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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와 , 나와 , 내 어머니의 인생에 관하여

이소영 |2006.11.17 03:43
조회 45 |추천 0


 가까운 사람일수록 깊은 대화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늘 똑같은 인사를 주고받고, 평소와 다름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우리는 매일같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표정이 달라지면, 목이 메여온다. 갈증이 인다. 심하게는, 그 상황을 피하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사실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고 거북할 만큼의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지나고 나면, 아, 별 것 아니었네. 하고 느끼게 될 텐데 말이다.

 여성학의 과제를 하기 위해 내 어머니를 인터뷰 하는 상황이 꼭 그러했다. 나는, 평소에는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고, 어머니의 질문에 무미건조한 대답을 하고, 귀찮아 최소한의 행동만 해 왔던 딸이었다. 그런 딸이 되어 놔서인지,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통보를 한 상태에서, 여간 어색스러운 게 아니었다. 목이 메여왔다. 갈증이 일었다. 하는 수 없이 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인터뷰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라? 이상하다. 나와, 내 어머니와의 관계가 이러한 것 이었던가?’

 어색하고 여간 불편한 감이 들어서, 처음엔 딱딱하고 형식적으로 시작하려 했던 인터뷰를, 그냥 가볍고 옛날이야기를 하듯 진행하기로 결심하고는, 정말로 옛날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른바 모녀간의 수다와 뒷담화가 시작 된 것이다.


 우선, 어머니의 어린 시절부터 알아야 했다. 내가 자라오면서 가끔씩만 우연히 들을 수 있었던 내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번에는 조금 더.

 내 어머니는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와 네 살의 터울 위로 언니가 한 분, 열 살 터울로 오빠가 한 분, 열다섯 살 터울로 오빠가 한 분 더. 아참, 그리고 어머니가 여섯 살 이었을 때 어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새 어머니로 인해 생긴 여동생도 한 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여동생이 자신과 몇 살 차이가 나는지 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마치 먼 친척을 이야기 하듯, 그렇게 씁쓸히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 어머니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그 충격을 감지하기도 벅찰 나이에 새 어머니를 들여야 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와 새 외할머니는 본가에 소홀하셨고, 늘 어린 어머니를 돌보았던 것은 큰외삼촌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네 외할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바깥바람 좋아하셔서, 여자고 놀음이고 아주 알아주셨지.    그나마 네 큰외삼촌이 우릴 엄격하게 대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음 엄마도 삐뚫어     졌을지 몰라.” 

 -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 돌아가시자마자 재혼하신거야?

 “그랬지. 우리야, 어려서 잘 몰랐지만 벌써 내 밑으로 동생까지 하나 있었으니까.”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 어머니의 표정은, 비록 입 밖으로 ‘원망’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으셨을 뿐, 그것으로 가득 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나도 스물한 살이 될 때 까지 외할아버지를 뵌 적이 열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니, 그 원망이 자손을 잇기까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운동을 하셨다는 큰외삼촌께서는 어머니가 중학교에 입학 할 무렵 체육선생님이 되셨고,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큰외삼촌의 명성은 경북 상주의 인근 고등학교에서는 알아줄 만큼 무섭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런 큰외삼촌의 특기를 이어받아서인지, 어머니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허들과 사이클 선수로 활동했다고.

 “네가 큰외삼촌이랑 이 엄마 피를 이어받아서 달리기를 그렇게 잘했던 거야. 아마 네 나이    였을 때 너랑 엄마랑 달리기 시합하면 엄마가 이겼을 걸?”

 늘 느끼는 것 이지만, 청소년기 때의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활기를 띄고 있어, 그 시기의 어린 내 어머니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촌스런 단발머리를 하고 늘 체육복을 입었을 것만 같은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말이다.

