 가게 된다.
아픈 곳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것이 병이다.
병원을 다닌 지 벌써 5년째나 된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넷
잠을 자는 시간이 항상 틀리다.
꼭 그 시간에 자야 되는건지 모르지만
나는 늘 나를 한정된 곳에 두지 않는다.
아침에도 자고 낮에도 자고
저녁에도 자고 새벽에도 잔다.
항상 잔다.
다섯
마음이 가는 대로 얘기하고 싶다.
얘기할 사람이 없다.
진실성 결여.
여섯
보이는 건 가지고 싶고 만지고 싶고
들리는 건 생소하고 의심쩍고..
언제나 벗어날지.. 나를 밝은 곳으로..
너무 늦지도 그리 이르지도 않은 바로 지금
우리 함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찬양이
바른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거룩한 삶'이 되기를 바라며,
고백적인 삶의 연장선상에서 드려지는
진솔한 경배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러한 찬양과 경배가
고통 속의 자연 만물까지 메아리쳐나가
이 땅이 새롭게 변혁되길 바라옵니다.
일곱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름다운 꿈이 있었지
푸른 하늘 저 멀리멀리
나의 꿈을 그려보냈지
아주 작은 마음엔
여덟
정말 잊혀질 수 있을까.
이 밤이 지나가면 또 다시 찾아오는
아침 햇살 아래,
또 그렇게 야윈 얼굴로 살며시 내다보는
나의 수줍은 마음.
무엇을 주저하는지 (하고 있는지)
세상은 나를 보고 손짓하며 부르는데...
아홉
사랑하며 살고지고
노래하며 살고지고
얘기하며 살고지고
너도 나도 모두 같이 살고지고
에-헤 같이 살고지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너와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오랫동안 살아왔네-에.
열
외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외롭다고 생각하지 마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쓸쓸할 때엔
내가 너의 마음을 위로할텐데
웃지 마-하
내가 너의 곁에 있어줄텐데
세상은 모두 그런거야
그러면서 한평생 살아가는거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린 똑같이 외로운 사람들이야
우린 똑같이 외로운 사람들이야.
[故 김현식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에 연재된 수기]
[나의 성장기]
나는 가수라고 직업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을 얘기한다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또한 처음 있는 일이다.
日刊스포츠에서 처음 내 얘기를 싣자고 했을 때도 나는 내가 그렇게 스타인가 하는데 대한 의구심이 생겨 망설였다. 물론 음악이외의 방법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의 성격탓도 있지만.
이제 쑥스러운 고백을 시작한 만큼 모든 것을 숨김없이 솔직히 털어놓겠다. 그러니까 서른에서 마흔사이 내 나이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옛 생각과 꿈과 희망들을 나를 빌려서 얘기하고 싶다. 그래서 그 사람들과 같이 경험했던 사람들의 삶을 내 나름대로 다시 정리해보겠다.
나는 올해 서른 네살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충남 홍성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시며 농사를 짓는 유지였다. 외할아버지는 충북 옥천에서는 만석꾼으로 통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영문학을 공부하러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유학까지 갔다온 학자였다.
아버지는 혼자 서울에서 여러가지 사업을 했기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을 어머니와 함께 옥천의 외가에서 보냈다. 국민학교도 옥천에 있는 죽향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육영수여사가 다녔던 학교로 뒷산의 대나무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릴 때부터 나는 고집이 세고 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국민학교 입학식날 내가 없어져 찾아보니 상급생들 여러명과 학교 뒤에서 싸우고 있었다는 얘기는 집안끼리 모이면 아직도 단골로 등장하는 화제다.
서울에서 태어나 나는 서울촌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나는 나를 놀리는 거의 모든 녀석들을 방과 후에 때려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독기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나는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국교 4학년때 전학을 오게 되었는데, 그 학교가 삼청국민학교이다. 그때 가수 전인권이 그 학교의 6학년이었다. 그때는 전인권이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같이 음악을 하다 알게 됐다. 아무튼 묘한 인연이다.
6학년이 되던해 나는 다시 수유국민학교로 전학을 해야만 했다. 문교부의 방침이 학군제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를 사귈만하면 언제나 이별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래서 더욱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줄곧 성적이 좋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마치 캐네디가의 원칙처럼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뒤처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점은 거친 당시의 세상 속에서 사업가로 어느 정도 성공했던 아버지 스스로가 지켜온 원칙이었다.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아버지의 이런 점은 음악을 하려는 나에게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때 나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빼어난 미인이었던 용모만큼이나 정이 많아 늘 사업으로 집에 있을 날이 없는 아버지의 공백을 우리의 성장기간동안 대신 채워주었다.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투고 마당 한켠에서 울때면 나도 괜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퍼졌다.
