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신각라(愛新覺羅)와 청나라 황실
계공(치공, 1912. 7. 26 - 2005. 6. 30)선생은 근세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서예가이다.
그리고, 그는 청나라 황실의 후예이다.
그가 청나라의 황실과 애신각라씨에 관해서 적은 글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만주족의 성은 매우 많다. 만주어로는 성씨를 '하라'라고 한다.
많은 만주어 성은 모두 대응하는 한족성이 있다.
예를 들어 완안씨(完顔氏)는 금나라때부터 이어져온 성씨인데 음역으로 한 한어성은 왕(王)이다. 과이가(瓜爾佳)씨는 음역으로 한 한어성이 관(關)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왕씨성을 가진 사람, 관씨성을 가진 사람은 완안씨와 과이가씨의 후예들이다.
물론, 더 많은 한족들이 그 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이것도 민족융합의 하나의 표현이다.
나는 일찍이 라는 글을 쓴 바 있고
2002년 제4기에 게재되었으며, 이에 관한 내용을 전문적을 언급했었다.
나는 계공이라고 불리니 성이 계이고 이름이 공이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은 성이 애신각라이고 이름이 계공인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쓰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표기방식에 따라 애신각라와 계공 사이에 점을 찍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를 "김계공(金啓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애신각라씨들은 청나라가 망한 후 대부분 한족성을 따라 김(金)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계공의 집안에서는 이것은 원수인 원세개가 시킨 것이니 따를 수 없다고 하여
김(金)성으로 바꾸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명확히 해야겠다.
'애신(아이신)'은 여진어이고, 성이다. 금나라때부터 있던 것이다.
뜻으로 본다면 '금(金)'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각라(줴뤄)'라는 두 글자는 없었다.
'각라'는 만주어 jir의 음역이다. 원래는 다른 뜻이 있었다.
청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부친인 타커스(塔克世)를 대종으로 하여
그의 후손들은 '종실'이라고 부르고 황금색 허리띠를 하였다.
이에 따라 세간에서 '황금허리띠를 두른 사람(黃帶子)'라고 불렀다.
타커스은 부친 줴창안(角昌安)에게서 여섯 명의 형제가 있고 이들은 보통 육조(六祖)라고 부르며,
타커스의 직계가 아닌 방계후손들을 각라(覺羅)라고 불렀고 붉은 허리띠를 하였으며
그 후손들을 "붉은 허리띠를 두른 사람(紅帶子)"라고 불렀다.
이들 '종실' 사람(각라)들은 황실에서 관리하였으며 정치경제적으로 특권을 누렸고,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청나라때 이 '각라'를 성의 뒤에 붙였는데, 예를 들어 유명한 작가인 노사(老舍)선생의 원래 성은
서서(舒舒)씨였다. 나중에 '각라'를 붙여 '서서각라'가 되었다.
그러나, 노사선생은 서서중 첫번째 서를 따서 본인의 성씨로 하고,
두번째 서(舒)를 사(舍)와 여(予)로 나누어 자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즉, 서사여(舒舍予)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라'를 '애신'의 뒤에 붙여 '애신각라'가 된 것이고 이것이 한 씨족의 성으로 되었다. 즉, 원래 이 성은 없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고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라'는 '종실'이라는 의미가 있고,
단지 '대종(누르하치의 직계후예)' 이외의 종실을 의미할 뿐이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다시 이 각라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성씨 본래의 발생이나 변화에 비추어 보는 것이,
내가 애신각라를 성으로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 이유이다.
현재 많은 애신각라씨는 자기의 성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성을 애신각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불러주고자 하며, 이것이 그에 대한 일종의 존중으로 보고 있다.
이건 실제로 의미없는 일이다.
신해혁명시에 일찌기 "구제단로, 회복중화(驅除단虜, 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쳤고,
이것이 성공한 후에는 만주족들은 스스로 만주족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그 황족들도 자신이 스스로 애신각라씨라고 말하는 걸 꺼렸다.
나중에 당국자들은 이 구호가 나무 국한성을 지닌 것을 알고는
"오족공영(五族共榮)"을 외치며 상황은 좀 나아졌다.