 “중학교 때는 잠깐 써클 활동으로 육상부 하면서 허들을 했던 거고, 이 엄마가 또 워낙에    운동신경이 뛰어나다 보니까 말이지. 그리고 고등학교 가서는 사이클 선수로 뛰었는데,     전국 대회도 나가고 그랬었지. 그 때, 시합에 나갔는데 저 멀리 박정희 대통령 보겠다고    보면서 걸어가다가 기둥에 머리를 박았다는 거 아니야.” 

 - 그래서, 1등은 했어?

 “1등 했으면 엄마가 운동을 왜 그만 뒀겠어?”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 하신다.

 - 그럼, 남자는? 남자친구는 없었어?

 “친구야 많았지. 그리고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들도 얼마나 많았다고.”

 라며 자랑이 시작되었다. 자랑인즉, 당시 큰외삼촌의 자녀인 어린 조카들을 돌보느라 사이클 연습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전거 뒷좌석에 발발이 조카들을 태우고 다니면,  그 모습에도 반하여 휘파람을 부는 젊은 경찰들이 많았다고 뿌듯해 하신다. 그 뿐이랴. 함께 운동을 했던 가장 친구가 짝사랑했던 (당시의)남학생은, 불행이도 내 어머니에게 고백을 했다. 정말이지, 표정이 너무나도 ‘자랑’같아서 딸인 내가 보기에도 얄미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 엄마는 네 큰외삼촌이 무서워서 놀러도 안다녔어. 학교 끝나면 놀 겨를이 어디    있어, 조카들 돌봐야지. 엄마는 학교 다닐 때도 내 빨래며 설거지 다 하고 그랬는데, 넌     너무 편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 안하니?”

 이로써 화살이 내게로 날아온 탓에,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 그럼 아빠랑은 언제 만났는데? 아빠도 비슷한 동네에 살았던 거 아냐?

 그렇다. 나는 외가도 경북 상주요, 친가도 경북 상주이다.

 “네 아빠야, 엄마가 은행에서 일할 때 좋다고 쫓아다녔지.”

 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과거로 돌아가 보지 못하는 이상, 내 어머니는 그야말로 인기인일 수밖에. 당시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은행으로 취업을 했던 어머니를 우연히 알게 된 아버지는, 알고 보니 어머니가 자신의 고등학교 체육선생님의 여동생임을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어머니를 쫓아다녔다고 (어머니 말로는)한다.

 2년간 연애를 하면서 결혼을 부추긴 사람은 아버지도 아니고,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고 한다. 설득의 달인이셨던 할머니께서는, 너무 이른 혼담에 당황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도 막무가내셨다고 한다.

 “네 할머니는, 뭐 잘난 게 있다고 네 아빠 자랑을 그렇게 하는지. 3수해서 알아주지도 않    는 대학 다니는 아들,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어릴 때 상장 많이 받아온 건 입이 닳도록    자랑을 했어, 아주.”

 - 그래도 결혼한 거 보니까, 엄마도 아빠 싫진 않았나보네.

 “결혼하기 전이랑 후랑 같은 줄 아니? 결혼하기 전에, 그렇게 무책임하고 무능한 줄 알았    으면, 내가 미쳤다고 결혼을 해? 이 고생을 하고 사는데.”

 이거야 원, 늘 듣고 사는 푸념이라 이제는 익숙할 따름이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결혼식 날에도 어디서 술을 마시고 와서 술 냄새를 풍기며 식에 임했다고 하신다. 어쩐지 이제부터 일어나게 될 이야기를 예고하기라도 하듯,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어, 엄마도 참 딱하게 됐다며 농담 삼아 위로를 했다.