아무튼 엄격한 아버지 덕으로 이듬해 나는 명문 보성중학에 입학했다. 그것도 전교 4등이라는 좋은 성적이었다. 첫번째 등교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반에서 1등이니까 반장을 맡으라는 거였다. 그렇게해서 나는 중학시절동안 내내 반장을 맡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는 성적이 나빴는데도 말이다.
중학교때 나는 처음으로 기타와 만났다. 나무통에 쇠줄을 붙인 단순한 악기가 아닌 지금까지 내 삶의 전부가 된 '살아있는 음악'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만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선천적 재질이 있었던지 고등학교 다니던 사촌형이 간단한 지도로도 나는 웬만한 곡을 반주할 수 있게 됐다.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그때부터 나는 어디가서나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박인수선배의 , 비틀스의 , CCR의 등이 나의 단골 애창곡이었다.
그러나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것이 행복해질수록 서서히 성적은 떨어져 갔다. 더욱이 운동을 좋아했던 내가 스케이트부에 들어가면서부터 성적은 전교 150등까지 급강하했다. 나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서 점점 기타나 스케이트를 메고 껄렁대며 다니는 문제아로 변해갔다 급기야 당시 한창 세력다툼이 치열하던 보성과 중동의 싸움판에도 끼여들게 되었다 그 싸움판에서도 유감없이 나는 어린 시절의 독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독종으로 이름을 날렸다.
중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은 사람은 1학년때와 3학년때 담임이었던 임선생님이다. 그분은 처음 반1등으로 들어간 나에게 많은 기대를 가졌었다.
그러나 3학년이 되어 다시 담임을 맡아보니 성적도 형편없는 갈데없는 건달이 바로 나였으니 무던히도 나를 야단치셨고 빗나가려는 나를 바로 잡으려 애쓰셨다. 임선생님의 꾸중을 들을때면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다짐도 했으나 그때뿐이었다. 나는 다시 스케이트와 가타와 주먹질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던 나에게 어느날 일이 닥쳤다. 간장공장을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당시 나에게 아버지의 사업실패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로인한 경제적 여파가 아이스하키 선수로서의 나의 꿈을 좌절시킨 것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당시 아이스하키는 웬만큼 가정이 유복하지 않고는 할수 없는 운동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그때 사업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나 아니 서른넷의 나이면 코치가 되어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곤 임선생님의 간곡한 설득과 뭔가 다시 몰두할 것을 찾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 사실 고등학교 입학시험도 얼마남지 않았었다.
성적은 거짓이 없어 노력하는 만큼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전교석차를 발표하는 게시판에도 내 이름이 오르기 시작했고 3학년말에 가서는 전교 30등까지 오를 수 있었다.
드디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게 됐다. 비교적 단기간에 성적을 끌어올린 나는 우쭐해지는 기분에 자신있게 최고의 명문 경기고에 원서를 넣고 시험을 쳤다. 학교에서의 합격예상은 반반이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험도 별반 어려운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시험을 마친후 집에 와서 나는 밤새 명문고에서 풀어갈 고교생활을 낭만적으로 꿈꾸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보기좋게 낙방이었다. 또다시 나는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린 좌절과 방황을 시작했다. 수유리 집주변의 논둑에 가서 밤새 기타를 치며 울부짖기도 했고 술과 담배도 조금씩 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보기 무서워 며칠씩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친구집에서 보내는 경우도 많아졌다.
묘하게도 이때 나는 첫사랑을 시작했다. 상대는 나보다 나이가 두살 위인 숙명여대 2학년 학생이었는데 연상의 여인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어느날 공원에서 기타를 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왔다.
『 [벌판다방]의 가수 』
그녀는 나의 애인이자 엄한 누나가 되었다. 어떤 때는 때이른 첫키스와 달콤함을 내게 맛보여 주었으며, 어떤 때는 무섭고 표독스러움으로 엇나가는 나를 질책했다. 나는 그녀 옆에서 행복했으나 가끔은 부담스러운 선생님과 함께 있는 것같이 불편하기도 했다.
몇달 후 나는 후기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석차는 전교 3등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공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명지고를 택한 것도 당시 유명하던 명지고의 밴드부 때문이었다.
나는 입학하자마자 선생님들의 만루에 아랑곳하지 않고 밴드부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숨어서만 하던 음악을 마음껏 해볼 참이었다.
