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급 ☆...남색 글씨라도 읽어 주세요.
1 대 동명성왕(B.C 58~B.C19 , 재위 B.C 37~ B.C 19): 고구려의 시조. 이름은 주몽, 추모, 중해 등으로 불린다.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활의 달인이었다. 졸본 계루부의 소서노와 결혼하여 고구려의 기반을 쌓고 주변의 비류, 관나, 연나, 환나 등을 통합하여 국가의 틀을 이루었다. B.C 19년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내려오자 그에게 보위를 넘겨줬다. 묘는 졸본성에 있으며 고구려 제천행사 때 모시는 수호신이 되었다.
3대 대무신왕(4~44 , 재위 18~44): 유리왕의 셋째왕자. 이름은 무휼. 유리왕이 도절과 해명태자를 죽임으로서 황태자가 되었다. 즉위 초부터 부여를 공략할 준비를 하였고 즉위 5년 만에 부여를 공략하여 부여왕 대소를 죽인다. 왕명은 '대무신(大武神)'은 '위대한 무예의 신'이란 뜻이다.
6 대 태조태왕(47~165 , 재위 53~146): 본명은 '궁'이며 두로가 폭군 모본왕을 제거함으로서 7세에 황제가 된다. 94년간의 오랜 재위기간동안 고구려를 안정시켰고 계루부 고씨의 왕위세습으로 왕권 강화, 중앙집권체제 확립 등 고구려가 대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영토는 동으로 연해주, 북으로 송화강 상류, 서로 대흥안령산맥, 남으로 현재의 상해까지 이르는 대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90대 후반에 병을 얻어 100세때 동생 수성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황으로 지내다가 165년 119세에 향수한다.
15 대 미천태왕(281~331 , 재위 300~331): 본명은 '을불', 293년 황제인 봉상왕(14대)가 아버지 돌고를 죽이자 13세의 나이로 궁을 빠져나와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그 후 머슴, 장사꾼, 거지 등의 민간인 생활을 하다가 300년 국부(신하 중 으뜸) '창조리'가 폭군 '봉상왕'을 죽임으로서 황제가 된다. 그는 서쪽의 연(전연-5호 16국 중 선비족이 세운 나라)을 격파하고 고구려를 부흥시켰다. 또한 젊은 시절 백성과 함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민심안정에도 크게 신경을 써서 성군으로 불리고 있다. 묘는 미천 언덕에 있어서 '미천태왕'라 한다.
17 대 소수림왕(?~384 , 재위 371~384): 미천태왕의 손자이며 고국원왕의 장자. 이름은 '구부'이다. 아버지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죽음을 당해서 백제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제를 치기 위해서 백제를 제외한 주변국과 친선을 하였고 전진(前秦)과 동진(東晋)에서 불교를 수용하여 국가를 통합하고 태학을 세워 인재를 육성했고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재해가 닥침으로서 병을 얻어 백제정벌의 꿈을 뒤로하고 384년 숨을 거두었다. 묘는 '소수림'에 있어서 '소수림왕'라 한다.
19 대 광개토호태왕(375~413 , 재위 391~413):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황제. 연호를 '영락'이라 했기 때문에 '영락태제'로도 불린다. 391년 17살에 황제가 되어 할아버지(고국원왕)의 원수인 백제와 연(후연)에 복수를 하기 위하여 군대를 키운다. 항상 전장에서 앞장서서 싸웠고 백제의 한성을 점령하여 백제의 세력을 '아리수(한강)' 이남으로 축소시켰고, 후연의 수도 조양을 점령하고 '계(북경)'까지 진군하였다. 신라에 쳐들어온 가야군과 왜를 물리쳐서 신라와는 친선을 맺는다. 활발한 정복활동을 함과 동시에 나라도 안정적으로 다스려 반란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후 아들 장수태왕이 '호태왕비'를 세워 업적을 기렸다. 정식 황명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흔히 '광개토대왕'으로 알고 있는데 '대왕'은 일제시대 우리민족의 레벨을 낮추기 위해 일본인들이 쓰게한 말이며 고구려 황제는 태왕을 쓰는 것이 옳다.
20 대 장수태왕(394~491 , 재위 413~491): 이름은 '거련'. 광개토호태왕의 장남이다. 20세에 황위에 오른 후 78년간 나라를 평안히 다스렸다.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 후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였고 신라의 왕족 보해를 귀환시킴으로서 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북위와 동맹을 맺고 중국 남조의 송나라와도 화친하여 중국과 관계를 안정화시켰다. '호태왕비'를 세워 '광개토호태왕'의 업적을 기렸고 신라를 지원하여 백제를 견제하였다. 491년 98세로 향수했다. 사후 '장군총'이라 불리는 무덤에 묻혔다.
21 대 문자명왕(?~519 , 재위 491~519): 장수태왕의 손자이며 조다의 아들이다. 이름은 '나운'. 부여를 멸망시키고 말갈을 복속시켰다. 북위와 남조의 양나라와 화친하였으며 내정에 충실하여 '명치호왕(明治好王-현명한 정치를한 좋은 왕)'이라는 시호도 붙었다. 
26 대 영양태왕(?~618 , 재위 590~618): 평원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원'이다.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신집'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하도록 하여 자주성을 드러냈으며 총 4차에 걸친 수나라의 침략을 막았으며 수나라의 몰락을 야기시켰다. 특히 그 중에 2차 대전이었던 살수대첩은 대수나라 전쟁의 백미로 꼽힌다. 그의 대수나라 전쟁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전으로 남아있다.
---------------참고문헌: 고구려 본기(박영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