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트 코베인의 부활을 기대했다면 기대를 접어라. 는 위대한 뮤지션의 죽음에서 시작됐지만, 우리의 상상을 훌쩍 넘어서는 방식으로 그의 마지막 나날을 소묘한다. 펄펄 끓는 감동의 드라마 대신 침묵에 가까운 시가 흐른다.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빛과 땀, 객석의 넋 잃은 환호성, 제작사의 탐욕과 그에 맞서는 예술가의 고뇌, 실패한 사랑과 약물 중독,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자살의 순간까지. 커트 코베인의 생을 영화로 옮긴다면 이렇듯 절절한 비극을 그리기 쉽다. 뮤지션, 그것도 한 시대의 정점에서 세상을 뜬 뮤지션의 삶이란 별다른 각색을 거치지 않아도 이미 한 편의 영화이기 마련. 90년대를 뒤흔든 록 그룹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은 죽음 직후부터 신화였다. 추모와 음모론과 미스터리가 혼합된 채 그의 죽음은 세간을 한 바퀴 떠돌았던 터다. 의 소식이 전해진 후 얼터너티브 록과 더불어 젊음을 보냈던 90년대의 아이들은 헌신의 준비를 일찌감치 마쳤다. 미국 인디영화계의 터주이자 음악에 깊은 애정을 보여 온 감독 거스 반 산트의 이름은 기대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러나 는 공개 직후, 기묘한 방식으로 그 모든 흥분을 종식시킨다. 커트 코베인의 이름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와 꼭 닮은 육체를 비추는, 너바나의 노래를 단 한 곡도 들려주지 않으면서 음표의 환영을 둥둥 띄우는 기이한 영화. 는 커트 코베인의 전설에 사로잡힌 그루피에게 보내는 초청장이 아니다. 차라리 그의 노래를 모를지언정 불우한 생과 사에 공감할 수 있는 더 많은 이들에게 건네는 손짓이다. 그 손짓은 아주 희미해서 좀처럼 뜻을 알아채기 어렵지만 일단 온기를 전해 받고 나면 손을 거두기 또한 어렵다.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한
지저분한 잠옷 차림에 빗지 않은 긴 금발,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몽롱한 남자의 눈빛은 어떤 정보 없이도 단박에 커트 코베인을 연상시킨다. 영화 속 친구들은 그를 블레이크라 부르고 그는 숲 속과 집 안을 유랑하며 보낼 뿐 직업과 정체에 대한 단서를 보여주지 않지만, 실은 머리카락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바나의 팬이 아니라도 간단하다. 커트 코베인은 1994년 목숨을 끊은 이후부터 모든 문화를 아우르는 아이콘이 되었기에 그의 이미지는, 티셔츠에 프린트된 체 게바라를 볼 때와 같이 실체를 알지 못해도 아는 것만 같은 기시감을 불러온다. 첫 장면, 집을 나서 산을 가로질러 옷을 벗고 호수를 건너 오줌을 싸는 긴 테이크가 지속될 동안, 잦아드는 웅얼거림 외의 대사가 일절 없고 비척거리는 그의 몸짓 외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느린 장면 동안, 매 프레임마다 “저 사람이 바로 그”라는 잔상이 뒤따른다.
처음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거스 반 산트가 고민한 것도 이 지점이었다. 처음 그는 청년 커트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일종의 전기를 생각했다. 처음 밴드를 꾸리고, 첫 번째 공연 준비를 위해 분투하고, 순식간에 정상으로 치솟은 후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뮤지션의 불우한 삶을 떠올렸다. 실존 인물을 모방하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화와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배우 대신 인형을 사용하는 대안도 고민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모두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작업을 그만두었다. 대신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나날, 그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실제로 존재했는지도 알 수 없는 마지막 며칠(또는 몇 시간)을 담기로 방향을 틀었다. “실제로 커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사라졌고 그 다음 죽은 채로 발견됐다. 커트의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진실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거스 반 산트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는 충실히 고증을 따르지만(이를 테면 그가 영화 속처럼 마카로니 앤 치즈를 좋아했다거나 여자의 옷을 입기 즐겼다거나 사냥총을 들고 숲 속을 배회하기 좋아했다거나) 큰 비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영화가 아무리 진행되어도 큰 사건은 터지지 않는다. 블레이크라 불리는 한 남자가 숲 속 가운데의 큰 저택에, 겉은 그럴 듯하지만 안은 유기된 채 썩어가는 집에 머무르고 있다. 머리카락이 뒤엉킨 얼굴은 드러나지 않고 다만 손목의 흰 팔찌가 병원이나 요양소에서 갓 나온 몸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집 안팎을 닿는 대로 거닐다가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기도 하고, 걸려온 전화를 말없이 받기도 하고, 낯선 사람을 집 안에 들여 묵묵히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어느 밤인가는 가까운 마을을 배회하며 길거리 밴드의 공연을 보고 술집의 문간에 서기도 하지만, 어느 곳에 누구와 있든 그는 이미 모든 것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깊은 적막과 고독, 그리고 철저한 소외밖에 없다. 