 결혼 후, 아버지가 제일제당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오빠를 가졌을 때는 서울로 상경을 해, 비록 단칸방의 월세를 살았더라도 안정적인 생활을 했었더라고 말씀하셨다. 맞벌이를 하며 처음엔 잠실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직장으로 인해 여러 번 이사를 했었다고. 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제일제당이라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계신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구조조정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고, 택시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보험회사에서 적성에 맞지도 않는 보험설계사 일을 몇 년간이나 계속 해 오셨다. 하지만 돈을 모으기는커녕,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으로 생활비며 오빠와 나의 학비를 대기 바빴다고. 택시 운전은, 그 때나 지금이나 힘든 직업이었던 것이고, 가정을 꾸려 나가기엔 버거운 직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의 술은, 우리 가정을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들고 말았다. 택시 운전을 하시면서도 매일같이 술을 드셨던 아버지는, 어느 날 친구 분들과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단속에 걸려 면허 취소가 되어 버렸다. 내 기억으로는, 이전에도 술로 인한 얕은 부부싸움이 잦았었는데, 그 이후로 크고 작은 부부싸움이 계속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손을 놓고 술에 찌들어 사는 동안, 어머니는 매일같이 바쁘게 일을 하러 다니셨다. 빠듯한 생활이 힘들고, 아무래도 보험 설계사는 당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여겨 다니던 보험회사를 그만 두신 어머니는, 그 이후로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하셨고, 그만큼 많은 고생을 하셨다. 피부 관리사, 식당의 주방 일, 지인의 호프집에서 일을 돕기도 했으며, 고급 호텔의 청소부, 급기야는 불법 다단계까지……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안 해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자리만 있다면 뭐든 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클 수밖에.

 “내가 정말, 네 아빠 잘난 거 하나 없으면서 기고만장한건 두고 볼 수가 없었지. 나 같으    면 자식들 볼 낯이 없어서라도, 하다못해 막노동이라도 했을 텐데, 정신도 못 차리고 만    날 술만 마시니, 그만 오만 정이 다 떨어지지 안 떨어져? 네 아빠 그렇게 흥청망청 술 마    시고 정신 못 차릴 때 나는 잡일 다 해 가면서 아득바득 뛰어다녔지. 너희들이야, 뭘 알    겠느냐 마는.” 

 - 모르긴 왜 몰라. 엄마가 호텔에서 청소할 때, 뷔페에서 남은 떡 같은 거 가져오고 그러    면, 그것도 좋다고 맛있게 먹고 그랬잖아.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외식도 많    이 했던 것 같은데, 아빠 그렇게 됐을 때부터는 외식이란 거 해본 기억이 별로 없네.


 이내 대화는 정지. 조용한 상황에서, 아마도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바로,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고 매일같이 고생을 하던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갔던 시기를, 나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좋지 않은 습관처럼 그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엄습 해 올 때가 있다. 늘 검소하게 생활 해 왔던 어머니가, 가끔씩 새 옷이나 새 신발을 사 주실 때. 나는 순간 어린아이의 기억이 떠올라 움찔하게 된다.

 때는, 내 오빠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이었다. 오빠는 친구들과 함께 졸업을 아쉬워하며 시간을 보냈고, 어머니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짐을 싸기 시작하셨다. 마치, 단 둘이 오붓하게 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어머니의 짐과 함께 내 짐까지 싸 주셨다. 그리고는, 정말로 고속버스 터미널로 간 것이다.

 어린 나는 어쩐지 설레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여 버스 안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을 잤다. 도착한 곳은 바로, 시골인 경북 상주였다. 상주의 버스 터미널에서 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긴 어머니는, 나에게 갖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검소함이 몸에 밴 나는 늘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는 아이였다. 시장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절대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그 때에도 당연히, 갖고 싶은 것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웬일인지 나를 신발가게로 데려가더니,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검정색 찍찍이 신발을 사서 신겨주셨다. 낯선 경험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서인지,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신발을 사 주신 어머니는, 좀처럼 타지 않는 택시를 잡으셨고, 함께 택시에 올라타게 되었다. 어머니가 먼저 들어가고, 내가 들어갔다. 목적지는 할아버지 댁이었다.

