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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탕과 열탕사이] 31장. 나에게 넌, 너에게 난

정은이 |2007.01.14 22:16
조회 33 |추천 1

네이트 CF, 비와 이나영

 

박민규의 에서 읽은 이 부분이 문득 생각난다. 평생을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알츠하이머에 걸린뒤, 처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넌 누구냐?" 연애 얘기는 아니지만 이 짧은 에피소드 속에는 연애에 있어 아주 중요한 두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누구냐'와 '너는 누구냐', 풀어서 말하자면 이런 얘기가 되겠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냐, 그리고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냐.

 

선배? 정기사! 호칭이 바뀌면 관계로 바뀐다

 

 

"정기사~ 괜찮아" 보라, 이나영의 저 단호함.

그리고 비의 "같이 살던가 해야지" 오케이, 연애는 그런 것이다.

 

만남, 감정, 관계, 이 셋은 굉장히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지만, 언제나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연애의 모든 긴장감은 바로 이 시차에서 오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만남이 시작되고 감정이 뒤따라오고 다음에 관계가 확고해지는 순서도 있겠고, 감정이 먼저 시작된 뒤 나머지가 따라올 수도 있다. 흔치는 않지만, 관계가 감정을 만다는 독특한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정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가 우너하는 방향으로 풀린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그 사이사이의 과도기에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쩌면 그 질문이야말로, 지금 내가 연애의 어느 과정에 속해 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지도 모르겠다.

 

최근, 남녀 사이의 '관계'를 단계별로 보여주는 시리즈가 있다. 일단은 주인공이 이나영과 정지훈이라서 눈에 확 꽂혔던 SK 네이트 광고.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는지는, 그들이 사용하는 호칭의 변화에서도 짚어볼 수 있다.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뭐 당연하잖아?) 아직은 선후배 사이였을 때, 정지훈은 이나영에게 ‘선배’라는 호칭을 쓴다. 그리고 아직은 너를 내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나영의 단호한 호칭 ‘정 기사’. 그들은 상대방을 위해 예쁜 옷을 골라 입고, 혼잣말로 “같이 살던가 해야지” 하면서 키득대지만, 아직은 공식적으로 커플이 되진 못했다. 자유무역이 가능한 시기이므로,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관계’와 ‘감정’이 똑같지 않다 보니, 상대방이 소개팅을 하는 걸 보면 속이 뒤틀리고, 들킨 쪽은 미안하고 민망한, 아주 미묘한 상황이 벌어지는 거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조금 더 확고한 관계를 바라기 시작하고, 상대방에 대한 독점권을 원하게 된다. 방법과 표현은 직접적일 수도 있지만, 우회적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사랑 고백 비슷한 것을 하면서 “이거 다 노래 제목이야”라고 능청을 떠는 이나영에게, 주리를 틀면서 물어보자. 정말로 그게 100퍼센트! 노래 제목일 뿐이었냐고. 어쨌거나 마음은 전달되고, 두 사람은 어느 새 ‘나영 씨’ ‘지훈 씨’라는 호칭을 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본 광고에서 마침내 커플의 문턱에 선 두 사람. 사랑을 고백하는 동영상에서 정지훈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올 겨울엔 꼭! 나영이를 주세요!”

 


"나영씨~" 어느새, 선배에서 말을 놓는 사이로... 그리고

"지훈씨~" 이 호칭역전의 스펙터클!

 

그러니까, 나영 선배가 나영이로 변신하고, 정 기사가 지훈씨로 변신했다는 해피엔딩이다. 물론 이 광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의 관계는 계속 발전해갈 것이다. 그리고 절대 광고로 만들어질 리는 없지만, 연인이 된 두 사람이 죽도록 싸우다가 결국은 웬수가 되어 헤어진 뒤, 나영이는 “나쁜 X”으로, 지훈 씨는 “죽일 X”으로 변신할지도 모른다. 아, 나쁜 상상은 하지 말아야지, 내가 나쁜 년이야, 쿵쿵쿵.

 

그래도 보이시나요, 헤피엔딩이라는 표지판

 

지나고 보면 그때가 최고의 시기였고, 다시 돌아가고픈 그리움도 생기곤 한다. 그 사람이 보고 싶고, 보게 되면 즐겁지만, 도대체 이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을 때. 잠잘 때는 죽은 듯이 기절해서 절대로 전화를 받지 않던 내가 새벽 세 시에 울리는 전화벨 한 번에 번쩍 눈이 떠졌던 그때, 두 사람의 감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고 있을 때, 우리는 전력질주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달리던 두 사람이 ‘우리는 연인’이라고 세상에 천명한 뒤 두 손을 잡게 되면, 그때부터 보폭을 맞춰 조금은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달려온 것이긴 하지만, 문득 예전의 전력질주가 그리울 때도 있다. 도대체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 관계가 어떤 것인지 몰라 고민했던 그때에, 우리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참 열심이었지 않았나. 물론 이것도 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난 사람의 배부른 소리인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나에게 저 사람이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하는 동안은 행복하지만, 저 사람에게 내가 어떤 존재일까, 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고통이 시작되는 거라고. 알고 보면 모든 ‘만남’이, 모든 ‘감정’이 해피엔딩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으로 남은 사람도 없지는 않다. ‘관계’는 단수지만, 사람은 복수이기 때문에 질문은 하나로 끝날 수 없는 법이다. 지독할 정도로 괜찮은 척하는 성격 탓에 차마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혹독한 추위를 맞아 최고의 맛을 내고 있는 소주 한 병에 그놈의 고집도 무장해제가 되면, 가끔은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는데, 너에게로 간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된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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