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숙(puruneo)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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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럽습니다. 아름답고 가슴 시린 추억이 떠오릅니다.
ⓒ 김관숙
바람이 차가워 잔뜩 몸을 움츠리고 걸어가는데 문득 훅하고 순대 냄새가
코끝을 스쳐 갑니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순대 냄새가 여름과 달리 막 식욕을 자극합니다. 비닐에 덮인 대야보다 조금 큰 스테인리스스틸그릇에
툭 터질 것 같이 팽창해 보이는 순대들이 뽀얀 김 서림 속에 탐스럽게 담겨 있습니다. 조금 사 가지고 갈까?내가 주춤거리자 그 앞에 앉은 두터운 잠바를 입은 주인 여자가 눈빛을 맞추어 오며 상냥하게 웃습니다. 족발 가게 앞인 한데인데도 순대에서 오르는 김 때문일까? 주인 여자는 하나도 안 추워 보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예상대로 당면 순대입니다. 그래도 2인분을 샀습니다. 남편이 투덜거릴 것 같습니다. '당면 순대는 살찐다구!'
나도, 남편도 먹는 대로 살이 찌는 체질입니다. 젊었을 때는 그런 대로 지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과체중이 될까봐, 매 끼니를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운동을 병행하고 있지만 그래도 단음식과 간식 같은 건 오래 전부터 끊고 삽니다.
나이 들면 누구나 퇴행성 무릎 관절염이 오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내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남편은 이미 한쪽 무릎에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상체가 무거우면 무릎이 더욱 아플 것을 생각해서 남편은 체중에 신경을 쓰는 것은 물론 운동을 할 때도 외출을 할 때도 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남편과 달리 조금 느긋합니다.
"순대 한 번 먹는다고 살이 막 찔까 뭐---."
예전에 어머니가 만들어 준 순대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를 않았습니다. 학교에 갔다 와서 책가방을 던져 놓고 한 접시를 다 먹고 나서 얼마 있다가 또 한 접시를 먹어치워도 살이 찌는 기분 같은 건 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역시 살찌니까 그만 먹으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시절, 외할머니는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때면 먼지가 풀풀 거리는 까마득하게 긴 신작로 길을 걸어 나와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우리 집에 오시고는 했습니다. 농사를 조그맣게 지으면서 어렵게 사는 터라 뭐가 먹고 싶어도 며느리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까 외할머니가 와 계셨습니다. 그날은 순대가 먹고 싶어 오신 모양입니다. 옥비녀를 질러 곱게 쪽을 찐 외할머니는 하얀 인조 저고리를 벗어 놓고 러닝 바람으로 부지런히 돼지창자들을 손질하면서 커다란 양은 대야에 순대 소를 빨갛게 버무리는 어머니에게 카랑거리는 목소리로 툭 툭 한 마디씩을 던졌습니다.
"그렇지, 이번엔 우거지를 넣는 거지. 그 댐에 두부구."
재료들을 한 번에 모두 쏟아 넣고 버무리면 맛이 없는 가 봅니다. 돼지창자에 들어갈 재료들은 큰 함지박 하나 가득 됩니다. 선지 찹쌀 대파 마늘 배추우거지 무채 양파 홍당무 두부 숙주나물 버섯 등인데, 모두 물기가 배직거릴 정도로 아주 곱게 다졌습니다. 당면은 한 줄도 안 들어갑니다.
그때 그 재료들은 언뜻 보아도 영양이 골고루 풍부했습니다. 푸줏간에서 사온 싱싱하면서도 빛깔이 선연한 선지에는 철분이 들었고, 그 많은 채소에는 섬유소와 비타민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영양상으로 봐도 조화가 잘 이루어진 음식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마솥에 작은 양푼을 엎어놓고, 얼기설기 잔나무 가지들을 얹고 그 위에서 무명천에 싼 순대들이 푹 익어가는 냄새는 그야말로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기가 막혔습니다.
