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비통의 극단적인 우아함과 뛰어남은 루이비통을 이끌고 있는 원칙이다. 이것이 창조성과 고감각이 연출되는 빅 이벤트에 루이비통이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835년 루이비통은 걸어서 파리로 간다. 거기서 2년간 무역을 배웠고 1837년 파리로 돌아와서 여행가방 견습공이 되었다. 그로부터 150여년간 루이비통은 누구보다 편안하고 창조적인 가방을 만들어 왔다.
파리에서 뉴욕까지, 런던에서 베이징까지 ‘루이비통 클래식’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수집하고 싶어하는 가장 고급스럽고 신비스러운 차종이다. ‘우아한’ 자동차 경쟁은 전통과 기술, 권위와 혁신이 결합된 루이비통의 주요 이미지이다.
패션이든 자동차든 항해이든지, 루이비통은 주요 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창조성이다.
평평한 직육면체의 여행용 트렁크를 처음 개발하여 대단한 인기를 모으게 된 루이비통은 제품 하나하나마다의 장인정신으로 명성을 날리며,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유럽귀족사회 전체에 유명해졌고, 곧 세계 각지로부터 주문이 쇄도하게 되었다. 고가품, 전통적인 디자인의 중점을 둔 품위와 명품의 상징 루이비통은 1997년 마크 제이콥스가 합류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뉴욕 출신의 마크 제이콥스는 전통적인 루이비통을 젊고 신선하고 발랄한 브랜드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과거 고가품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 중후하고 고전적인 디자인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에서 벗어나 캐쥬얼 라인을 새롭게 선보이는 젊어진 루이비통의 변화에 세계는 이미 빠져 들고 있다.

"페라가모의 호기심"
구두 디자이너 살바토레 페라가모(1898~1960)는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 보니토에서 1898년에 태어났다. 보니토의 작은 구두점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13살의 나이로 여성전용 맞춤 구두점을 오픈했다.
1920년 미국 헐리우드로 건너가 본격적인 구두제작을 시작했다. 헐리우드에서 그는 영화제작에 필요한 신발과 헐리우드 명배우를 위한 우아한 스타일의 고급 구두를 디자인하였다.
헐리우드에서의 신발제작을 밑바탕으로 페라가모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회사를 설립하였고, 그로부터 30년간 프로렌스 살롱에서 구두를 만들었다.
당시 윈저공작부부와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페론, 여배우 비비안리, 오드리햅번, 그레타가르보, 소피아로렌 등이 페라가모 구두를 즐겨신었던 사람들이다.

뛰어난 디자인의 고급 구두를 만들기 위해 독창적인 디자인과 전 생산 과정 자체를 수작업화시키는 등 페라가모는 엄격한 품질 관리로 명성을 쌓아갔다. 그가 처음 시작했던 공장도 기계 사용없이 최고의 숙련공의 기술로 가동되었다. 현재는 1백 34가지 신발 제조 공정 중 중요한 몇몇 단계는 아직도 수작업을 고수하고 있다. 단 신발의 뒷마무리는 기계 바느질에 의존하는데 이는 손보다 기계 바느질이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전문 기술자와 기계를 적절히 활용한 생산 방식은페라가모의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1947년 갑피 부분을 투명한 나일론 실로 만든 the invisible shoe(보이지 않는 신발)를 만들어 구두 제작자로는 처음이자 이태리인으로서 처음으로 패션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니먼 마커스'상을 수상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디자인과 소재 등을 구두에 도입하는데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했던 페라가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구두를 만들 재료가 부족해지자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는 소재로 여겨지던 짚이나 코르크 등을 구두의 소재로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당시 "구두의 소재는 가죽"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구두에 패션 감각을 처음 도입했다. 페라가모는 "미를 추구하는데 끝이 없고, 디자인을 창조하는 데에는 극한점이 없으며 구두 제화공이 자신의 창작물을 사용하는 소재에도 제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여성들을 공주처럼, 우아한 왕비처럼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이라고 말했다.

단순하고 아름답다."
프라다의 역사는 마리오 프라다(Mario Prada)가 밀라노에 가죽제품 전문매장을 내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최고의 작품을 감상하고 구별해 낼 줄 아는 뛰어난 심미안과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여행을 통해 시야와 경험을 넓힌 마리오는 최고 품질의 가죽 전문 매장을 열겠다고 결심하고, 1913년 갤러리아 아케이드에 프라텔리 프라다 매장을 열었다.