그의 내면을 따라가는 에서는, 그러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 의 이야기는 처럼, 동일한 비중을 가진 여러 개의 줄기가 병행되는 구조로 구상되었다. 하나는 블레이크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그를 찾는 탐정과 그의 친구 아시아의 이야기였다. 주변 인물들도 블레이크처럼 집 주변을 오래 걷기도 했고, 목욕을 하거나 잠에서 깨는 등 각각의 시간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각본과 촬영을 거치며 영화는 점점 블레이크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처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마취되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그의 삶에서 사라진,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그러므로 실상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 마지막 며칠을 담기로 결심했다. 시적인 영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스 반 산트는 가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아니라 죽음에 ‘영감을 받은’ 영화로 완성된 데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로커의 숨겨진 비화나 생생한 육화를 원한다면 를 피하는 것이 좋다. 주인공 마이클 피트의 헝클어진 금발 위로 코베인의 환영은 쉽게 포개지지만 또렷하게 확인하고 열광할 수 있는 ‘실제’ 코베인의 재현은 없다. 이 영화는 모호하다. 지루하다 말해도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느릿하고 답답하다. 설령 영화를 보는 중 눈이 감기거나 정신이 흐릿해져도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죽음을 앞둔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가듯 시종일관 약 먹은 듯 도취 상태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가시적인 비주얼을 전시하지 않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세계로 관객들을 초대함으로써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보는’ 대신 ‘체험’하게 만든다.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쉽지 않다. 허나 몽롱하고 희미한 구름이 짙어질수록, 인내심 많은 관객들은 그의 속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부와 명예와 특권을 누렸으나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했던 젊은이의 마지막 나날들이 그곳에 있다.
시로 쓰인 레퀴엠
거스 반 산트가 생전의 코베인을 만난 것은 꼭 한 번이었다. 지인들을 사이에 두고 간접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고 자살 직전 코베인에게 영화 출연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어찌됐든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의 자살은 사회 문화적 충격을 남기기는 했으되 반 산트에게 사적인 영향을 크게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포틀랜드에서 20년을 살아 온 반 산트는 커트 코베인이 나고 자란 지역의 공기와 문화를 알고 있었다. 미국 북서부를 중심으로 꿈틀거렸던 뮤직 신의 기운, 시애틀에서 뿌리를 내리고 전 미국과 세계를 뒤흔들게 된 밴드 너바나의 성장을 그는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코베인의 죽음과 함께 너바나 또한 종말을 맞게 된 것도. “나는 그 순간(코베인의 죽음)이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춰버린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사건이 얼터너티브 음악을 중단시켰다.” 가 회상에 젖고자 하는 이들의 바람에서 벗어나 영화 속에 너바나의 음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저작권의 문제와 별도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2005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후 미국에서의 프리미어 상영지역을 시애틀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실상 전기 영화의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작품이기에 를 말하면서 커트 코베인의 삶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엔 뜨거웠던 90년대 뮤직 신의 현장이 없고, 추억의 록 넘버들이 없으며 시대정신을 떠올릴 만한 어떤 인물도 풍경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려진 외피 대신 그의 내면을 짐작하게 된다면, 커트 코베인의 불우한 삶은 를 해독하는 전부가 될 수도 있다. 세계적인 스타로 군림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으나 그 결과를 이뤘을 때 그는 아직 20대였다. 모든 것을 성취했기에 바랄 것이 없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향하지 않고는 절망을 터뜨릴 상대가 없었다. 불꽃이 아니라 잿더미의 순간, 는 그 지점에 주목한다. MTV 스타의 권총자살은 엔터테인먼트 뉴스라는 이름의 수많은 픽션으로 재탄생됐지만, 픽션의 감독인 거스 반 산트는 그 ‘엔터테인먼트’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영화를 만든다.