그러나 밴드부의 졸병시절은 생각보다 무척 힘들었다. 악기에는 거의 손도 대보지 못하고 연습실 청소, 주전자 나르기 등 선배들의 심부름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고서도 걸핏하면 단체기합이었다. 학교 밴드부의 군기가 군대보다도 더 엄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선배들이 연습을 끝내고 나간 연습실을 청소하다가 갑자기 간절하게도 트럼펫이 불고 싶어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트럼펫을 잡고 불어대기 시작했다.
물론 부는 법도 제대로 몰랐지만 아무거나 누르면서 닥치는대로 불어대니 트럼펫 소리 비슷한 것이 세어나왔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는데 등뒤에서 '임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3학년 선배 중에서도 무섭기로 소문난 선배가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선배는 다짜고짜 내 뺌을 때렸다. '악기를 연주하고 싶어서 밴드부로 왔는데 한번 불어본 것도 죄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는 나도 대들었다.
급기야는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선배와 새카만 후배가 싸움을 벌였다. 선배들이 몰려오고 나는 아마 연습실 어느 구석에서 각목을 찾아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사건으로 나는 밴드부를 쫓겨나게 되었다. 퇴학을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치 머리를 깎인 삼손처럼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다. 공부도 학교도 음악도.
나는 자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은 검정고시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채 자퇴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일이 오늘의 나를 가수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을 가겠다는 막연한 생각과 집에서의 입장 때문에 제일 검정고시학원에 등록을 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내가 생각하기에는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나는 제일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해 다녔으나 점차 공부에는 흥미를 잃었다. 학원을 빠지는 날이 많아지는 만큼 나는 점점 종로통 깡패가 되어갔다. 세력다툼으로 싸우기도 하고 돈이 떨어지면 뒷골목에서 지나가는 아이를 겁주어 빼앗기도 했다.
그렇게 갈데없는 건달로 지내던 어느날 나는 어릴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종사촌형 집에 놀러갔다. 형은 당시 홍익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캠퍼스가수로 꽤 명성을 얻고 있었다. 형은 오랜만에 찾아온 나에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줬다. 아마 비틀스의 노래 몇곡과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들이었다고 기억된다.
사촌형의 노래는 얼마간 잊고 지냈던 음악에 대한 갈망을 내게 다시 불러 일으켰다.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는 사촌형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종로에 들러 새 기타를 샀다. 갖고 있던 돈을 다 털고도 모자라 손에 차고 있던 시계까지 풀었다. 그리곤 그날부터 집에 틀어박혀 맹연습에 들어갔다. 숱한 종로의 친구들이 전화도 하고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지만 나는 틀어박혀 기타만 쳤다. 어쩌면 더이상 아무것도 매달리 것이 없었던 그때 내 음악은 삶의 마지막 모험이었는지도 몰랐다.
웬만큼 기타솜씨가 붙었다고 생각된 어느날, 나는 결연히 기타를 메고 종로로 나갔다. 그러나 이제는 건달 김현식이 아니라 가수 김현식으로서였다.
당시 종로에는 '벌판'이라는 뮤직다방이 있었다. 커피나 음료수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곳이었는데,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불렀고 또 가수지망생들을 위한 오디션이 수시로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오디션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첫번째 무대만큼 떨리는 것이 있을까. 사람들과 서로 마주 선다는 것, 나는 혼자이고, 그들이 여럿이라는 것, 더구나 그들은 나를 판단하기 위해 눈과 귀를 번뜩이고 있고, 나는 그들 앞에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외롭고 두려운 일이었다.
관객이래야 지배인과 종업원 몇명이었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끝 감각마저 무너져서 기타코드가 제대로 안잡힐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그래도 눈에 사람들이 구별되고 손끝의 감각이 살기까지 기다린 후 나는 천천히 기타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첫번째 노래는 호세 펠리치아노의 (Once There Was A Love)였다. 막상 노래를 시작하니까 노래 속에 빠져들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는 연이어 비틀스에서 CCR로 두곡을 더 불렀다.
그리곤 조용히 기타를 내려놓고 긴장감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제는 나를 지켜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할 차례가 된 것이다. 결정권자인 듯 싶은 지배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식, 기타는 형편없는데 노래는 제법인걸"
지배인의 이 한마디 말에 그날부터 나는 의 '가수'가 되었다. 가수래야 출연료도 없었고 세끼 밥사주고 가끔 저녁때 술사주고 지배인의 기분에 따라서 차비 몇푼씩을 받는게 고작이었지만 매일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무척 행복했다. 오전에 연습하고, 오후에 나가 노래 부르고, 밤에는 나와 비슷한 무명 통기타 가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다 알겠지만 70년대 후반은 통기타를 든 포크 가수들의 시대였다. 종로의 에서 명동의 로, 으로 나의 출연무대는 자꾸 넓어져 갔다. 그런 업소들을 들락거리다 보면 가끔 당시 나 등으로 최고의 스타였던 이장희 선배나 송창식선배를 만날 수 있었다. 어쩌다 그분들이 등이라도 한번 두드려 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어느날 이승희라는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잘은 몰랐지만 기타를 아주 잘친다는 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같이 듀엣을 하자고 제의했다. 같이 듀엣을 하면 노래를 잘 부르는 나의 장점과 기타를 잘치는 그의 장점을 서로 살릴 수 있다는 거였다.
