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기드라마 속 3명의 여성 캐릭터가 현대 여성의 각기 다른 고민과 욕망을 자극하며 화제가 되고 있다. KBS 2TV ‘황진이’의 하지원과 MBC ‘여우야 뭐하니’의 고현정, ‘환상의 커플’의 한예슬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여성들의 고민을 공유하거나, 판타지를 대리 충족시켜주면서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일 또는 사랑’ 컨트라섹슈얼, 황진이
하지원이 타이틀롤을 맡은 ‘황진이’ 속의 조선 기생들은 남성들을 위한 ‘노리개’가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연마해 보다 나은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예술인이다. 이때 남성은 자신의 재능을 평가하는 ‘대중’ 혹은 ‘직장 상사’일 뿐이다. 그래서 ‘황진이’는 단순히 팜므파탈을 내세운 진한 멜로물이라기보다는 여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드라마다.
6부까지 방영된 현재 드라마 속 황진이는 여성성을 부정하고 있다. ‘계집 같은 소리를 내는’ 가야금보다는 ‘장부의 소리를 닮은’ 거문고를 좋아하며, 공손하게 차를 따르는 방법에는 심드렁하지만 춤 사위를 연습하기 위해서는 외줄타기도 마다치 않는 집념을 보여준다. “계집으로 태어난 것이 싫다”고 못박는 황진이의 모습은 사회적 성공을 위해 여성성을 버려야 하는 (혹은 버려야 한다고 강요받는) 현대 여성의 그것과도 맥이 닿아있다.
앞으로 황진이는 성공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숱한 역경과 위기를 맞을 전망이다. 황진이의 ‘독기’는 어렵게 마음을 연 은호도령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독기를 품고 재능을 펼쳐내지만 또 다른 사랑을 만나 혼란을 겪는다. 결국 사랑에 정착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싶다는 욕구를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 사회적 성공과 고소득을 추구하는 여성상인 컨트라섹슈얼이 대세로 자리잡고, 맞벌이 부부가 급증하고 있는 요즘의 여성들이 그냥 지나치기 힘든 캐릭터다.
●‘못된 여자’ 한국의 패리스 힐튼, 안나 조
‘환상의 커플’에는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센’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한예슬이 연기하는 안나 조는 부동산 재벌의 외동딸로 자라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안하무인 공주과. ‘쾌걸춘향’ ‘마이걸’ 등을 히트시켜온 홍정은·홍미란 작가가 “힘세고 강하고 똑부러지는 여주인공에게 꽂히는 취향”을 듬뿍 살린 캐릭터다.
안나 조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꼬라지 하고는∼’라며 저평가한다. ‘이불 푸석대지마’ ‘배고파, 자장면 사줘’ 등 주변 인물들에게 하는 말도 부탁이 아닌 요구와 명령이며 ‘나 버리지 마’하는 말 조차도 강경하게 내뱉는다.
극의 재미는 이런 여성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가난한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설정에 있다. 그러나 안나 조는 체념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온순해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돈과 명예는 잃었지만 ‘성깔’은 그대로이기 때문. 특히 기존 드라마의 청순가련형 캐릭터를 대표하는 오유경(박한별)의 ‘내숭’을 까발리며 맞붙는 장면 등에서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다.
안나 조는 (비록 지금은 가난한 집에서 고생하고 있지만) ‘전통적 여성성’ 대신 ‘부와 권력’을 지닌 현대 여성의 판타지 그 자체다. 미국의 재벌 상속가 패리스 힐튼을 흉보면서도 그 ‘당당한’ 생활에 눈을 뗄 수 없는 현대여성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돈이 있고, 그 돈을 유지할만한 능력이 있는데 착하고 순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비루한 현실’ 바로 내 모습, 고병희
그러나 사회적 성공이나 막대한 부를 쌓는 게 어디 쉽겠는가. ‘여우야 뭐하니’의 고병희(고현정)는 아직도 판타지를 꿈꾸지만 현실의 벽을 체감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을 재연하고 있다. 고병희에게는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일’도 없고, 상속을 통해서라도 미리 쌓아둔 ‘부’도 없다.
고병희는 성인잡지 ‘쎄씨봉’의 기자로 독자투고를 대신 쓰거나 성인용품 유통에도 힘쓰는 ‘멀티플레이어’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생업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기자는 20대를 별 생각 없이 보내버린 탓에 얻게 된 직함일 뿐이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성을 다루는 기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성에는 무지했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산부인과를 처음 찾아 ‘그걸 어떻게 해요’하며 부들부들 떨거나 남자친구의 집에 들어서면서 오만가지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무지에 통탄하며 술김에 저질러 버린 ‘첫날밤’ 현장에는 장미 꽃잎도 고급 와인도 없었다. 더구나 그 상대는 9살 연하의 친구 동생이다.
그래서 고병희는 소심하고 현실적이다. 일과 커리어는 진취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유지해야 하는 것이고, 가슴 설레는 남자도 좋지만 편안한 남자도 눈에 들어온다. 나이에 의한 변화는 감지되지만 여전히 “낮잠자고 일어났더니 서른 셋이 되어버린 스물 셋”의 모습이다. ‘현실에 맞춰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 여성에게 고병희는 나와 내 친구처럼 친숙한 존재다.
●여배우들, 드라마를 통해 다시 태어나다
이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여배우들도 스스로 많은 것을 얻고 있다. 하지원은 ‘황진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고통을 벗으로 삼고 당대를 살아갔던 조선 기생들에게서 요즘의 연예인들을 떠올렸다”면서 “감춰야 할 것도 많고 끝없이 자신을 계발해야 한다는 점에서 황진이와 내가 동질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원은 이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거문고, 가야금, 한국무용 등을 열심히 배우고 있으며 특히 춤추는 장면은 대역 없이 소화하겠다는 욕심으로 잠자는 시간을 거의 ‘살인적으로’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환상의 커플’의 한예슬은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이 역을 맡고 싶어 드라마 제작사를 삼고초려했다는 한예슬은 자장면 한그릇을 한입에 우겨넣는 것은 물론 물에 빠진 귀신 역할까지 소화하고 있다. 착한 인물을 선호했던 예전에는 대중의 호감을 얻기 힘들었을 이 역할이 요즘 온라인에서 유행어까지 탄생시키며 인기몰이 중이다.
고현정은 고병희를 통해 확실한 ‘쌩얼’ 공개에 나섰다. 드라마에서 그는 막 세수를 끝낸 맨 얼굴로 등장하는가 하면, 개그맨 이혁재와 야릇한 상상씬을 과감히 연기하는 등 ‘꾸며진 여배우’ 대신 ‘여자의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매니지먼트 관계자는 “요즘 여성 톱스타들이 드라마로 대거 컴백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면서 “아직도 영화 시나리오 속 여성 캐릭터는 개성이 없고, 정형적인 것이 사실이다. 드라마를 통해 여성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여성팬들을 확보하는 것이 인기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