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멜리 노통처럼 끊임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 써내는 글마다 족족 재미있게 쓰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멜리 노통의 소설은 몽땅 재미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 『시간의 옷』을 읽을 때 느꼈던 섭섭함이 이번에도 느껴진다. 하지만 여전히 아멜리 노통의 소설은 거의 재미있으니까...
만약 《트루먼 쇼》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전 인류는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였고(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고 자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전 세계에 방영된 사내를 다룬 영화를 몰랐다면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좀더 파격적으로 받아들였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물론 아멜리 노통의 소설의 설정은 《트루먼 쇼》와 조금 다르기는 하다. 방송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한 명이 아니고 집단이며, 《트루먼 쇼》에서 매우 은밀하게 트루먼을 감시하던 인물들 대신 카포라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유대인으로 구성된 유대인 관리자들) 계급이 등장한다. 또한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들을 알고 있고, 포로가 된 이들이나 이들을 감시하는 카포들이나 이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애쓴다.
“...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그들을 얼마나 추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있다. 즈데나는 카메라가 거울만큼 관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거울 앞에 서서 짧은 연설을 준비했다.”
그리고 바로 그 카메라의 중심, 그러니까 시청자의 시선이 가장 자극적으로 머무르는 곳에 두 명의 인물이 있다. 포로 번호 CKZ 114인 파노니크와 집단 수용소의 카포로 악명을 높이고 있는 즈데나가 바로 그들이다. 영문도 모른 채 식물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방송 조직위원들에게 사로잡혀 집단 수용소에 갇힌 파노니크와 ‘시청자를 위한다는’ 원칙만 지킨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방송 조직자가 되기에 적합한 인물로 선정되어 카포가 된 즈데나는 운명적으로 (실은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작위적으로 조작된 것은 아닐까...) 만난다.
“EPJ 327은 그 장면을 제대로 해석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행동이 되풀이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이 하나의 방어막이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상대방을 취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바로 사랑의 행위였다.”
파노니크에게 관심을 보이던 즈데나에게 CKZ 114로 존재하던 파노니크가 자신의 이름을 외침으로써 자신의 동료를 구하는 순간, 파노니크를 향한 즈데카의 사랑은 (즈데카는 여성이다)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나치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상상 속의 귀부인을 만들었던 것처럼, 파노니크는 점점 집단 수용소의 살아 있는 귀부인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파노니크는 볏짚 매트 위에 쓰러져 역겨움의 눈물을 흘렸다. ‘집단수용소’ 같은 방송에 수치스러운 성공을 보장해준 인류에 대한 역겨움. 즈데나 같은 인간이 속한 인류에 대한 역겨움. 그런 여자가 자신을 시스템의 희생자로 여기다니! 즈데나는 그녀를 탄생시킨 시스템보다 더 못했다. 끝으로, 그 천박한 존재에게 그런 욕망을 불러일으킨 그녀 자신에 대한 역겨움...”
하지만 자신을 향한 즈데나의 욕망, 그리고 이러한 집단 수용소의 상황을 알면서도 TV를 끄지 못하는 시청자들의 관음증, 점차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포로들에게 질린 파노니크는 드디어 조직위가 시청률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한 시청자들에 의한 희생자 투표에서 자신을 희생자로 뽑아줄 것을 카메라를 향해 호소한다. 그리고 희생자가 되어 죽음의 위기에 선 파노니크...
그간 몇 편의 소설에서 (예를 들어 『공격』과『머큐리』같은) 보여준 아멜리 노통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이번 소설에서도 여전하다.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표현되는 파노니크와 아름다움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즈데나의 대비는 매우 노골적이다. 여기에 언론인과 정치인들을 비롯한 오피니언 리더들에 대한 불신, 시청자로 표현되는 일반 대중들의 집단적인 행태에 대한 비판, 신문과 라디오 TV를 비롯한 대중 매체들의 선전선동에 대한 조롱, 홀로코스트,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동성애와 소아애가 겹치면서 소설은 점입가경으로 흘러다닌다.
그럼에도 이 파격적인 소설은 오히려 아멜리 노통의 다른 소설들이 주던 신선함을 제공하지 않는다. 자신의 할 말을 위해 작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상황은 스스로 파 놓은 무덤이 되어 이 재기발랄한 (하지만 이제는 거의 중견 소설가라고 봐야 할) 작가를 그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리는 것 같다. 스스로를 매장하면서까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오히려 불분명하다. 의미가 흘러 넘쳐 오히려 하나하나의 의미들이 사라져버리니 이것 참 낭패스럽다. 그저 작가가 어서 무덤에서 걸어 나와 부활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