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다. 여자의 질투는 그 어떤 독극물보다 강하다. 사랑의 실패, 다른 사람을 향한 선망, 금간 자존심 등 여자는 자신의 존재가 미미하다 느껴질 때 독성 강한 질투심을 발휘한다. 때로는 살인, 간교로까지 번지는 그녀의 복수전! 질투, 절대 간과하지 말자. 바로 지금, 당신도 질투심에 불타는 그녀의 표적이 될 수 있다.



→ 질투의 칼날을 가는 여자 K씨의 별명은 '옹달샘'이다. 그녀의 깜찍한 외모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그녀 별명을 더 길게 풀이하자면 바로 '마르지 않는 샘'이란 뜻. 타고나기를 질투심으로 꽉찬 그녀는 그야말로 '자존심' 하나로 세상을 살아온 여자.
TV뉴스처럼 살인, 방화라도 저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사회적 체면(?)을 높이 산 그녀, 그의 집앞에 주차되어 있던 그와 그의 여자 차 두대를 그대로 박살내 버렸다. 그것도 자신의 차로 말이다. 경찰서에 끌려가 조서를 받으며 하는 말, "그래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아서요." 그녀의 질투심이 자아낸 최고의 작품이었다. 간간이 각종 매체에서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여자의 질투심이 일으킨 엄청난 범죄들이 세상 사람을 경악케 하기도 한다. 지난 1월 중국 같은 반 급우의 미모와 재능을 시기한 한 여학생이 모두들 잠든 밤에 기숙사에서 친구의 침실로 들어가 황산을 부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피해학생은 질투를 일으킨 장본인의 침대에서 함께 잠들었던 급우였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세 번의 수술끝에 가까스로 목숨만 유지될 정도였다. 결국 중국에서는 질투심으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피의자학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도깨비뉴스 참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남친에게 딴 여자가 생긴 것을 안 여자가 남친이 잠든 새에 제초제를 입에 부어버린 사건도 있었으며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학교 내 왕따 관련 폭력사건 역시 '질투'가 근원이 되고 있다. 지난 해 동료끼리 일어난 폭력으로 해체까지 이른 모 그룹의 경우 두 여자가수의 질투심과 경쟁심이 빚어낸 웃지 못할 일화였다.

→ "나도 내가 무서워!"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여자의 질투가 불러 일으킨 일들은 무수히 많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신라시대의 미소년 엘리트집단 화랑. 그러나 원래 그 근원은 '원화(源花)'라는 여자들의 집단이었다. 원화는 두 패로 갈라 각각 한 명씩 우두머리가 집단을 다스렸는데 진흥왕 시대에 원화에는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여인이 원화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두 모임 자체가 항시 라이벌이었으며 서로 미모와 재능에 있어 자신만만해 서로에 대한 질투심이 아주 심했다. 하루는 준정이 남모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음식과 술 등으로 대접을 한 다음 남모가 취하게 만들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준정은 술에 취한 남모를 업고 가 강물에 빠뜨려 죽여 버렸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신라 조정에서는 준정을 잡아다 처형에 처하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화 자체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결국 여자가 아닌 남자들로 이루어진 화랑으로 대체하게 된 것이다.
희대의 악녀로 통하는 장희빈 또한 인현왕후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해 인형을 놔두고 저주의 신당을 차렸던 그녀. 결국 처참하게도 사랑해 마지 않던 왕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조선 숙종 때 서포 김만중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를 빗대어 한글소설 를 쓰기도 했다.
특히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왕의 여러 여자들끼리 벌이는 암투가 처절했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있었지만 넘치는 질투심이 화를 불러 자신 스스로

→ 질투심의 대명사, 장희빈 도끼에 찍히는 꼴이 된 여자들도 많았다. 속설에 의하면 조선 시대 역대 왕이나 왕자들이 궁중의 여인들에 비해 단명하는 것은 궁중에서 서린 독기 서린 '그녀들'의 원혼이 저주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고 한다. 역사의 모든 사건에 여자의 질투가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여자에게 있어 질투는 해악인가, 필요악인가?


