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심청’을 다시 태어나게 한 또 하나의 소설이지만, 작가 황석영의 ‘심청’은 원전에서 모티브 정도만 가져왔으리라 생각이 될 뿐 파격적일 만큼의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 되었다. 19세기 동아시아의 파란만장한 근대전환기라는 역동적인 시, 공간성이 부여되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심청이 혹은 렌화, 로터스, 렌카라는 인물은 충효관이라는 집단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개인이 아니라 뚜렷한 자아를 가지고 환경과 부대끼는 근대적 개인으로 변신하였다. 이런 구체적인 역사적 상상력의 가미는 ‘심청’을 있을 수 없는 허구적 스토리에서 그 시대에 있음직도 했겠다 싶은 민초의 이야기로 극화시켰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고전 속의 정형화된 심청은 잊어야 한다. 이 속에는 자신의 삶에 도움 안 되는 불필요한 껍데기는 벗어 던진 채 매춘부로서 또는 첩으로서 동아시아 곳곳을 전전하며 부침 많은 삶과 싸우는 억척같은 여성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여성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패권열망이나 자본주의의 시장논리에 대해 교육을 받았을 리 만무하지만, 그러한 체제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생존해 나갈지 빠르게 체득하였고 자신의 가치를 상품화시킴으로써 영리하게 대처하였다. 물론 그러한 삶의 시작은 자의가 아닌 타의였고 각종 봉건적 폐습과 강압에 의해 멍든 심청의 몸은 곡절 많았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 훗날 결국 일제에 의해 반불구가 된 조선의 운명과도 겹쳐진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지독한 상황들에 부딪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연극적 자아를 유지하며 삶을 견디는 힘을 얻는다.
소설은 동아시아에 밀려들기 시작한 근대의 격랑 속에서 시공을 표류하며, 부잣집 노인네의 시첩으로부터 주루의 기녀와 창녀촌의 창녀 생활을 거쳐 오키나와 사족의 부인이 되었다가 결국 최고 기생을 일컫는 '에라이샹'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한 여자의 몸과 마음의 변전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기구한 여자의 일생은 19세기 동아시아의 벌거벗은 역사가 된다. 타의에 휘둘리는 역사는 수컷들의 폭력으로 심청이라는 가냘픈 여자의 몸에 고스란히 기록되고 이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질적인 문명의 침입을 받은 동아시아 주민 전체의 초상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론 그러한 부대낌 속에서도 자신은 렌화, 로터스, 렌카가 아닌 ‘심청’임을 늘 스스로에게 주지했던 심청의 모습은 나름의 민족적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려했던 동아시의 주민들의 저항성을 드러냄이 아닐까.
이 책의 표지에는 ‘매춘의 오딧세이’라는 큼직한 표제어가 쓰여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심청이는 오디쎄우스의 귀향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오디쎄우스가 자신을 유혹하는 온갖 대상을 물리치면서 힘겹게 획득한 자율성으로 고향에 돌아갔고 그의 이런 귀향방식이 서구 모더니티가 구현되는 방식을 보여준다면, 황석영은 이런 서구적 귀향과 다른 방식으로 동아시적 귀향을 구성하는 듯 보인다. 심청은 매춘부처럼 육체를 점령당하면서 속악한 근대화의 논리에 따라 유전하지만 결국은 보살핌의 모성애를 근간으로 고향에 돌아간다. 더러운 물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렌화’ 심청은 추악했던 근대의 논리를 뚫고 나아가 근대를 정화할 수 있는 존재로 상상된 것이다. 이런 식의 상상이 수컷들의 권력이 횡행하는 곳에서 여성적 세계관으로 동아시아 근대가 나아갈 방향을 설파하는 등불로 해석이 될지, 매춘녀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을 가공한 남성적 응시의 오랜 역사에서 결코 새로울 것이 없는 구판의 재연일지는 읽는 이들의 평소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