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뚜안느 드 쌩 떽쥐뻬리(Antione-Marie-Roger de Saint -Exupery)는 1900년 6월 29일 프랑스의 제3의 도시 리용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을 리용 근처에 있는 쌩 모리스 드 레망에서 보낸 다음, 1909년에는 빠리의 서쪽 2백km 되는 곳에 있는 르망으로 이사하여 그곳에 있는 쌩뜨 크르와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2년, 앙베리외 비행장에서 레르린 조종사가 조종하는 비 행기에 처음 타 봄으로써 후에 조종사가 될 소질을 보여 주 었다. 그러나 이런 모험적인 행동과 더불어 끼엘뵈프 교수 에게서 바이올린 개인교수를 받음으로써 장차 예술가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1914년 10월에는 빌프랑슈 쉬르 쏘온 시의 몽그레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석 달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 학교를 옮겨 스위스의 프리부르에 있는 마뢰아니스트 수도회에서 경영하는 중·고등학교에서1917년까지 공부를 계속했다. 이 학교의 선생들에 대하여 오랜 후에까지도 사모의 정을 간직하여 작품에까지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1917년 6월,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10월 파리로 건너가 1919년까지 보쉬에 고등학교와 쌩 루이 고등학교에서 해군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으나 구술 시험에서 실패하였으므로 미술학교 건축과에 들어가 15개월 동안 건축학을 공부했다. 그가《어린 왕자》에 직접 삽화를 그리게 된 것도 이때의 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1921년 4월 군에 입대하여 스트라스부르의 제2전투기연대에서 복무하였는데, 처음에는 수리 공장에 배속되었다가 그 후에 조종사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어려서부터 꿈꾸어 오던 비행사로서의 터전을 닦게 되었다. 얼마 후 사관생도로서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파견되어 1922년까지 머물렀고 군 복무 제2년은 부르제에 있는 제33 비행연대의 전투비행단에서 복무했다.
1923년 1월, 부르제에서 그의 생애 최초로 큰 비행기 사고를 당하여 두개골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그는 바레스 장군의 호의에 힘입어 직업 공군이 되려고 하였으나 약혼녀의 반대로 3월에 소위로 제대했다. 그러나 그의 앞길을 가로막던 그 약혼녀와는 결국 파혼하고 말았다.
제대 후 회사원이 되었으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행기 조종간을 잡았으며, 한 편 어릴 때의 꿈의 하나였던 글을 쓰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6년에《은선(銀船:Havire d'Arhent)》이라는 잡지에《비행사(L'Aviateur)》라는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에 라떼꼬에르 항공회사(에르 프랑스의 모체)에 입사하여《야간비행》의 주인공 리비에르로 알려진 디디에 도라를 알게 되고 1972년 봄에는 바세르· 메르모즈· 에스띠엔· 기요메· 레끄리맹등 그의 작품에 자주 나오는 동료들과 함께 뚤루즈와 카사블랑카· 그리고 디까르와 카사블랑카 사이의 우편비행을 하면서 틈틈이《남방 우편기》를 집필했다.
1928년, 쌩 떼쥐뻬리는 프랑스로 돌아왔다.《남방 우편기》를 탈고 하여 갈리마르 출판사에 선보인 후 계속 일곱 편의 소설을 쓰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곧 이어 브레스트에서 해군 항공술의 고급반 강의를 듣고 9윌에는 남아메리카의 근무처로 떠났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이전의 고락을 같이해 온 동료 메르모즈· 기요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1929년이며 그 해에 쌩 떽쥐뻬리는 아르헨티나 우편 항공회사 영업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즉 1930년 6월 13일에 동려 기요메가 22회째 안데스 산맥 횡단비행을 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실종되었다. 쌩 떽쥐뻬리와 델레가 5일간의 수색 활동을 벌였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기요메는 밤낮 없는 닷새 동안을 그 눈 속을 걸어 살아 돌아온 기적과 같은 사건이 생겼다. 이 이야기는《인간의 대지》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무렵《야간 비행》을 집필하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리비에르, 즉 디디에 도라였다. 1931년, 우편 항공회사의 복잡한 사내 사정으로 도라가 영업 부장의 자리를 그만두게 되자, 쌩 떽쥐뻬리와 몇몇 동료들이 그와 행동을 같이 하여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쌩 쥐뻬리는 파리로 돌아왔고 몇 주일 후에는 아게에서 고메즈 까리요라는 신문기자의 미망인 꼰수엘로 순신과 결혼하였다. 그 해 그의 제2작품《야간 비행》을 발표하여 12월에 페미나 문학상(Prix Femina)을 받게 됨으로써 이제 그는 작가로서 공인된 셈이었다.