이 매장이 바로 지금의 PRADA를 만들어낸 진원지이다. . '앞서가지만 너무 진보적이지 않은, 그리고 한 시즌만의 인기에 머물지 않은, 진정한 디자이너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그의 철학은 모든 제품에 반영되었고,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1978년 28세의 미우치아 프라다는 세련되면서도 심플한 프라다의 컨셉을 더욱 발전시켰다. 가방, 구두 등의 악세사리 제품이 주된 생산을 차치하던 프라다는 의류쪽으로까지 진출을 하게 된다.
1988년 처음 프레타포르테에 프라다만의 새롭고도 실용적인 의상을 선보이며 세계 패션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프라다의 의상은 실용적이고 편안하지만 세련되고 고급스러움이 내재되어 있는 옷이다. 다른 명품 브랜드처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평범함 속에 내재되어 있는 프라다만의 스타일이 있다.

평범한 여성이 소화할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의 옷을 만들어왔던 프라다는 좀더 젊고 발랄한 연령층을 타겟으로 한 미우미우 브랜드를 탄생시켰고, 브랜드 타겟을 남성 영역으로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기존의 프라다만의 감각을 최대한 부각시켜서 프라다워모와 프라다스포츠 라인까지 확대하여 전세계의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로서 굳건한 위치를 지켜나가고 있다.
"5명의 딸들이 만들어내는 럭셔리하고 모던한 명품의 대명사"
펜디(FENDI)의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무엇보다 주목될 만한 것은, 펜디(FENDI)는 가족이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명품 브랜드라는 것이다.
그 가족이라는 것이 페라가모 처럼 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들이 운영하는 방식이라기 보다는 다섯 명의 딸 파올라, 안나, 프랑카, 칼라와 알다가 힘을 모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더 눈에 띈다.
부모님들이 애써 이루어 놓은 업적을 지금의 펜디(FENDI)의 모습에 덧붙여 보다 고급스럽고 가치 있는 브랜드로 만든 것도 이들의 노력이 아닐까 싶다.
펜디(FENDI)의 역사를 논할 때는 대부분 1925년 이태리 로마에서 에도알도 펜디 (Edoardo fendi)와 아델르 펜디(Adele Fendi)가 ‘펜디(FENDI)’라는 상호로 가죽, 모피가게를 개점한 것을 펜디(FENDI)의 시초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 보다 앞서 에도알도 펜디와 아델르 카사그랑데(결혼하기 전의 아델르 펜디의 이름)이 만나 결혼하기 전 1918년을 펜디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본다. 당시 아델르 카사그랑데(Adele casagrande)는 로마 중심가인 Via del Plebiscito에서 모피와 가죽을 파는 조그만 가게를 오픈했다. 이들이 결혼 한 후 펜디(FENDI)라는 이름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정식 개점한 것은 1925년 이지만, 진정한 펜디(FENDI)의 시작은 아델르가 가게를 오픈한 1918년으로 잡아야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명품이 그러하겠지만, 펜디(FENDI)의 제품 역시 완벽함과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 그리고 명품만이 지닐 수 있는 전통적인 디자인과 장인정신 등으로 이태리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시작하여 지금의 펜디(FENDI)가 가지고 있는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펜디(FENDI) 1호점인 Via del Plebiscito의 성공에 힘입어 1932년에는 Via Piave에 펜디(FENDI) 2호점을 오픈하게 된다. 펜디(FENDI)는 이후로 끊임없는 확장을 하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펜디(FENDI)가 본격적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Borgognona에 있는 영화관을 인수한 것이라고 한다. 파산해 가는 영화관을 개조하여 펜디(FENDI)의 매장으로 만든 것이 화제가 되었고 이는 곧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펜디(FENDI) 플래그 스토아를 가보고 싶다’라는 말을 끌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펜디(FENDI) 플래그 스토아는 가죽, 모피, 샌달, 지갑, 기성복을 함께 하는 매장이다.
가죽과 모피를 끊임없이 연구해 왔던 펜디(FENDI)는 모피소재를 개발하는 데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연구결과 펜디(FENDI)는 펜디즘 라인이라는 의류라인을 개발하게 된다. 이 역시 기존의 펜디(FENDI) 팬들에 의해 열광적인 사랑을 받게 된다.
1978년 펜디(FENDI)의 창시자인 아델르 펜디가 사망하자 그녀의 다섯명의 딸들이 본격적으로 펜디(FENDI)의 사업에 뛰어들어 이전보다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후 지금의 향수, 시계, 선글라스, 액세서리 등으로 펜디(FENDI)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현재도 펜디(FENDI)는 다섯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명품브랜드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가고 있다.
