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연재소설] 지구인이면 OK- 7,8: 사람들의 오라

박가애 |2007.02.13 04:11
조회 21 |추천 0

[7화 : 라파엘의 꿈]


“가은씨, 방금 나를 인정해주었군요?
내가 나를 모르는 사람이어도 상관없다고, 내가 어디서 온 사람이건 상관없다고.
그렇죠?”

6월의 미루나무 잎사귀 정도가 아니라,
8월 한여름의 짙푸른 녹빛을 한 라파엘의 눈동자가 가은을 내려다보며 반짝였다.

“아니, 그걸 어떻게…?”

마음을 읽힌 가은은 놀라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까도, 그리고 지금도, 당신의 마음이 내게 그대로 전해졌어요.
당신의 기쁨도, 당신의 슬픔도…. 가은씨는, 그렇지 않은가요?”

“난, 당신만큼은 아니에요. 난 그저 당신의 표정이나, 눈빛을 보고….
이걸 봐요, 라파엘. 지금 당신의 눈동자는 초록색이에요.”

가은은 방에 걸린 작은 거울 앞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아, 정말…. 내겐 가은씨의 마음의 색깔이 보이고,

가은씨에겐 내 눈동자의 색깔이 보이는군요.”

“ㅎㅎ 라파엘, 물론 눈동자가 초록색이거나 파란 색인 사람들도 있긴 해요.
하지만 당신처럼 이렇게 수시로 눈동자 색깔이 변하는 사람은 없다구요.
사람들이 알면 아홉시 뉴스에 내보내려고 할 걸요?”

“걱정 말아요. 이렇게 하면 되니까…….”

라파엘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함께 물결쳤다.

“이거 봐요. 머리카락도 이렇게 빨리 자라버리고…….

정말,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네, 기억이... 없어요. 그저, 내가 처음 본 사람이 가은씨라는 거.
그리고 티브이를 보기 전까지 이곳의 문명이 무척 낯설었다는 것.
내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이 변하는 게,

내겐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 정도에요.”

다시 밤색으로 변한 라파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은은 그가 정말로 외계인이라면 어쩌다가 지구에 오게 되었는지,
또 어쩌다가 그렇게 풀숲에 쓰러져 있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정말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왔다면, 분명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 그의 동료들도 서울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걸까?
라파엘이 온 곳의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착하고 아름답다면,
그 중 한명쯤 꽃미남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세양 언니가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가은은 살풋 웃으며 생각했다.

“아까, 꿈을 꾸었어요.
역시나 처음 보는 곳이었지만, 어쩐지 무척 그립고 익숙한 느낌이었어요.
그 곳에선, 가은씨와 내가 하듯이 이렇게 소리를 내서 말을 전하지 않았어요.
그 곳에선, 생각하는 것만으로 서로가 모든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쌀을 씻어 밥을 짓지 않아도, 생각만으로 음식이 생겨났어요.
물론,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나만은 어쩐지 생각으로 음식을 만들어내고, 그걸 먹는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나는, 그 곳에서 여기로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요.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아직은 모르겠지만요.”

말을 마친 라파엘은 가은은 바라보며 웃었다. 가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하는 말을 다 믿을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국어를 불과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익혀 버리고,
좋지도 않은 재료로 거의 완벽하게 전문가의 요리를 재현해내는 것도 이상했다.
가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 눈동자 색이 변해버리는 것, 그리고 이상한 꿈 이야기까지….

‘이 사람은, 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좀 더 힘이 있고 나이가 많고 돈이 있는 사람에게 발견되었더라면,
그에게도 좀 더 좋았을 텐데….

나는, 이 사람을 도울 여력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가은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가은씨는,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것만으로도, 난 가은씨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의 진심이, 투명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뭔가, 이유가 있겠지.’

가은은 생각을 돌려, 웃으며 말했다.

“갚을 수 없긴요, 라파엘이 나보다 훨씬 요리를 잘하니까
앞으로 요리 프로그램 보는 족족 전부 다 만들어주기에요~”

“네, 그럴게요.”

그의 정직한 밤색 눈동자가 웃는다.

“우리 나가요. 아까 어제 쓰러져 있던 장소 가보고 싶댔잖아요.”

막 해가 지려하고 있었다. 가은과 함께 집밖으로 나선 라파엘은 유심히 하늘을 바라보고
집과 도로와 땅을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가은이네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새 건물을 짓느라 한참 부산했다.

“여기선 집을 저렇게 지어요. 뭐 생각나는 것 있어요, 라파엘?”

“음…. 그 곳엔 비나 바람이 불지 않아요. 그래서 집도 필요가 없지요.
춥다거나, 더운 느낌 같은 건 없어요.
물론 그걸 경험하고 싶으면 생각만 하면 되지만,
추위나 더위를 경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으니까요.”