가까웠던 이들이 사고로, 스스로, 우연처럼 세상을 뜬 후 반 산트에게 젊은 죽음은 더 이상 타인의 것이 아니었다. 커트 코베인이 죽기 1년 전, 이후로 절친한 친구였던 리버 피닉스의 우발적인 죽음이 이미 그를 뒤흔들었던 터다. 그 직후인 1995년 그레이풀 데드의 리더였던 제리 가르시아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반 산트의 지기이자 의 음악을 맡았던 모던 록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인들의 죽음은 그의 삶에 깊이 얼룩을 남겼고 그는 한동안 삶만큼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언론에선 그들이 약물 때문에 죽었다고 기사를 썼지만 그들을 둘러싼 다른 것들이 아마도 더욱 격렬했을 것이다. 마약은 죽음의 원인이기보다는 해방의 형태였다.” 거스 반 산트는 1997년 소설 를 써내며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극복하고자 애썼다. 영화가 그 도구가 된 것은 어느 정도 묵상의 시간이 흐른 후다. 와 로 평단의 기대 섞인 지지를 얻었고 과 로 할리우드 주류에 안착한 이후에야, 거스 반 산트는 그 어느 쪽과도 닮지 않은 가장 실험적인 영화의 형식으로 영화관객과 소통을 시도한다.
이른바 ‘죽음 3부작’이라 이름 붙여진 와 를 돌이켜 보면 와 모두는 하나의 일관된 심상을 갖는다. 표면적으로 세 작품은 모두 죽음을 다룬다. 는 광활한 사막에 떨어져 죽음을 기다리게 된 두 남자 제리(들)의 이야기다. 는 난데없는 총격 사건으로 집단 희생된 고등학생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께 그린다. 그리고 는 자살이다. 영화 속 모두의 시절은 십대에서 이십대, 젊음이 미처 꽃피우기 전이다. 또한 세 영화는 모두 알려진 실화를 주춧돌로 삼았다. 는 맷 데이먼이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막에서 길을 잃은 두 친구가 서로를 죽이는 비극으로 끝난 작은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는 1999년 미국을 뒤흔든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음악사에 가장 크게 새겨진 록 뮤지션의 자살이 그 뒤를 따랐다. 수없이 반복되고 회자되었던 충격적인 죽음의 사건들을 가져오면서 거스 반 산트는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희미하게 그려졌던 죽음의 이미지는 3부작의 완결 후에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꼴을 이룬다. ‘죽음 3부작’은 각각 다른 이유로 떠나간 젊은 죽음들에 바치는 그의 시다. 뉴스가, 이야기가, 시가, 소문이 재현했던 어떤 방식과도 다르게 그가 시를 택한 것은, 오직 말하지 않는 것만이 가장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가 그러했듯 는 감춤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이는 영화다. 그는 커트 코베인의 이름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커트 코베인을 불러일으키고, 죽음의 순간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감독과 이야기를 듣는 관객의 구분은 없다. 죽음 속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제 보는 이의 몫이 된다.
가장 낯설고 가장 불친절한 방식으로
거스 반 산트에게는 뜻을 알아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얼터너티브 시대의 진앙지로 꼽히는 그룹 소닉 유스의 서스틴 무어가 의 음악을 총괄했고 부터 그와 작업해온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즈가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블레이크를 연기한 주인공 마이클 피트 외에 다리오 아르젠트의 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배우 아시아 아르젠트와 이름이 직접 불리우지 않는 의 악동 감독 하모니 코린이 블레이크의 친구(또는 식객)로 기꺼이 참여했다. 에서 그랬듯 감독은 그들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했고 굳이 1994년의 사실을 되살리고자 애쓰지 않았다. 커트 코베인의 절친한 벗이자 소닉 유스의 또 다른 멤버인 킴 고든이 전화 목소리로 출연, “차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정신 차리고 나와 함께 가자”고 설득하는 여자를 연기한 장면 정도가, 그나마 킴 고든의 정체와 커트 코베인의 삶에 대해 알고 있는 소수의 마음을 건드리는 가장 극적인 장면일 것이다.
굳이 그가 재현하고자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날들’의 징후일 것이다. 의 성공 이후 지하실에 살던 커트 코베인과 아내 커트니 러브가 시애틀에서 구입한 것과 비슷한 외딴 저택을 찾기 위해 반 산트와 제작진은 미 대륙을 뒤졌다. 뉴욕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서 의 집을 찾아냈고 성공 이후의 광채보다 황량함을 그곳에 가득 뿌렸다. 이전에는 속해 있지 않았으나 갑작스럽게 진입하게 된 세계, 그 자신의 몸뚱이 외에는 전과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세계의 징조는 그곳에서 쉽게 구현되었다.
