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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가 들려준 속삭임, "가을이 오고있어!"

홍관형 |2006.11.18 23:12
조회 22 |추천 0

... 00:30, 아득해지는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모두가 잠이 들어버린 깊은 시간에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에스라의 대문을 나섰다.

 

답답한 마음이 좀 누그러질 때까지, 뻥 뚫린 가슴이 좀 메워질 때까지 그냥 하염없이 걸어보리라 마음먹고는 슈퍼에 들러 음료수 한 병을 사들고는 길을 따라 그냥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낯선 동네, 낯선 시간, 그리고 낯선 사람 하나...

 

가로등이 만들어준 쓸쓸한 나의 그림자를 보고 잠시 주춤거렸지만,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러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가로등을 의지하고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나는 걸음을 멈추어버렸다. 

 

코스모스였다.

 

응? 이 여름에 코스모스라니...

 

지난밤에도 열대야현상 때문에 땀이 주르르 흘러내려서 밤을 설치지 않았던가! 오늘 아침에도 날이 너무 더워서 강의실을 대강당으로 옮겨서 강의를 듣지 않았던가!

 

더위의 기세가 아무리 한풀 꺾였다지만 여름은 '나, 아직 죽지 않았노라!'고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를 지치게 하는데, 가을의 꽃인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모습이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는지...

 

그런 코스모스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었다.

 

낯 동안에 뜨거운 태양빛에 시달려서인지 더러는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애써 피어있는 꽃잎들도 생기가 없어보였고, 실바람조차 이기지 못해 가녀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이 위태로와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코스모를 바라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라톤 평원을 가로질러 숨을 헐떡이며 조국 그리스 연합군이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하였노라고 승전보를 목 놓아 외치고 죽었다는 '필립(?)'이라는 이름의 그리스병사 생각이 났다.

 

가을의 꽃인 코스모스는 아무도 예상치 않은 이 여름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길가 한구석에 조용히 자기를 피워냈다.

 

그리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여 자기의 존재를 알리며, 실바람에 의지하여 가녀린 몸을 흔들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는 나의 귓가에 소곤소곤,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다.

 

“관형아, 힘 내! 가을이 오고 있어.”

 

... 다시 에스라로 돌아왔다.

 

가로등과 달빛에 비친 에스라의 앞마당에는 지난 봄, 화려하게 피어나 에스라의 마당을 장식했던 -내가 벚꽃인줄로만 알았던- 앵두꽃도,

 

한 달이 지나 마당 한구석의 아름드리나무 전체를 새하얗게 물들이며 내가 바로 벚꽃이라고 자기의 존재를 알렸던 벚꽃도,

 

다시 한 달여 시간이 지나 에스라의 정원과 뒷산을 울긋불긋, 알록달록 빠알갛게 물들였던 철죽이며, 진달래도...

 

그 어떤 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짙푸른 녹색 향기만이 나에게 전해질 뿐이었다. ...

 

아직 여름이 한창이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피어났다. ...

 

가을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아는가?

 

모두가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그 때에, 열대야현상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그 때에,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을 온몸으로 견디어내며 자기를 피워낸 코스모스가 가을을 기다리는 이들을 향해 '나 여기 있노라'며 손짓을 시작할 때에,

 

그 때에 비로소 가을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높고 맑은 하늘과 함께...

 

한여름의 습하고 뜨거운 공기는 우리를 몹시 힘들게 한다.

 

... 나도 사막을 지나고 있다.

 

내가 넘어서야 할 공부, 내가 감당해내야 할 사역, 그리고 내가 만나야 할 한 사람...

 

물도 마시고 싶고, 그늘에서 곤한 몸도 누이고 싶지만, 아직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침반 하나 의지하고 지팡이를 짚으며 그저 앞으로 걸어가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다만, 사막이 있으면 오아시스도 있고, 사막이 끝나는 곳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여름이 있으면 시원한 소나기도 있고, 여름이 지나가면 반드시 가을이 올 것이며,

 

밤이 있으면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도 있고, 밤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이 올 것이기에...

 

내가 지나고 있는 이 터널도 분명 끝이 있을 것이요, 곧 밝은 빛이 비추게 되리라는 것 역시 당연하지 않겠는가? 

 

... 무더운 여름을 견디어내다가 홀연히 피어난 코스모스를 보고 위로받고 감격에 겨워하며 가을에 대한 소망을 되새기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이라는 짙은 안개투성이의 길을 걸으며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한걸음 한걸음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문득 내 곁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를 한 명 만나고 한없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마침내 선을 이루도록 만드시는 주님...

 

그 분이 나를 부르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아들이라 부르시며,

 

내 손을 잡고 가장 좋은 길로 이제까지 인도해주셨고, 아니 함께 걸어주셨고,

 

오늘도 나를 향해 '사랑한다'고 고백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꼬옥 기억하도록 하자.

 

0251... 밤은 더욱 깊어만 간다.

 

그러나 동시에 새벽은 가까워온다.

 

태양볕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피었다. ...

 

이 밤, 아니 이 새벽, 허무로 가득찬 내 가슴에 소망이라는 이름의 씨앗 하나를 심어둔다.

 

2006. 8. 24. 00:50-02:50, 깊은 단잠과 맞바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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