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여자들에게는 커다란 몸뚱이를 하고
아무때나 끈적이는 침을 질질 흘리며
사람의 육신을 노리는 괴물들이 출연하는 영화는,
그닥 흥미가 없는 장르다.
그러한 괴 생물체가 지나간 자리에는
목숨을 잃거나, 한쪽 사지가 날라가버린 사람들로 인해
비린내 진동하는 피가 흘러넘치고,
그들의 횡포를 제지하기 위한 막강 위력의 군부대가 진을 치되
정작 그 살인괴수는 어떤 한 사람,
영웅의 힘에 의해 무참히 무너지고 만다.
나 역시 그러했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우리나라 영화인 "괴물"이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할 무렵만 해도
참 희한하다..........
에일리언이나 고질라, 쥬라기공원등의 괴물들에 익숙한 그들이
어떻게 동방의 쬐꼬만 나라에서 만든 "괴물"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었을까.
의아할 뿐이었다.
1000만 관객의 대열에서 낙오될 수 없어서 보게 된 영화.
뚜껑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수 많은 스포일러성 기사들과,
그에 상응하는 수많은 영화감상문들을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만난 괴물은,
칸에서의 기립박수의 의미를 이해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made in USA 포름알데히드를 마시고 자라난
변종물고기인 이 괴물은
백주대낮에 한강시민공원에 드닷없이 나타나
일상의 평화를 깨트린다.
교각에 꼬리 휘감아 날아오르기의 명수인 이 괴물은
힘없고 어리버리한 강두네 가족의 일부분을 파먹어버린다.
힘없고 어리버리한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힘없고 어리버리한 박강두가
영웅으로 환생하는 영화인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는 계속해서
나의 평범한 상상력을 살짝 비켜나가기 시작한다.
박강두네 가족과 괴물녀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예측 밖에서 행동을 할 뿐이었다.
그 기괴한 몸짓으로 한강의 주인(host)이 되어버린 괴물은
틈틈이 길고 징그러운 혓바닥으로 현서를 핥으면서도
그 생물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가늠 못할 정도로
허술한 녀석이었고,
병원에 감금된 박강두는,
딸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지춤에 양손을 곱게 찔러 넣고 잠이 들 만큼
한심한 인간이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딸을 잡아간 괴물과 똑같이 생긴
골뱅이를 입속에 넣어버릴 만큼
단순한 인간이 되어주시는 거다.
4년의 대학생활을 나라의 민주화에 몸바친 백수 삼촌과,
굼뱅이처럼 시간끌다가 금메달 날려먹기의 일인자인
양궁신궁 고모와,
하루종일 세평짜리 매점에서 맥주와 오징어를 팔면서
아들이 뀌는 방구소리만 들어도
모자란 아들의 컨디션이 A인지 B인지 알수있는
혜안(?!)을 가진 할아버지.
이들이 펼치는 모험은,
영웅적이지도, 용감하지도, 또한 일사분란하지도 않다.
그 허술하고도 무모함으로
시종일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괴물"이라는 영화의 맛이었던 것 같다.
성장기에 유기농식단에 심취한 나머지 단백질 부족으로
살짝 모자라게 된 강두가 하는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음을 한탄할때,
미군들의 대화를 통해 "no virus"를 알아들었으면서도
무기력하게 머리에 뚜껑이 열려버릴때,
우리는
또다른 괴물을 만나게 된다.
현대사회를 단절의 늪으로 이끄는
"대화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
이 질퍽한 개인주의의 늪이
괴물이라는 기형생물체를 탄생하게 만든
원천수가 된 것은 아닐까.
괴물과 맞서 싸운 희봉할아버지의 죽음 대신
미국 하사관의 죽음이 뉴스화되고
바이러스가 없다는 내부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환란의 숙주(host)인 괴물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세균전에 쓰이는 화학물질을 방포하게 되는 현실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이 영화의 한줄평들 중에서
"처음으로 기록될 합법적인 반미영화"라는 평을 본 기억이 난다.