"여성만을 위한 아이템으로 패션계를 장악한 셀린느"
셀린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라는 질문을 들으면 나는 김지호가 생각난다. 그녀만큼 브라운 관에서 셀린느의 옷이며 핸드백을 착용한 배우도 없을 뿐더러, 공개석상이나 여러 인터뷰에서 본인이 가장 아끼면서 애용하는 브랜드를 꼽으라면 항상 셀린느 라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마치 김지호가 셀린느의 홍보인사처럼 보여질 때도 있었으니…그럼 12월 11일 결혼한 김지호가 그토록 칭찬을 아끼지 않은 셀린느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어린이 구두에서 출발한 셀린느
이제는 핸드백이나 의상으로 보다 유명한 셀린느. 하지만 셀린느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시작은 바로 어린이용 구두에서 시작한다. 1946년 파리의 말트가 부근에 생긴 셀린느 아동구두 부띠끄가 바로 그것이다.
마담 세린느 비피아나가 아동용 구두를 보다 편하면서 세련되게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파리에 오픈한 샵이 이제는 전세계의 패션계의 흐름을 잡는 명품브랜드가 되었으니 그 당시는 아무도 이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이 구두의 명성이 커지자 세린느는 1959년 본격적으로 여성용 구두를 디자인하기 시작한다.
전통 여성용 구두의 상징이 된 셀린느
전통 여성용 구두의 상징이 된 셀린느 셀린느가 여성용 구두디자인에 발을 들여놓자 과거의 어린이 구두에 대한 인식은 사라지고 이제는 여성의 미를 보다 돋보이게 하는 여성용 구두 명품브랜드의 이미지로 굳혀가기 시작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린느는 ‘여성’의 이미지가 다른 브랜드 보다 강하다. 특히 초반 세린느의 디자인이 말 재갈 장식인 것으로 볼 때, 남성적인 이미지를 여성화 시킬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셀린느의 독특한 디자인 감각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지 않았을까?
액세서리에도 셀린느의 명성은 계속된다.
어린이 구두에서 여성용 구두로 이미지를 전환한 셀린느는 보다 여성적인 이미지를 위해 액세사리 디자인으로 사업을 확장시킨다. 1963년이 그 시점인데, 액세서리의 초기 디자인 역시 말 재갈 모양의 팔찌를 제작하여 기존의 여성용 구두와 쌍을 이루어 가듯 통일된 느낌을 주게 된다. 결국 셀린느는 말재갈의 모양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많은 디자인으로 독특한 셀린느 만의 브랜드인지를 확고하게 굳혀나갔으며 이들이 기반이 되어 1966년 셀린느 가죽 컬렉션을 생산하게 된다. 이때 새로 등장한 것이 셀린느 백인데, 당시 백이름 역시 조롱말인 ‘포에니 백’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시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성만을 위한 아이템으로 패션계를 장악한 셀린느
구두에서 핸드백 및 액세사리에 이미 확고한 브랜드의 기반을 다진 셀린느는 1969년 역사적으로 큰 전환의 시기를 맞이한다. 바로 의류업계로의 진출이다. 이미 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의류산업에 진출하였고, 또 진출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사실 루이비통이나 크리스찬디올, 이태리의 에르메스와 프라다등이 그들이 가진 기존의 이미지를 크게 바꾸지는 못한 경우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셀린느 만큼은 오히려 초기 셀린느의 시작이었던 구두시장보다는 최근들어는 오히려 의류부분이 보다 활발하게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보다 주목할 만한 부분이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셀린느의 의류라인을 사랑하는 애호가의 입장에서 이를 평가를 해 본다면, 셀린느의 의류라인은 무엇보다 편리하고 활동적이며 멋을 위해 불편함을 참기 보다는 편안함을 위해 과감함을 보인다는 쪽이 보다 정확한 듯 하다. 목 부분의 결점을 가리기 위해 컬러 부분들 과장하여 부각시킨 것이 큰 화제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고, 특히 니트부분의 디자인이 많은 주목을 끌었던 것 같다. 특히 소재의 고급화는 셀린느가 초기 의류라인 진출 시 가졌던 철학으로 지금까지 그 철학이 지켜지고 있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셀린느. 새로운 디자인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002년도에도 보다 여성을 위해 노력하는 셀린느 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