우리는 그날부터 듀엣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듀엣이래야 특별한 이름도 없었고, 그냥 김현식과 이승희였다.
듀엣으로 몇개의 음악다방을 전전하고 있던 어느날, 이승희가 헐레벌떡 연습실로 뛰어들어왔다. 국제호텔 나이트클럽의 출연요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국제호텔 나이트클럽은 서울역 앞에 있었는데 송창식, 이장희 등이 출연하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나이트클럽이었다. 우리는 그 선배들의 무대 사이사이를 떼워나가는 들러리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드디어 무대다운 무대에 선다는 생각에 밤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도 계속 내 첫사랑의 여인은 나를 찾아왔었다. 그녀는 이미 연세대 철학과에 다니고 있던 어엿한 여대생이었다. 그녀는 노래를 끝내고 내려오는 내게 다가와서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라고 다그쳤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얘기를 듣기 싫어했고, 그녀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도망다니기도 했다. 이때 그녀와 나의 길이 다르다고도 생각했고 음악에 대한 나의 꿈이 대학은 안중에도 없게 했기 때문이다.
어느날부터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 그녀가 나타나지 않던 한동안은 그려려니 했는데, 계속 그녀가 안오자 이상하게도 허전해지더니, 그것은 곧 마음 한구석의 쓸쓸함으로 바뀌었다. 사랑을 잃어버린 아픔같은 것이 그런지도 모른다.
『 1집이 나오기까지 』
어느날 늦게까지 승희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나는 그녀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으로 기타를 잡고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노래가 이다.
하늘을 보면 떠오는 모습 떠나간 그대여 / 나혼자 두고 홀로 떠나간 당신의 모습이 / 구름을 타고 두둥실둥실 멀어져가네 /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당신의 모습을 / 이제는 정말 잊기로 했소
다 알겠지만 70년대 말의 젊은이들의 문화는 통기타와 생맥주문화였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장발이었다. 나 역시 마치 히피족과 같이 어깨까지 치렁치렁 머리를 늘이고 다해진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러다 경찰에 적발돼서 머리를 잘린 적도 있었다.
오랜동안 듀엣으로 같이 활동하던 승희와 헤어지게 되었다. 서로가 음악적으로 많이 성숙했다고 생각했고, 또 갈수록 두드러지는 서로가 개성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혼자 활동하던 내게 어느날 김동환이란 친구가 찾아왔다. 같이 진짜 음악을 해보자는 거였다. 그 친구의 태도가 워낙 진지해서 나는 그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같이 듀엣을 하기로 결정하고서 우리는 연습을 위해 인천앞 작약도로 떠났다. 배낭에 기본적인 생활도구들을 챙겨넣고 약간의 양식과, 또 우리의 연습장이자 숙소로 쓸 2인용 텐트까지 챙겼다. 그리곤 작약도의 한 바닷가에 텐트를 쳐놓고 맹연습에 들어갔다.
바닷물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모래사장, 밤늦게 램프의 불을 밝힌 텐트 속, 어디나 모두 우리의 24시간 연습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음악을 위해서 그토록 열정을 바쳤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음악만을 생각하며 지낸 한달여의 기간은 내 음악의 가장 큰 밑거름이 된 시간이었다. 한번은 저녁무렵 우리의 연습텐트 근처에서 고기를 잡던 뱃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매일 고된 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아거던 그들에게는 우리가 한적한 바닷가를 찾아 휴가를 즐기고 있는 부잣집아들들로 보였었나 보다.