외할머니는 몇 점만을 먹습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실컷 잡수시라고 권해도 새우젓에 꾹꾹 찍어 몇 점만을 먹고 맙니다. 순대 같은 건 별식으로 생각하고 사는 아드님과 손자들이 눈에 선해서 더는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도 하고 당신이 조금 먹어야 순대를 더 많이 싸 가지고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외할머니의 모습은 "이번엔 우거지를 넣는 거지, 그 댐에 두부구"하고 카랑하게 말씀하실 때와 달리 초라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외할머니는 광주리에 수북한 순대들이 한 김 나가자마자 슬며시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외할머니의 아픈 속내를 아는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붙잡거나 하지를 않습니다. 현관을 나서는 외할머니의 손에는 묵직한 보따리가 들려졌습니다. 외할머니는 즐겁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이슬이 어리고 있었습니다.
성당 앞을 지나다가 현관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성당이 우리 동네 상가건물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다가다 들리기가 좋습니다. 혹시 아는 얼굴을 만나면 현관 안에 자판기 커피를 뽑아 나누고 추위도 풀 생각인데, 현관 안에 의자들이 모두 비어 있습니다.
그냥 돌아서려는데 자판기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일어나더니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익은 반코트를 입은 어르신의 작은 체구를 자판기가 가리고 있어서 얼핏 보지를 못했습니다.
어르신은 감기 기운이 있어서 병원에 다녀오는 길인데 너무 추워서 지금 막 커피 한잔을 빼서 마시고 난 참이라고 하면서 "춥지?" 하더니 얼른 가슴을 가로 질러 맨 까만 백에서 잔돈을 꺼내어 커피 한잔을 뽑아서 내게 내밉니다.
나는 황송해 하면서 커피 잔을 받아들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어르신도 옆으로 앉았습니다. 후후 불어 한 모금을 마셨습니다. 가슴 속이 따듯해 오면서 빨개진 뺨이 녹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내 컵을 비워냅니다.
"잘먹었습니다. 다음엔 제가 커피 뽑아 드릴게요."
"그깐 걸 가지구 뭘. 근데 순대 냄새 나네, 순대 샀어?"
"네."
"오늘같이 추운 날은 들깨가루 뿌린 따근한 순대국이 좋지. 순대국 끓일 거야?"
"그냥 새우젓 찍어 먹을 거예요."
"나두 순대 사다가 국 끓일 걸 그랬나 봐. 감기가 오려구 그랬는지 그제부터 통 입맛이 없지 뭐야. 곰국두 싫더라구. 몸이 부실헐 땐 그저 지 먹고 싶은 걸 맘껏 먹는 게 최고야."
이상합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팔십 중반이신 어르신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그 옛날 외할머니의 모습만 같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어르신에게 순대봉투를 들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막 하는데 어르신이 백에서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에미냐? 퇴근길에 거 순대 좀 사와라. 순대국 끓여 먹으면 감기가 뚝 떨어질 거 같으니까."
그리고 핸드폰을 접어 다시 백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며느리가 사온대. 주사두 맞았겠다, 거 먹구 푹 자구 나면 좋아질 거 같아."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왜 진즉에 순대봉투를 어르신 손에 들려 드리지 못했는지를 모릅니다. 커피 얻어먹은 것이 다 마음에 걸릴 정도입니다. 그런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이 어르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습니다.
"순대 다 식겠어, 어서 가. 따끈할 때 먹어야 맛있는데."
""네, 감기 얼른 나으세요."
어르신은 유순하게 웃고 돌아섰습니다. 성당에서나 연령 회에서 어르신을 만날 때마다 나는 따듯한 정을 느끼고는 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어르신의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내 가슴을 따듯하게 해 주고는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포근한 어머니 같은 정을 느꼈습니다.
순대는 이미 다 식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르신 말씀대로, 말 잘 듣는 아이같이 아주 빨리 걸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2006-12-0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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