 할아버지가 댁 아파트단지 앞에서 택시가 섰고, 당연히 나는 먼저 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택시 문은 닫히고 어머니의 창백해 진 얼굴과 함께 붉어진 눈시울을 볼 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엄마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가버렸다고 전하라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믿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숨을 불규칙적으로 헐떡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만 남겨진 것이었다. 장난처럼, 다시 택시가 돌아올 줄 알고 한참을 기다려 보았지만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파트로 올라가 현관 앞 난간에서 도로를 내다보며, 한동안 멈추지 않는 숨과 눈물을 애처롭게 떠나보냈다. 엄마는, 정말로 가버렸다.

 예고도 없이, 그것도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나타난 나를 보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몹시 놀라셨다. 어찌된 일인지 묻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뒤죽박죽 그 날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이야기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정말로 가버렸다고. 이게 다 아빠 때문이라고.

 어머니는 그로부터 한 달 가량이 지난 후에야, 삼촌들의 수소문과 설득으로 인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한 달 가량을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며 보낸 것을 생각하면, 다시금 그 순간을 떠올리는 그 시간이 너무 가슴 아팠고, 한편으로는 지금 내 눈앞에 어머니가 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

 - 엄마, 그 때는 어디에 갔던 거야? 나 할아버지 댁에 보내고 간 날 있잖아.

 “그때야 뭐, 구미에 있는 친구한테도 갔다가. 대구에 있는 친구한테 있을 때 네 삼촌한테    하도 연락이 와서.”    

 - 기분이 어땠는지 물어봐도 돼? 치, 나 안 보고 싶었어?

 애써 물어보는데, 그만 눈물이 터져 나올 뻔 했다. 어머니 또한 내게 미안하셨는지 점점 목소리에 활력을 잃으시고 말았다.

 “왜 아니겠어. 그래도 그 때는 네 아빠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너희들 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었지.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마 너넨 모를 거다.”

 생각 해 보면, 당시의 내 심정은 어머니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행복해 보이지도 않으셨고 고생만 하셨던 기억이 떠올라 차라리 돌아오지 않으셨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나라도, 내 아버지처럼 무능하고 늘 술에 취해 있는 사람과 살면서 평생 고생을 하느니 어디라도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딸인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가 이해 해 줄 수 있을까 싶었다.

 집을 떠나 살았던 한 달 동안 지친 마음을 덜어내느라 한동안은 깊은 잠에 취해 있으셨다고 한다. 물론 오빠와 나를 떠올리면 쉽사리 잠이 오질 않으셨지만, 함께 지내던 친구 분께서 최대한 어머니를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고 한다. 친구 분 또한 이혼을 하시고 홀로 살고 있으셨던 터라,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상황을 잘 알고 마음을 헤아려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를 더욱 홀가분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고, 결혼생활 이후 처음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셨다.

 늘 조금은 보수적이셨던 어머니의 성격만 보아 오다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당시의 상황이 어머니를 얼마나 괴롭게 몰아갔던 것인지 예상할 수 있어 가슴이 아팠다. 집을 나갔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시간만큼은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닌 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노력이 아닌, 삼촌들의 노력으로 어머니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고 난 후, 오빠와 나는 싸늘해진 집안 분위기를 애써 모른 체 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우리는 늘 그런 식이었다. 무언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쉽사리 그 일에 관하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어릴 적엔 오빠나 나나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탓이 컸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야 말로 무뚝뚝하고 단절된 분위기의 가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상처가 더 곪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늘 내게, 아양도 좀 떨고 애교도 부릴 줄 아는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면허가 취소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면허를 따시고 운전을 하셨던 아버지는 한동안 술을 자제하시는 가 싶더니 또다시 술을 많이 드시기 시작했다. 물론 취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셨던 것은 아니었지만, 술을 가장 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매일같이 술을 드셨다. 술에 취하면 낮이건 새벽이건 가리지 않고 집안에서 큰소리를 치시는 아버지 덕에 어머니가 받으셨던 스트레스는 끊이지 않으셨다고 한다. 동네 창피하다는 이야기는 그 때 나오기 시작하여, 정말이지 말씀하시는 내내 나까지 얼굴이 붉어질 정도가 되었다. 그 모습을, 자식인 나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맞장구를 치며 그나마 실소를 터뜨릴 수 있는 이유는, 이제는 너무나도 오래된 관습과도 같이 집안의 풍경이 늘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기에 서로가 면역이 된 탓이리라. 어머니는, 이제 너무 지긋지긋해서 화를 낼 기운조차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 그리고, 또 있었잖아. 나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는, 그 후 3년가량이 지나고 또다시 집을 나가셨다. 당시 집안의 상황은 최악의 상태였다. 아버지의 수입이 편편찮았고, 어머니는 마땅한 직장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뭐든 되는 대로 일을 하고 계시는 상황이었다. 생활이 그렇게 힘든데도 매일 일을 마치면 술에 잔뜩 취해 늦게 귀가하시는 아버지로 인해 부부싸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었다. 결국 어느 새벽, 부부싸움이 극에 달해 온 집안에 술병이 깨지고 찬장이 깨지는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날이 밝고, 내가 학교에 다녀온 후 어머니는 짐을 싸들고 눈물을 흘리며 집을 나가셨다.