그러나 해방후에 애신씨들은 여전히 자신이 애신각라씨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이미 멸망한 구사회, 구세력으로 대하고 예전의 좋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이르러, 자기의 성이 애신각라라고 말하는 것자체가 스스로를 봉건제도의 쓰레기나
우귀사신이라고 말하는 것이어서, 사람들마다 피하고 언급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후에 민족정책을 실시하며 더 이상 소수민족을 차별하지 않게 되고,
심지어 소수민족을 우대하게 되었다.
이 때 다시 애신각라라는 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들어주고...
나는 이건 정말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통속적인 말로 한다면, '재미없다' 사실로 보면 애신각라가 만일 진짜 하나의 성이라면
그것이 영광스러울 때도 좋고, 욕될 때도 좋다.
완전히 정치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이것이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그리고 그걸 끌어안고 즐거워할 것인가?
이것은 내가 감정적으로 애신각라를 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이다.
나는 옹정황제의 제9대손이다.
옹정의 넷째아들은 홍력이고 그는 황위를 이었으며 바로 건륭황제이다.
옹정의 다섯째 아들은 홍주(弘晝)이고, 홍력보다 1시진정도 늦게 태어났다.
당연히 모친이 다른 이복형제이다.
건륭은 즉위후 홍주를 화친왕(和親王)에 봉한다. 우리는 바로 이 화친왕의 후대이다.
홍자배의 아래 항렬은 영(永), 면(綿), 혁(奕), 재(載), 부(溥), 육(毓), 항(恒), 계(啓)이다.
영, 면, 혁, 재의 네 글자는 건륭황제가 태후에게 바친 싯귀에서 따왔다.
"영면혁재봉자위(永綿奕載奉慈위)"에서 온 것이다.
혁은 높고 아름답다는 의미이며, 전체의 의미는 영원이 길이길이 아름다운세월을
자상한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겠다는 것이다.
부, 육, 항, 계의 네개자는 나중에 이은 것으로 특별한 근거는 없다.
우리 이 집안이 제1대를 옹정황제로 한다면,
제2대는 옹정의 다섯째 다들 화친왕 홍주이다.
제3대는 영벽(永璧)이다. 그는 화친왕 홍주의 둘째아들이고 여전히 화친왕을 세습하였다.
같은 배분으로 넷째아들, 여섯째 아들 영환, 일곱째 아들 영곤등이 있다.
제4대는 면순(綿循)이다. 그는 영벽의 둘째아들이다. 여전히 왕의 작위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화친왕에서 군왕으로 등급이 내려간다.
제5대는 혁형(奕亨)이다. 그는 면순의 셋째아들이다.
이미 등급이 패륵으로 내려가고, 보국장국에 봉해진다.
같은 항렬에는 넷째아들 혁총, 여섯째 아들 혁근, 아홉째 아들 혁예등이 있다.
규정에 따르면 종실의 관직은 무관의 관직을 받는다.
청나라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송나라, 명나라때도 마차가지였다.
예를 들어 송나라때는 높은 등급으로는 절도사를 받고 그 아래는 방어사를 받았는데
모두 무직이다. 명나라때에는 팔대산인 주용이 종실로 무직을 받았다.
혁형의 대이후로 우리 집안은 모두 장군으로 봉해졌지만, 이것은 허직(虛職)일 뿐이다.
제6대는 나의 고조할아버지인 재숭(載崇)이다. 그는 혁형의 다섯째 아들이다.
측실 소생이었으므로, 지반에서 갈라져 분가하였을 뿐아니라, 작위도 더욱 내려가서
겨우 1등보국장군일 뿐이었다. 같은 항렬로는 넷째 아들 재용등이 있다.
제7대에는 나의 증조할아버지인 부량(溥良)이다. 그는 재숭의 둘째 아들이다.
형제는 두 명이 더 있었고, 작위는 다시 내려가서 봉국장군에 봉해졌을 뿐이다.
그의 형은 부선이고 나의 큰증조할아버지이고, 동생은 부흥으로 나의 셋째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모두 봉국장군을 받았다.
제8대는 나의 할아버지인 육륭(毓隆)이다. 부량의 큰 아들이다.
모두 다섯 자식을 두었는데, 둘째 할아버지는 육성이고, 셋째, 넷째 할아버지는 요절하였다.
다섯째 할아버지는 육후인데, 나의 큰증조할아버지에게 양자로 가서 대를 이었다.
