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보고서를 이제사 올립니다. 일요일 오후, 누군가가 당원들을 기득권이라고 한 말에 하루종일 마음이 답답하고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월요일 오전에 서둘러 서울로 올라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기자들과 이야기를 가볍게 나눈 내용이 녹음되었더군요. 결과가 어떠하건 당원들의 분노하는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판이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1.21 보고서
1.
원래는 청주 일정을 마친 후에 옥천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오한흥 전 대표님 댁을 방문해 조그마한 황토방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는데,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집안에 상(喪)을 당해서 밤새 남해를 다녀왔습니다. 그 바람에 이른 새벽에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 도착해서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았습니다. 대표직을 자진해서 물러나고 잠시 쉬는 기간에 손수 지었다는 황토방의 구들장은 그때까지도 뜨끈했습니다.
은 서울의 ‘조중동’과 같은 거대한 일간신문사도 아니고, MBC나 KBS와 같은 방송에 비하면 영향력도 미미합니다. 한마디로 시골동네의 지역신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조차 ‘조중동’에 밀려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척박한 옥천에서 은 창간 10년만에 중앙일간지를 포함해서 지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신문으로 성장했습니다. 인구 6만도 채 안 되는 옥천에서 계도지나 관공서 홍보광고를 거절하면서도 3500부가 넘는 유가부수를 자랑합니다. 게다가 국내에서 당당하게 발행부수를 공개하는 몇 안 되는 신문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은 보수성향의 지역에서 언론개혁의 깃발을 꽂아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의 친일전력 등을 집요하게 보도하였고, 이를 통해 의 반민족적인 죄악을 낱낱이 파헤쳐냈습니다. 지역신문으로선 하기 힘든 일이었음에도 큰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이른바 '옥천전투'로 불리는 의 '발칙한 거사'는 국내 풀뿌리신문의 발달사에서 하나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오한흥 님. 의 대표를 지냈고, 현재는 의 대표입니다. 저 역시 대표를 지낸 적이 있기에 공통분모가 많은 사이입니다. 사무실이 있는 여의도 이웃이라 가끔씩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만 시골집에서 무릎을 맞대니 느낌이 남달랐습니다. 짧은 시간임에도 너무나 많은 말들이 쏙쏙 귓가에 박혔습니다. 참으로 주옥같은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짧게나마 하나하나 음미해보고 싶습니다.
-개혁세력이 다들 절망에 빠져있는데, 나는 오히려 희망적이어서 걱정이다. 무슨 뚱딴지냐고? 그건 간단하다. 예를 들어, 천연기념물인 수달을 찍으려고 갔다가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면 돌아와서 다들 수달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수달이 멸종된 건 아니지 않는가. 다만 우리가 그걸 보지 못할 뿐이다.
-지금 이 시각 누구는 정말로 불안할 것이다. 바로 오늘이 대통령선거 투표일이었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그는 불안하다. 마라톤에 비하면 자꾸 뒤돌아보는 것과 같다. 누군가가 따라올까 봐 초조한 것이다. 그러면 레이스 막바지에 추월당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상대방은 바닥치기를 하고 있지만 절대 늦은 건 아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기에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것이다. 때문에 대역전극을 펼칠 수 있다. 그래서 아직은 희망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난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의 거대여당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열심히 노력한 결과에 의한 것인가? 아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성적 잘 나온 학생과 같다. 그런 학생은 가장 중요한 시험인 학력고사에서는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열린우리당의 현재 모습도 그 때문이다. 현재 상태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붕에서 비가 새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붕에 올라가서 새로 이거나 뜯어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방 안에 앉아서 물받이만 받치면 결국 이불만 다 젖게 된다.
-부모가 중환자실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한다고 치자. 그러면 산소 호흡기를 꽂자는 자식도 있고, 가망이 없으니 빼자는 자식도 있다. 그 둘 중에 누가 효자인가. 내가 보기에는 둘 다 효자다. 그걸 인정해주어야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학자적 양심만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상인적 양심이나 정치인적 양심은 왜 음모적이고 정략적이라고 매도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의에 대한 야당의 논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노무현 대통령의 ‘풍차돌리기’가 시작되었다. 레슬링 기술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다. 불행히도 모 유력인사의 경우 겨우 한 바퀴 돌림당하고 나서 항복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면이 거친 숫돌이 잘 갈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고급 일식집 주방장은 면이 부드러운 숫돌을 사용한다. 게다가 그 숫돌을 물에 담갔다가 사용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칼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가죽이다. 어릴 때 기억을 되살려보자. 이발소에서는 숫돌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가죽을 사용했다. 그런 면에서 어찌 보면 ‘가죽’이 ‘숫돌’보다 강할 수 있다. 정말로 칼을 날카롭게 하는 것은 가죽이다.
미처 여기에 다 싣지 못하는 말씀들은 제 속에 감춰두고 강연이나 토론 기회에 이용하겠습니다. 마침 방에 걸린 액자의 글이 마침 ‘희망대장정’을 다니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과 통하기에 소개할까 합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2.
옥천에서 지역인사들과 조찬을 한 후에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향했습니다. 바로 조선총독부를 향해서는 고개를 숙일 수가 없기에 그 쪽이면 세수할 때도 허리와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는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단재 선생에 대해서는 다들 아실 겁니다. 독립운동가이고, 등을 지은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습니다. 단재 선생은 1910년 을사늑약이 맺어진 후 중국으로 망명을 가면서 필사본을 짊어지고 갔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에서 역사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했던 분입니다. 망명의 고달픔 속에서도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지를 탐사하고는 등을 집필했습니다. 그때 이미 한민족의 발원지로서 만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셨던 분입니다. 해방 뒤 우리 사학계가 식민사관이 아닌 단재 선생의 민족주의 사학을 제대로 전수했다면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은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무국적자’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장’을 받았음에도 말도 안 되는 ‘법’ 때문에 선생은 그에 합당한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단재 선생의 묘는 그야말로 작고 초라했습니다. 게다가 정식 묘가 아닌 가묘(假廟)로 있었습니다. 작은 사당과 기념관은 있었지만 그 분의 업적에 비하면 예우랄 것까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신채호 선생이 무국적자라서 그렇다니, 더욱 충격적이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제는 우리나라를 일본법으로 지배하기 위해 ‘조선민사령’이라는 법을 제정하고 호적을 바꾸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행법으론 그 전에 돌아가신 분들의 국적은 무국적자로 남게 됐습니다.
때문에 신채호 선생의 아드님도 호적조차 없는 사생아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손들은 공부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해 부두노동자와 고철장사 등을 했다고 합니다.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땅 찾기 소송을 하고 떵떵거리며 사는데, 그에 비하면 실로 할 말을 잊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E. H. 카의 , 아놀드 토인비의 에 대해서는 다들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역사학 상식인 단재 선생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대결’에 대해서도 더욱더 가슴에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참배를 드리며 속으로 용서를 구하고 구했습니다. 자주와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가 산적해 있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질문에 대한 절실한 교훈을 새겼습니다.
끝으로, 일정에 동행해 가르침을 주신 (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조종원 상임이사님과 신승우 이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맛있는 청국장을 끓여 점심을 대접해주신 귀래리 안병태 이장님께는 1,500마리의 돼지가 3,000마리, 10,000마리로 번창하시라는 덕담으로 고마움을 대신 전합니다.
2007년 1월 21일
청원에서 김 두 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