반미영화라.
이 영화평론가의 관점은,
시종일관 미군의 포르말린 살포와,
미군들의 세균전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반미영화라고 말하기엔 우리의 주인공들이 너무 무기력했고,
반미영화라 가둬버리기엔
우리의 주인공들이 너무 인간적이었다.
어설픈 관점으로 지켜본 이 영화는
정치적 색채를 지니지 않은 가족영화였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power(그것이 괴물이든 미국이든)에 대항해
생존권을 찾아가는 드라마틱한 영화라고 생각된다.
베니스며, 칸이며... 유수의 해외영화제에서 칭찬을 받은
우리나라 영화들을 보면,
씨받이나 서편제 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풍경과 감정을 표현한 작품들이었음을
이 영화를 본 다음에야 깨닳았다.
(올드보이가 살짝 다르긴 하지만... -.-;;)
영화 괴물이 그들에게 우호적일 수 있었던 것은
괴물이 가진 스케일도 아니고, 괴물을 표현한 CG의 힘도 아닌
딸을 찾기 위한 부성애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쉽사리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 가족애,
또한 어린 꼬마를 보호하기 위한
현서의 모성본능들이 아니었을까.
엄청난 거구에도 불구하고,
화염병의 불길정도에 이리저리 몸을 피하던,
휘발유를 마치 구원의 물줄기인양 벌컥벌컥 받아마시고
불화살에 눈찔려 장렬히(?) 산화한 괴물도
어쩌면..........
우리들의 부조리한 침묵과 단절이 만들어낸
이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극장문을 나섰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오늘 하루는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지,
오늘 하루는 내 속내를 남에게 내 보이지 말아야지,
오늘 하루도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야지
늘........ 결심하는 기이한 성격을 가진 나에게
대화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경고하던 영화였다.
상념 1.
"괴물"이 영화 초반에 한강변을 누비는 모양을
버스 창문을 통해 보여줄때......
나는 심형래를 떠올리게 되었다.
국내 최초로 괴수영화를 만든다며
잘나가던 개그맨업을 작파하고 용가리 제작에만 매달렸던
심형래.
그의 용가리는 철저하게 조악했다.
반면 "괴물"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의 절반이
괴물의 CG 비용으로 헐리우드 팀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고 한다.
한 사람이 평생을 바치며 피운 고집이
어떨때는 한낯 안쓰러움으로, 한낯 조잡함과 유치함으로
그렇게 비춰지는 모양새를 보니
마음이 그닥 좋지만은 않았다.
심형래 감독도 고집을 조금 접고 현실과 타협한다면
우리는 또다른 완성도를 가진
"괴수영화"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존심 말살되는 상상도 하게 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가지는 위력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상념 2.
"괴물"이 초스피드한 속도로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한국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기사와 더불어
배급사의 마케팅에 의한 당연한 결과였다는 기사도
막강한 속도로 올라오고 있다.
국내 극장의 50%를 장악하며
관객의 선택권을 박탈했다는 비난이
힘을 얻는 모양새를 보며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를 머리에 떠올렸다.
스크린 쿼터가 폐지되면
헐리우드의 자본의 논리에 굴복하여
잘 만든 우리 영화를 보게 될 수 없게 될 꺼라는
영화 관계자들의 말들이,
지금 괴물처럼 스크린을 독식을 한 다음에도
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스크린 쿼터가 유지된다면
대기업에 줄이 닿은 배급사들의 영향력에 굴복하여
소수 자본들이 만드는 저예산영화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저예산 영화의 매력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초대형 블록버스터에만 길들여지는 관객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영화에만 광분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될 것이 뻔한데.
분명 잘 만든 영화 "괴물"이
배급사의 과도한 마케팅 때문에
마음 놓고 샴페인을 딸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가지 바램이라면,
천만의 새로운 기록과, 초대박 흥행신기록의 흥분으로
질질질.... 석달열흘 스크린을 독식하지 말고
절정에 있을때
후발주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미덕을 보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