1932년 2월, 금전 상의 궁핍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우편항공 회사에 다시 취직하여 프랑스-남아메리카 항공로 중에서 카사블랑카-뽀르에띠엔 구간을 담당하였다. 그 후에 라떼꼬에르 회사의 시험 비행사를 거쳐 1934년 에르 프랑스에 입사하여 선전부원으로 외국에 출장을 자주 다녔으며, 그 해 7월에는 사이공에까지 파견되었다.
1935년 5월에는 일간지《파리 쓰와르》의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다녀 왔고 에르 프랑스의 주최로 동료 두사람과 함께 애기《시문》을 몰고 지중해를 일주하여 강연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29일, 그는 정비사 프레보를 동반하고 애기인《시문》을 타고 부르제 공항으로 떠났다. 이 비행은 1936년 1월 1일까지 앙드레 쟈삐의 기록을 깨는 사람에게는 1만 5천 프랑의 보상금을 주겠다는 제의 때문에 시도된 비행이었다. 그는 파리와 사이공 간을 47시간 이내에 비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비행 4시간 15분 만에 쌩 떽쥐뻬리의 비행기는 리비아 사막에 추락했다. 정비사 프레보와 함께 닷새 동안을 걸으며 갈증으로 인해 죽음의 문전에 이르렀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베두인 대상에게 발견되어 구원되었다. 이 사건도《인간의 대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기요메의 안데스 산맥에서의 조난과 더불어 인간의 의지력이 얼마나 굳세며 그들의 책임감이 얼마나 투철한가를 보여 주었다.
쌩 떽쥐뻬리는 이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1937년에는 카사블랑카-돔뷰두 간을 연결시키는 항로를《시문》기를 타고 직접 개척하였다.
그해 4월에는《파리 스와르》지의 특파원으로 내란이 한창인 스페인의 까라바셀과 마드리드 전선에 가서 전투에 관한 기사를 써서 보냈다.
같은 해 9월에는《시문》기로 뉴욕-띠에라 델 푸에고(남아메리카 남단의 섬)간 장거리 비행에 대한 공군성의 허가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가 1938년 2월 15일에 출발하여 과테말라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이륙할 때에 속력이 떨어져 추락, 증상을 입었다. 3월 28일에 뉴욕으로 돌아가 정양을 한 뒤 프랑스로 귀국할 때, 그는 몇 년 동안 조종사로 일하며 틈틈이 써 놓은 원고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이 바로 의 대표작인《인간의 대지》이다.
《인간의 대지》는 1939년 2월에 출판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이 작품이《바람과 모래와 별들》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어《이달의 양서》로 선정되었고 프랑스에서는 4월에《인간의 대지》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받았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9월 4일, 예편되었던 쌩 떽쥐뻬리 대위는 다시 동원되어 공군 지도자 양성 책임을 맡았다. 그는 정보부에서 일해 달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11월 3일에 2-33정찰 비행단으로 전속되었다. 1940년 6월 17일, 프랑스의 단독 휴전 조인이 있자 2-33정찰비행단의 장교 전원이 알제리에 파견되었으며, 쌩 덱쥐뻬리는 이곳에서 제대를 기다렸다.
