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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막장에서 큰형님을 만났습니다.

김두관 |2007.02.04 00:35
조회 29 |추천 0
새벽 6시, 광부경력 18년째인 강홍일 님과 함께 눈을 떴습니다. 지난 밤 부인과 아들 둘과 함께 사는 장성광업소 사택 14평 좁은 아파트에서 동숙(同宿)을 한 사이였습니다. 막장 안에 동행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한 것도 모자라 맛깔스런 아침까지 대접받았습니다.

장성광업소에 도착해서 안전교육을 받은 후에 강홍일 님으로부터 팬티까지 벗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팬티까지 벗기는 정말 뭐했습니다. 거무튀튀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안전모를 쓰고, 장화를 신을 때까지만 해도 설렘보다는 호기심이 앞섰습니다.

솔직히 방송을 통해 석탄을 캐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자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낭만적인 공상임을 깨닫는 건 순간이었습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게 흩날리는 먼지, 질척거리는 바닥, 거기다가 이따금씩 들려오는 발파소리와 말발굽 소리와 같은 석탄 구르는 울림은 공포감마저 가져다주었습니다. 해발 600미터에 위치한 장성탄광 입구에서 900미터를 수직으로 내려가고, 또 인차(人車)를 타고 2킬로미터가 넘는 갱도를 들어가서 다시 20여 미터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어른 가슴높이의 갱도를 기어들어가서야 막장과 맞닥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엔 저의 안전모와 다른 분들이 쓴 안전모의 색깔의 차이를 보면서 조금은 걱정을 놓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가파른 간이계단을 접하는 순간 그제야 조금 당황스럽기 시작했습니다. 앞사람이 지고 가는 박스가 무슨 간식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다이너마이트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막장이 무서워졌습니다.

어느 순간 열기가 확 얼굴을 때렸습니다. 더불어 시커먼 먼지가 눈을 가려 한 발 앞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삽자루가 손에 쥐어졌습니다. 바닥은 질척거려 중심을 잡기도 어려운데, 캐낸 석탄을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 실으라는 것입니다. 삽질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이내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 몫을 해야 했기에 ‘체험광부’라고 봐주는 법은 없었습니다.

곧이어 갱목이 들어왔습니다. 기초공사는 철제 H빔으로 시공하지만 그 사이 사이를 매우는 건 나무로 하기 때문입니다. 갱목은 무겁지 않았습니다만 가슴높이의 갱을 통과하는 일은 정말 곤욕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몸이 작기나 해야 꼼수를 부려도 부려볼 텐데…….

긴 드릴로 석탄 덩어리에 구멍을 뚫는 모습은 방송에서 보는 탄광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지하 900미터 막장 안에서 그 모습을 보니 은근히 저도 직접 해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저 구경만 해야 했습니다. 드릴로 구멍을 뚫은 다음에는 폭약을 넣고 폭발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잠시 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탄가루는 저의 땀과 뒤범벅이 되어 겉옷마저 완전히 적시고야 말았습니다.

탄가루가 점점 많이 날리자 쓰고 있던 마스크가 점점 더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1시간 이상 있는 것 자체가 답답한 일인데, 그 많은 먼지를 걸러내다 보니 마스크 구멍이 조금씩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들어간 일행 중 한 사람은 폐쇄공포증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계단 위 조금 큰 갱도까지 나갔다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들어올 때는 그곳도 먼지투성이였는데, 잠시 나가보니 거기는 천국이 따로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힘든 일이라 그런지 배도 빨리 고파졌습니다. 점심은 막장에서 20미터 정도 올라간 계단 위 갱도에서 먹었습니다. 막장을 경험해 보면 우리 사는 세상이 천국처럼 느껴진다더니, 제게는 한 계단 위가 천국이었습니다. 처음 들어올 땐 그저 지저분하고 먼지 많은 갱도였지만 그때는 초장 위의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도시락이 입에 착착 달라붙었습니다.

광산을 찾은 정치인은 한둘이 아니라는 말끝에, 그래도 막장까지 들어와 몇 시간씩 석탄을 캐고 갱목도 나른 사람은 아직 못 봤다는 덕담 아닌 덕담을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갱도 안에서 함께 도시락을 먹은 정치인은 제가 처음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송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초보자인 저로 인해 작업이 늦어진다는 얘기를 듣기가 민망했습니다. 생산량에 따라 월급봉투가 달라지는 ‘동료광부’로서는 당연한 불만(?)이었을 겁니다. 때문에 예정했던 여덟 시간을 다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침 7시에 입고 오후 2시에 벗은 작업복에 묻은 땀은 간직할 수만 있다면 고이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광업소를 나와서는 곧바로 태백중앙병원을 찾았습니다. 580여 명의 입원환자 중 380명이 진폐환자였습니다. 대부분 60대 이상으로, 최소 10년 이상 광부로 일했던 분들입니다. 매주 한 건 이상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또 그만큼의 진폐증 환자가 입원을 한다고 합니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한마디 하소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분들 앞에서 저 또한 쉽게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해가 떨어진 후에는 함께 입갱했던 광부들과 동료들, 그리고 태백의 시민운동가들과 태백중앙시장 작은 음식점에서 만났습니다. 김치찌개와 족발을 안주 삼아 희망대장정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얼큰히 취할 정도로 소주를 마셨습니다.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가슴속 답답함과 죄스러움을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허전해서 허름한 실비 집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다 같이 어깨를 걸고 노래도 한 곡 불렀습니다. 였습니다. 그 순간만은 나이가 많든 적든 그분들 모두가 ‘큰형님’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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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태어난 이 광산에 광부가 되어
탄 캐고 동발 맨 지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광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광부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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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태백에서 광산 지역의 삶을 알아보고 짧은 광부 체험을 하고서 이렇더라 저렇더라 구구절절이 아는 체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사적인 고백을 한 가지 하고자 합니다. 사실 태백에 머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감격스러웠고, 고마웠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6남매 중 다섯째인 저와는 열 살 터울인 큰형님 때문이었습니다.

큰형님은 광부였습니다. 30년 전 장성광업소 옆 도계탄광에서 광부로 일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이 큰형님을 광부로 만든 것입니다. 당시 독일에 광부로 가기 위해서는 탄광에서 일한 경력이 필요했습니다. 큰형님은 도계탄광에서 꼬박 2년을 근무하고 독일에 가서 광부로 5년 동안 일했습니다.

지금은 캐낸 무연탄을 컨베이어벨트로 나르지만 당시에는 질통을 지고 날랐을 겁니다. 요즘은 가벼운 전등으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몇 배 더 무거운 배터리전등을 허리에 차고 일했을 겁니다. 안전모에 붙은 전등을 켜도 잘 보이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전등을 달고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0시간, 12시간 이상을 일했을 겁니다. 작업복이며 안전도구 등 근로조건 또한 지금과는 천양지차였을 겁니다. 못난 동생은 그 당시 큰형님이 겪었던 고생스러움의 겨우 만분의 1을 30년 후에야 경험하고는 격정에 잠겨 오래도록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2007년 2월 2일

희망대장정 19일째 되는 날 태백에서 김 두 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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