그들은 바닷바람에 검게 그을린 얼굴과 울퉁불퉁 근육질의 체격으로 우리의 텐트 속에 들어왔다. 그리곤 다짜고짜 '당신들이 하는것이 꼴 사나우니 당장 여기를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만약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면 강제로라도 떠나게 하겠다는 기세였다. 동환이와 내가 아무리 설명했지만 그들의 기세는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우리가 비록 무명이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가수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우리가 연습해왔던 외국곡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좋아할 성싶은 뽕짝들도 그럴싸하게 기타반주로 불렀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험악했던 그들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져 노래가 끝날 때쯤에는 박수까지 치며 따라 부르고 있었다. 결국 그날 우리와 그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술추렴을 하며 같이 노래했고, 그 일로 오히려 그 사람들과는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뒤로 먹을 것과 일용품을 구해다주는 등 우리를 많은 면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게해서 한달여에 걸친 우리의 '지옥훈련'은 끝났다. 우리는 짐을 다시 꾸리고 서울로의 금의환향(?)을 위해 정든 우리의 연습장과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어찌어찌 생필품을 조달하느라 돈을 썼더니 주머니에 한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친했던 뱃사람들은 다 배를 타고 이미 떠났다. 어떻게 사정해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왔다. 그러나 서울까지 돌아갈 길이 막연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일단 걷기로 했다. 까마득한 염전들 사이를 걸어서 어느 읍내, 서울가는 시외버스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 간신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한여름의 땡볕 아래서 배낭을 메고 걷던 끝이 없을 것같던 염전이 눈에 선하다. 마치 그때 그 염전을 걷는 것이 훌륭한 가수가 되기위해 내가 당연히 감내하여할 고행인 것도 같았다.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이브와 쉘브르에 내가 노래를 불렀다. 동환이와의 호흡은 '지옥훈련'으로맞췄던 만큼 누구보다도 잘 맞았고, 우리의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져 갔다.
한번은 이장희 선배가 진행하던 이라는 당시 최고 인기의 라디오 프로에 게스트로 나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마 이장희 선배가 특별히 배려한 것 같았다.
우리는 제법 이장희 선배와 음악 얘기도 하고 우리의 노래들도 직접 물렀다. 나올때 우리는 출연료로 2천원을 받았다. 당시 2천원이면 친구 몇명이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놀 수 있을 만큼 적지않은 액수였다. 돈보다도 방송에서도 이제 대접받는 가수가 되었다는 생각에 우리는 뛸듯이 기뻤다.
그러던 중 나는 뜻하지 않은 일로 잠시 음악을 중단내야만 했다. 무대뒤에서 몇모금 빨아본 대마초 때문에 잠시지만 구속의 몸이 되었다.
법이 정한 형량을 채우느라 나는 그후 약 8개월동안 영아의 생활을 했다. 그때가 78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나는 군대소집영장을 받게 되었다. 어쨌든 죄를 지어 수감되어 있는 몸인데 영장을 받게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8개월 후 나는 범법자로서 군대 소집이 정지되고 출감후 경기도 미금 부근의 훈련소에서 6주간의 기본교육을 받게 되었다. 기억나는 것은 다들 나와 같은 결격사유가 있어서 같이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래서그런지 우리끼리는 끔찍하게도 서로를 아껴주었다.
아마 그때 나는 절도범, 병역기피자 등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알게된 것 같다. 그들에게는 훈훈한 정같은 것이 있었다. 사랑하던 애인이 변심한데서 폭력을 휘두르고 들어온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그때 그 사람도 가장 뼈아프게 사랑에 소외받은 소외계층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했다.
나는 6주간의 훈련을 받고 다시 사회에 복귀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적은 기간으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마쳤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 기간만큼 열심히 노래를 해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라는 뜻으로 알았다.
다시 통기타와 음악다방과 밤무대를 돌면서 노래부르는 생활이 시작됐다. 이때부터는 또 나만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밤을 꼬박 세우는 버릇이 생겼다. 후에 내가 속한 그룹의 이름이 되기도 한 노래 도 이때 만들어진 노래다.
내가 작곡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평소 나를 눈여겨보던 이장희 선배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가수로서 나의 첫번째 앨범을 낸다는 사실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앨범제작은 어떤 일보다도 내가 가수로서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며칠간의 고민 끝에 그 제안에 응했다.
그리곤 거의 매일밤을 만들어놓은 곡을 정리하고 다듬느라 지새웠다. 가수가 자신의 앨범을 만드는 것은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집을 만드는 것이나,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내놓는 것과 거의 똑같은 작업이다. 그만큼 조금이라도 좋은 작품을 내놓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해서 을 타이틀로 이 나오게 됐다. 그러나 이 앨범이 나오기까지는 녹음이 끝나고 2년이 더 지나 80년이 되었다. 음반사 측에서 대마초 직후의 내 이미지를 염려해서 발매 시간을 연기한 것이다.
아무튼 일단 을 녹음하고 나서 나는 서라벌의 식구가 됐다. 당시 서라벌에 소속돼 있던 가수들과 함께 군장병 위문공연도 가고 해변공연도 다니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