 그 때는 먼 지방으로 떠나시지 않으시고, 집 근처에서 머무셨는지 어느 날인가는 등교하는 나를 멀리서 지켜보시다 나와 눈이 마주쳐, 등굣길 내내 나를 울게 만드시기도 하셨다. 친구들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안겨 울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기간 또한 몇 주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두 번째 가출에 뭔가 느끼는 것이 있으셨는지 한동안 술도 마시지 않으셨고, 택시 일과 함께 호떡의 재료를 대 주는 일까지 병행하시는 열의를 보이셨다. 겨울동안 잠깐의 일이였지만, 그로 인해서인지 어머니는 금방 집으로 돌아오셨다. 

 하지만 그 후로도 어머니는 늘 술 취한 모습의 아버지를 탓하셨고, 무능한 아버지를 탓하셨다. 내가 봐 왔던 어머니는 지금껏 단 한번도 아버지를 떠받들어 주신 적이 없었다. 물론, 아버지가 그만큼 무능하고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 왔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그러한 어머니의 성격으로 인해 아버지는 더욱 더 큰소리를 치시고 술기운을 빌어 가장된 도리를 보장받길 원하셨던 것 같다.

 - 솔직히 내가 보기엔, 엄마가 항상 아빠 기를 죽이는 것도 없잖아 있는 것 같아. 엄마는    명절 때도 친척들 오시면 아빠 이야길 하잖아. 난, 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렇게까지는    아빠 기 안 죽일 것 같아.

 “내가 네 아빠 기를 죽인다고? 네 아빠가 어디 그런 걸로 기가 죽디? 더 큰소리나 치지,     잘난 것도 없으면서.”

 - 이것 봐. 이런 것도 난 문제라고 봐. 엄마가 조금만 겉으로 표현을 안했더라면 아마 부    부싸움이 그 정도로 커지진 않았을 거야. 엄마도 알잖아, 아빠 자존심 센 거. 그런데 항상    보면 엄만 너무 아빠 기를 죽이는 것 같아.

 이 기회를 빌어 그동안 내가 느껴왔던 점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허심탄회하게 말을 꺼내보았다. 어머니의 표정은, 미묘하긴 했지만 딸에게 받은 충고에 대한 충격과 함께 어느 정도의 이해가 적절히 섞여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내가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뭐, 요즘은 우리도 다 커서 그런지 큰 싸움이 없으니까 다행이지. 솔직히 말해서, 어렸을    때는 너무 충격이 컸다고. 가정환경이 사춘기 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데. 그래도 오    빠랑 내가 말썽 안 피우고 잘 자랐으니까, 엄마는 고마워해야 돼. 

 “너희들 착하게 잘 큰 건 엄마도 잘 알지. 엄만 요즘도 친구들 만나면 너희 자랑밖에 안하    는걸. 그래도 너희들이 있으니까 엄마가 살았지, 너네 아니었으면 엄만 진짜 못살았어. 아    니, 안 살았지.”