사람들은 생각한다. 여자의 적은 언제 어디서든 바로 '여자'라고. 가정에서 자매간이나 모녀, 고부간에도 질투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며 같은 직장에서도 여자의 적은 '그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착각은 한 마디로 '일반화의 오류'다. 물론 서로의 미모와 재능, 혹은 빼앗긴 사랑 때문에 적이 되기도 하지만 여자가 질투를 일으키는 대상은 '남자'도 될 수 있다.
혹자는 '남녀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역사에 있어 여자에게 지배당했던 남자들의 질투심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서로 적을 만든다는 것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여자의 적은 절대 '여자'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 '여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아를 조절하지 못 하는 '자신'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모든 여자에게서 질투를 빼면 헛것이라고. 세기의 대문호인 그 조차 왜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 왜 질투심은 여자만의 소유물로 생각할까?
지난 해 미국에서는 진화심리학자들끼리 남녀의 질투심에 대한 논쟁이 이슈화된 적이 있다. 남자는 육체적인 것에, 여자는 정신적인 것에 민감하다는 이론으로 각각 다른 양상으로 질투가 뇌에 각

→ 남자에게도 질투는 있다!인된다는 데이비드 버스 교수의 정설을 뒤집은 것. 본래 버스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남녀의 질투심은 각각 다른 양상으로 뇌에 각인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 두 명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녀의 질투심은 성별의 차이가 없으며 있다 해도 문화적인 차이일 뿐이라고 못박은 것. 이들은 "남녀의 질투심의 성차는 진화가 아닌 문화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
남자의 질투심도 여자의 그것만큼 만만치 않은 존재다. 다만 남녀의 차이는 표현의 문제다. 남자는 자신의 질투심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 자체가 '남성성'을 해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여자처럼 손톱을 들이대며 질투심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영화 을 보면 남자의 질투심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의 질투심을 상대 남성을 우상화시키면서 전환하는 귀여운(?) 방법을 택했다. 알고 보면 남자의 질투가 더 유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질투는 화장실처럼 남녀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 유니섹스 스타일! 바로 남녀 공용인 것이다.

팜므 파탈, 악녀와 질투가 강한 여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 것. 엄연히 '악'과 '질투'는 다른 것이다. 예부터 질투심이 강한 여자는 집안을 망친다 했다. 오로지 참고 인내하고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미덕으로 여기는 유교적 가치관으로 볼 때 분명 '질투'는 악이다.
그러나 질투는 때로 발전을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한다. 질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더 나은 것에 대한 선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여자들을 보면 질투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적극성이 두드러진다. 또한 사랑에 있어서도 질투는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질투는 잘 쓰면 명약이요, 못 쓰면 독약인 셈이지 그 자체가 악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관상학적으로 볼 때 이마와 입술이 튀어나온 여자는 질투심이 많다고 한다. 이마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전두엽이 발달된 것으로, 전두엽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감정을 예민하게 만드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전두엽과 질투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질투심이 심하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앞서 말한 일련의 사건들처럼 감정이 극도의 한계로 이르러 범죄같이 큰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허나 그것은 질투심이 많아서 문제가 된 것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절제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문제이다. 또한 삶의 가치관이 그릇되게 자리잡힌 탓에 감정을 나쁘게 이용한 것이다. 결국 질투심은 자신의 문제점 중 하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능력이다.
탈무드에는 이러한 격언이 있다. "올바른 자는 자기의 욕망을 조정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자는 욕망에 조정당한다." 질투가 당신을 조정하기 이전에 질투를 조정해서 올바른 쪽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던 故기형도 시인의 시의 마지막 구절을 되뇌이며 질투를 에너지로 만들어 보자. '단 한번이라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