그리고 소리가 있다. 블레이크가 걸을 때마다 동시녹음으로 채집된 자연의 소리가 그를 감싼다. 숲이 서걱거리고 새가 희미하게 우짖고 물이 쏟아지는 동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드물게 대화를 나누고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사이에서 거스 반 산트는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삶의 어떤 특징을 포착한다.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마이클 피트에게도 촬영 직전 주어진 것은 12페이지 안팎의 개요뿐. 그것은 “숲 속을 걸어간다-20분간”과 같은, “어디서 시작하고 끝나는지에 대한 일종의 지도”였을 뿐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지문에 따라 배우는 숲 속을 걸었고 카메라가 그 뒤를 좇았다. “때로는 촬영감독이, 또는 내가, 어떤 때에는 그립이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거스는 그것을 조율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많은 감독들은 아주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저기에 컵을 내려놓고, 내가 원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라는 식으로. 그러나 거스는 원하는 곳 아무 데나 컵을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스물셋의 배우 마이클 피트, 첫 눈에도 커트 코베인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닮게 변한 그는 촬영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한다. 뮤직 컨설턴트를 맡은 소닉 유스의 서스틴 무어조차 “순간 순간 그에게서 커트를 본다” 고 말할 정도로 그는 코베인에게 깊이 몰입했다. 그룹 ‘파고다’의 일원이며 헌신적인 록 키드이기도 한 그는, 영화 내내 블레이크 또는 커트 코베인처럼 숲 속을 홀로 떠돌고 노래를 부를 때도 세상과 담을 깊게 쌓았다.
이렇게 짜인 이야기는 첫눈에 두서없고 맥없이 보인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은 어느 순간 그조차 방향을 바꾼다. 에서 빈번히 반복되었던, 같은 시간대를 다른 인물의 눈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에서 딱 두 번 사용될 뿐이지만 효과는 크다. 블레이크의 시선으로 흘러가던 영화의 시간대가 갑자기 바깥 인물의 눈으로 반복될 때에 는 브레히트적인 소격 효과를 준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처음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거스 반 산트는 영화의 시간대를 일반적인 영화의 관습보다 훨씬 느리게 늘임으로써 무심코 지나쳐갈 수 있는 사물들을 응시하고 그 이면을 생각할 수 있는 진공 상태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인물에 대해 객관적이기보다는, 주인공의 탐색이나 목적을 따라가기보다는, 관객들로 하여금 다른 면을 보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는, 현대 영화의 관습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불친절하지만, 관습을 벗어나 제 힘으로 영화를 보고자 하는 관객들에게는 가장 친절한 영화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조우하는 순간
거스 반 산트는 독립예술영화의 기수로 영화를 시작했고 경력의 중간지대에서는 할리우드 메인스트림의 직업 감독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50을 넘어선 지금은 자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실험적이고 가장 낯선 세 편의 영화를 쏟아냈다. 는 이제껏 커트 코베인의 영화로 불렸지만 실상 이것은 감독의 영화이며, 음악영화이기보다는 실험영화, 실제의 삶보다는 상상의 죽음에 가까운 영화다.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일치단결된 호평을 얻어내거나 많은 관객들과 만나기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는 "미래의 영화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 더 이상 연극적인 토대와는 무관한 새로운 것"이 될 거라 믿으며 그 믿음을 실천하고 있다. "현대의 영화는 설교와 같다. 관객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한다. 이 영화는 설교가 아니다. 영화의 요점은 감독의 목소리로부터 당신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수많은 해석들이 여기에 있을 수 있다." 영화의 주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확장하자면 인터랙티브 영화의 밑그림이 될 수 있는 이 같은 비전은 이미 때에 말해졌던 것으로, 에 이르러 강화되었다. 이런 형식으로 뼈대를 세우고 그는 죽음의 사유를 내용으로 채웠다. 는 콜럼바인 사건을 낳게 했던 수많은 원인과 생각들을 영화로써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에서 그는 "자신의 삶과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펼친다. 그것을 커트 코베인으로 한정하지 않아도 '라스트 데이즈'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누구든 처럼 취한 듯한 시간에 빠져들 수 있고 처럼 사막에 고립된 듯한 고독감을 맛볼 수 있다. 처럼 전혀 예상치 않았던 순간 난자당하는 경험과 부딪힐 수 있다.
그러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단언하건대, 의 순간을 놓친다면 당신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죽음을 통찰할 수 있는 드문, 어쩌면 유일한 순간을 잃게 될지 모른다. 죽음을 다루고 죽음을 극화하는 영화는 언제나 넘쳐나지만 죽음의 순간을 함께 부유하게 해주는 영화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스 반 산트의 는 ‘죽음 3부작’의 연장선에서 볼 때 가장 빛나는 영화지만 단독으로 떼어놓고 마주하더라도 독자적인 빛을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 젊음과 죽음이 조우하는 가슴 저미는 순간, 그 광채를 놓치지 말기를. 죽음의 굴곡을 넘으며 살아가는 인생에서 가장 큰 희망이 되어주는 건, 밝고 명랑한 삶의 모습보다 죽음 앞에 마주선 마지막 나날, 그 순간의 그림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