제9대는 나의 아버지인 항동(恒同)이다. 독자였다
애신각라(愛新覺羅)의 비밀
조용한 재판장 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주목하고 있다.
판사가 젊은이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젊은이는 대답한다. "아이신지료 푸이(愛新覺羅 傅儀)."
판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참 이상한 성이구나."
이것은 유명한 영화 '마지막 황제'의 한 장면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성은 아이신지료(愛新覺羅), 한글로 읽으면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라..과연 애신각라란 성은 무슨 뜻일까?
바로 애각신라(愛覺新羅)..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신라? 신라라면 삼국시대의 그 신라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럴지도 모르겠다'이다.
바로 청나라의 황실이 신라황실의 먼 후손이라는 기록이 여럿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淸)나라의 원래 이름은 후금(後金)이다.
당초 청의 시조 누르하치가 나라를 건국했을때의 이름은 후금으로,
이는 예전에 번성했던 금(金)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다.
금나라라? 이는 다르게 읽으면 김나라라고 읽을수도 있다.
왜 나라 이름을 김이라고 했을까?
김(金)은 바로 신라 왕족의 성씨이다.
바로 금나라의 건국자였던 아골타가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 금사 ] " 금의 시조는 함보이며, 본래 고려에서 나왔고, 그 때 나이 60세였다 "
[ 송막기문 ] "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
[ 만주원류고 ]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
[ 고려사 ] "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금나라의 조상이다 "
이런 역사서의 증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 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즉, 금나라의 시조가 부안 김씨의 다른 일파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금나라와 그 뒤를 이은 청나라는 신라의 일파가 세운 나라고,
이는 그들이 곧 우리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사대사상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만 치부했던 조선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청나라는 그들이 조선과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어느 정도는 있었던듯 하다.
누르하치는 조선을 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 한수이북은 자신의 선조가 태어난 땅 " 이라 말하였고,
삼전도 항복 때는 " 본래 우리는 고려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거늘 어찌하여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 하였으며,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누루하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조선왕에게 보내기도 한다.
"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
물론 이러한 근거들만으로 애신각라가 '신라를 생각하라'라는 의미이고
청나라가 신라의 후예라고 단정짓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만주어로 아이신은 '금'이라는 뜻이고, 줴러는 '성 姓'이라는 뜻으로
애신각라 즉 아이신줴러는 단순히 금씨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는 김씨의 후예라는 뜻으로 해석될수도 있지만, 그냥 금나라의 후예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이 틀렸다는 주장도 있다.
청나라 황실의 성은 원래 金이라는 뜻의 애신(愛新)인데, 이는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타커스의
직계 후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다른 방계후손들은 따로 각라(覺羅)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에 이 둘을 붙여 성을 애신각라라고 하였고 각라는 신라를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타커스 직계외의 '종실'을 의미하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청나라 황제는 신라 마지막 왕자의 후손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라는 중국의 억지가 10년만의 폭염으로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한국의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부흥했던 나라는 모두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토록 가볍다. 그러나 섬뜩하게 위험하다.
'섬뜩하게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노리는 것이 단지 고구려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은 상당 부분 한반도 북부와 동북아시아로 고구려와 비슷하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면 고조선도 중국사인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를 박탈당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신라 건국 이후 2천년으로,
강역은 한강 이남으로 좁혀질 것이다.
심지어 중국의 현재 논리를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백제도 한국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중국인'이라는,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엄격히 말하면 후금(후금은 청나라의 전신)이다.
후금을 세운 사람은 누루하치. 그런데 그의 성은 '애신각라'이다.
이 신기한 조합의 한자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않는다 '는 의미라고 한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인들의 '근원'을 살펴 보면 신라와 관련된 성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을 가진다.
[금나라의 금(金)은 신라왕실의 성씨인 김(金) ]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뜻한다.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의 겨레' 혹은 '금, 밝음을 숭상하는 겨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청나라 왕조의 성에 '신라'와, 신라 왕족의 성인 '금(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청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었지요.
역사연구단체 한배달의 오정윤 연구원은 먼저 청나라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긴 예를 들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 청나라의 도움을 거절.)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 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 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고 전한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 라고 주장한다.
-------------------------------------------------------------
즉 청나라는 신라의 후손이자 우리역사의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