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 ·종교인 ·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휴전협정 제60항에 의거하여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대한민국과 유엔군측의 16개 참전국, 그리고 공산군측의 북한·중공 및 소련 등 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과 유엔군측 참전 16개국은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방안으로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 비례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고, 그 결과에 의하여 통일독립된 민주적 한국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주한 유엔군은 이러한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전을 지키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오로지 주한 유엔군의 철수를 강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위장평화통일 제안을 내놓고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함으로써 회담을 교착시켰으며, 회담은 같은 해 6월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휴전선으로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