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참 어렸을 적, 영화에 열광하기 시작하고 웬만한 헐리우드 영화는 섭렵했다 자부하던 시절.. 저는 자연스럽게 유럽의 영화들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들중 정말 특이한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갑자기 화면을 보고 말을 하면서 내용을 설명해 준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심리상태나 다른 사람의 심리상태를 설명해 준다든지, 또는 영화를 몇 개의 장으로 나누어 각 장의 시작에 제목을 붙이기도 하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영화 기법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스웨덴의 거장 의 영화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은 이런 영화의 대표적인 예이며, 프랑스의 거장 의 영화들에서도 이런 기법들은 무수히 찾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특이한 기법들에 대해 알아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설명에는 어김없이 라는 이름이 있었고, '소외효과(疏外效果)' 또는 '거리두기 기법' 이라는 해설이 적혀 있었습니다.
의 이 이론은, 연극에서 관객이 무대의 사건에 감정이입이 된다면 현실에 대한 사실적 인식을 하지 못하고, 현실을 호도(糊塗) 하는 환상을 얻게 되어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연극을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무대 위의 일들이 현실이 아닌 재구성된 허구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상대방과 대사를 하던 배우가 갑자기 관객을 향해 말을 하거나 노래를 하는 등의 방식을 취한다든지, 서술자를 등장시켜 연극의 줄거리를 이야기 해 준다든지 하여 관객이 무대 위의 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영화들은 - 앞서 언급했던 [제7의 봉인]이나 의 영화들은 물론이고 - 어김없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현대의 공연예술이나 영화 전 장르에 걸쳐 의 기법이 조금이라도 들어가지 않은 작품을 만나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학로에서 흔히 보는 연극들과 조금이라도 실험성이 강한 영화들은 물론이고 - 최근에는 감독의 영화들에서 기법을 많이 볼수 있었습니다.. - 그냥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영화들에서도 간간히 의 영향력은 무수히 찾아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의 원작은 과연 어떤 느낌일지, 그의 기법이 짙은 작품들은 어김없이 재미없었는데, 그가 직접 만든 작품은 과연 얼마나 재미없고 무거울지... 너무나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지하게 재미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그의 작품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는 이런 제 예상을 완전하게 뒤집어엎어 버렸던 것입니다.
시종일관 등장하는 재기발랄한 대사와 코믹한 상황연출, 그리고 멋들어진 춤과 음악은 그의 이론인 '소외효과(疏外效果)'와 '거리두기 기법'이 무색할 정도로 저를 극에 몰입하게 만들었고, 시민(市民)이 강도(强盜)이며 강도가 시민인 사회...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늘 있어왔던 폭력과 권력의 유착관계...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며 살아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은 가볍고 경쾌한 대사와 노랫말 속에 잘 어우러져서 얼핏 가볍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실력 있는 배우들의 호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공연을 더욱 빛나게 해준 독일의 작곡가 의 음악이 - 이 작품은 '재즈의 수용' 으로도 유명한데, 당시에는 무척이나 신선했던 시도였으며 수많은 대중들을 열광 시켰다고 합니다... -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귀에 쏙쏙 감겨들어오는 친숙한 멜로디는 한번 듣고도 매력을 느낄 정도였으며, 연극 전문 배우들이 부르는 그다지 훌륭하지 못한 노래들은 - 오페라와 뮤지컬에 나오는 배우들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가창력이지만, 이 공연은 '노래' 보다는 '극' 중심의 작품이며 말 그대로 '서푼짜리' 오페라이기 때문에 노래 실력이 그리 훌륭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 - 오히려 신선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전통적인 오페라가 내용전개가 어떠하든 늘 '해피엔딩'으로 끝나듯, 이 공연도 느닷없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마지막의 노랫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 오 살았다. 오 살았다. 내사랑 매키가 살았다. 너무 행복해. 완벽한 해피엔딩 이로구나.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거야. 여왕의 사자가 착착 나타나준다면. 다같이 노래나 부르자구요. 저 가난하고 항상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방금 다들 보셨잖아요. 진짜 인생에선 말이죠... 국왕의 사자따윈 절대로 나타나는 법 없어....
당신도 누군갈 짓밟고 있어. 그러니 남들만 씹을 일도 아니지요. 남을 심판하지 말아요. 비정함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
역시 의 작품다운 결말부의 노랫말입니다...
어쨌든 예상 외로 재미있었던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 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