1940년 8월 5일, 제대를 하고 프랑스로 돌아와《성채》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에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 프랑스를 위한 미국의 원조를 호소하는 운동을 함과 동시에 작품 집필을 계속하였다.
다음해 2월, 뉴욕에서《전시 조종사》영문판인《아라스 지구 비행(Flight to Arass)》을 출판하였
고, 이 작품이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도 출판되었으나 1943년 독일 점령군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1943년 2월,《어느 불모에게 보내는 편지》가 출판되었으며 4월에는《어린 왕자》가 출판되었다.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쌩 떽쥐뻬리는 알제리에 있는 2-33 정찰 비행단에 재편입을 위한 교섭을 하여 미국인 지휘하에 있는 우즈다의 본대에 1943년 5월에 편입되었다. 7월 21일 쌩 떽쥐뻬리는 죤강 계곡의 사진 촬영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착륙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범해 미국인 지휘관에게 대기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알제리로 돌아가 제트기 원리를 연구하면서 시간이 나는대로《성채》의 원고를 정리하였다.
1944년 사르디니아의 빌라체드로에 있는 제31폭격 중대에서 2-33 정찰 비행단에 복귀할 희망으로 훈련 비행을 하면서 나폴리로 가서 지중해 지구 공군 총사령관인 이커 장군을 만나려 했으나 만나 주지 않아 그대로 돌아 오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알제리로 찾아가 만나게 되었는데 이커 장군은 하는 수 없이 5회만 비행한다는 조건으로 2-33 정찰 비행단에의 복귀를 승락했다.
그해 7월에 동 비행단은 코르시카의 보르고 기지로 이동하였고 쌩 떽쥐뻬리는 약속 받은 5회보다 더 많은 8회나 출격을 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출격을 고집했다.
마침내 7월 31일, 그는 그르노블-안스시 지구에 대한 마지막 출격의 허락을 받아 떠났는데 영영 돌아오지 않고 말았다. 독일의 정찰기에 의해 격추되었으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리하여 행동인이며 작가인 쌩 떽쥐뻬리는 44세라는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동화. 1943년 발표.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인 나는 이상한 소년을 만나 양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소년은 애인인 장미꽃을 제가 사는 별에 남겨 두고 여행길에 오른 왕자로서 몇몇 별을 순례한 후에 지구에 온 것이다. 외로운 왕자에게 한 마리의 여우가 나타나서,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또한 다른 존재를 길들여 인연을 맺어 두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왕자는 이 세계 속에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장미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지구에 사는 사람에게도 실망한 왕자는 내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시적이며 고귀한 분위기 속에 지혜를 짜낸 휴머니스틱한 작품이다.
생텍쥐페리
(1900.6.29~1944.7.31)
프랑스의 소설가. 리옹(Lyons) 출생. 옛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20년 징병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제대 후 자동차공장 등 여러 직종을 전전하다가 평범한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행동적인 인생을 개척하고자 26년부터 위험이 뒤따르는 초기 우편비행 사업에 가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용기 조종사로 종군, 대전 말기에 정찰비행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작품《남방 우편기:Courrier Sud》(1929)에서 유작(遺作)《성채(城砦):Citadelle》(48)에 이르는 모든 작품은 행동을 통한 명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언제나 어려움과 역경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삶을 영위해 나가는 의의를 찾아 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항공에 근무하던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한《야간비행:Vol de nuit》(31)은 행동적인 문학으로서 A.지드의 격찬을 받았으며 페미나상(賞)을 받았다. 그가 추구한진정한 의미의 삶은 개개의 인간 존재가 아니라, 개적(個的) 존재를 초월한 즉, 사람과 사람을 맺어주는 정신적 유대에서 찾으려 했다는데 있다.《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39)《전투조종사:Pilote de guerre》(42)에서는 이러한 그의 관점에서 인간의 관계와 동료 비행사, 그리고 임무,의무,조국 등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발표한《어린 왕자:Le Petit Prince》(43)는 작자 자신이 아름다운 삽화를 넣어서 독특한 시적 세계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