 어머니는, 젊은 시절 친구들을 자주 만나고, 지금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시내에 다니시길 좋아하셔서 별명이 ‘김지리’ (지리를 잘 꿰뚫고 있다 하여)이시다. 그런데 요즘엔 좀처럼 일을 하시느라 여가생활을 하지 못하신다. 그렇지만 가끔씩 친구 분들을 만나고 오실 때면 늘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들 자랑을 하고 왔노라고.

 - 그럼, 우리 때문에 힘들었을 때는 없었어?

 “너네가 오죽 말을 안 들어야지. 빨래를 하기를 하니, 설거지를 하기를 하니?”

 - 그런 거 말고. 힘들었을 때 없었어?

 “힘든 거야 없었는데, 네 오빠 군대갈 때는 많이 슬펐지.”

 오빠가 군대를 갔을 때, 가족 모두가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도, 나도, 아버지도. 하지만 이제 곧 제대를 하는 오빠에 대한 그리움은, 이제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 엄마 얘기 들어보니까, 정말 별의 별 일도 다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앞으로는 이 집안    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 엄마 이야길 좀 해봐. 엄마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나야, 이제 진짜로 너희들만 보고 살아야지. 이만큼 키워 놨으면, 너네도 보답을 해야 할    것 아냐. 너희들 자리 잡고 결혼할 때 까지만 도와주고, 그 때부터는 너희가 엄마 먹여     살려야 돼. 알겠어?”

 다른 어머니들 보다 외모가 젊으셔서, 우리 어머니는 왠지 모르게 늦게 늙어 가실 거라 생각해 왔는데,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과 지금의 어머니 모습이 겹쳐져, 아, 정말 많이도 늙어버렸구나. 하고 생각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임에도, 가슴이 먹먹해 진다. 지금의 꽃다운 나이의 내가 될 때 까지, 어머니는 많이도 고생하시어 순식간에 늙어버리고 말았다. 늘 농담처럼, 시집가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며 이야기 했던 것이, 어느새 정말로 농담이 될 것인가, 진심이 될 것인가를 가눠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또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꼭, 부잣집 아들을 만나 결혼하라고. 나는 호강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힘을 주어 당부하신다. 그 말씀이 너무나도 진심으로 느껴져, 다시 한번 어머니의 고달픈 인생이 한꺼번에 느껴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인생은 반이 지나고 말았는데, 그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에는 신기하고 즐겁기만 하다가, 어느새 가슴이 아파오고, 왠지 모를 사명감마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살아온 반생은 결혼 이후, 어머니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로 인한 것이었으며, 자식들로 인한 것이었다. 왜 그토록 울고 참아야 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어머니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에 업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냉정히 판단해 본다.

 하지만, 그 운명에 끼어든 자식 된 도리로서, 앞으로는 조금 덜 힘들게 사실 수 있도록 내가 도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내 어머니가 어려서 당신의 어머니에게 해드릴 수 없었기에, 더욱 받아 마땅한 자식의 사랑을 느끼실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싶다. 어머니께서, 내 자식은 바르게 자라왔다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만큼 그 이상의 보답으로 남은 인생을 살게 해 드리고 싶다.


 이 이야기는 무려 일주일 간, 새벽이 되어서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어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누워 여러 차례 대화를 이어가며 인터뷰 한 내용이다. 고단한 몸으로 인터뷰 아닌 인터뷰에 임하며, 일주일 간은 정말로 어머니와 내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언젠가 내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 글을 다시 읽게 된다면. 혹은 그 새벽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면. 부디, 그 값진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그 값진 시간으로 인해 내 어머니를 더욱 이해할 수 있었고, 어머니의 당부만큼 내가 더욱 소중한 한 여성으로, 한 인간으로 살 수 있었노라고, 미소 지으며 떠올릴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철저한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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