공사장을 바라보며 라파엘이 말했다.

‘일 년 내내 따뜻하기만 하다는 건가?

아니면 날씨를 개개인이 조절할 수 있다는 말…?’


가은은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

“어이, 김씨. 쉬었다 허자고.”

검은 피부에 수염을 기른 아저씨가 담배를 꺼내 물며 키가 자그마한 아저씨를 불렀다.

“갑자기 최 군이 일을 그만둬서 거시기허게 돼부러써.
그렇게 힘을 잘 쓰는 젊은 사람은 또 구하기가 쉽지 않은디 말이여.”

“그러게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도통 힘든 일을 안 하려고 하니까.”

가은은 라파엘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가 아저씨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는 건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요. 내가 라파엘을 발견한 곳.”

바위 근처도, 라파엘이 쓰러져 있던 풀숲도, 그다지 큰 변화는 없어보였다.

“별다른 건 없는데요. 달리 떨어져 있는 것도 없고….
어쩌죠? 실마리가 될 만한 게 하나도 없으니….”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가은이 말했다.

“아니에요. 여기 뭔가, 흔적이 있어요.”

라파엘이, 흙과 풀잎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 무슨 흔적이요?”

“가은씨도,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모두가 오라를 가지고 있어요.
몸의 건강상태, 그리고 기분에 따라 오라의 색은 시시각각 변하고,

그 폭이나 크기도 달라져요.
그리고 사람들이 만진 물건이나 지난 자리에는, 그 오라들이 남아있는데,
이 숲 근처엔, 그게 전부 사라져 있어요.
오늘 새벽에 누군가, 나를 찾아 이곳에 왔었어요.
그리고 그 전에 누군가, 여기 묻어 있는 가은씨와 나의 오라의 흔적을 지운 것 같아요.
어쩐지, 오라의 흔적이 지워진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네? 그럼 누군가 당신을 쫓는 사람이 있고, 또 그걸 막는 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놀란 표정으로 가은이 물었다.
무슨 서스펜스 SF판타지 드라마 속의 주인공도 아니고,

갑자기 등장한 라파엘의 존재도 믿기 힘든 판에 또 다른 존재들이라니?

“걱정 말아요. 가은씨. 가은씨에겐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에게두요.”

라파엘이, 두려움이 담긴 가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고 있자니, 가은은 어쩐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두려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가은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으므로.

가은은 라파엘과 함께 작은 시장을 둘러보았다.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젊은 주부들, 그리고 가끔 아저씨들까지,
가은과 함께 있는 라파엘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무척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외모구나.”

가은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구경하는 라파엘과 라파엘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교대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180센티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 하얀 피부, 그리스 조각 같은 섬세한 이목구비.
어느 새 또 자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굽이치는 곱슬머리…….
혼혈인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을 거라고, 가은은 생각했다.

“가은씨, 집에 먼저 돌아가 있을래요? 난 잠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시장 구경이 끝나갈 무렵, 라파엘이 가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해야 할 일이라니. 자기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걱정 말아요. 집에 돌아가는 길은 잘 알고 있으니까. 나, 머리 좋아요. ^^”

그를 구했다고 해서, 그의 모든 사생활을 간섭할 권리는 없다고, 가은은 생각했다.
조금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에서의 그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네, 그럼,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가은은 라파엘 덕분에 잊고 있던 보증금 생각이 떠올랐다.

‘추위에 쫓겨나지 않으려면, 별 수 없이 다시 일을 시작해야겠구나.

한 며칠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트 일 다시 하고, 밤에는 집에서 교정 교열 보는 일 좀 해야겠다.
아, 손에서 글을 놓은 지도 꽤 되었구나.
좋은 작품 쓰기로, 아버지랑 약속했었는데….’

가은이 마지막으로 결정한 전공은 국문과였다.

말없이 가은을 지켜봐주시던 아버지도,

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가은에게 어울리는 과라며 기뻐하였었다.
공을 들여 쓴 방송극본이 탈락하고 많이 위축되어 있을 때도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건 아버지였다. 조금 더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 반드시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며….

‘아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보증금만 만들면, 올해는 꼭 단막극 응모할게요.’

하나 둘, 별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은은 속으로 다짐했다.

‘라파엘은, 저 별 중,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자연스레, 라파엘을 생각하는 가은이었다.





[ 8화: 사람들의 오라 ]


가은이 집으로 돌아가고,

라파엘은 다시 한 번 찬찬히 시장을 걸으며 사람들과 시장의 풍경을 살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리고 생각이 물질화가 되는 속도가 너무나 느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꿈 속, 어쩐지 익숙한 그 장소에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그냥 생각하기만 하면 물질로 나타났다.

가고 싶은 장소가 있으면 생각만 하면 어느 새 그 장소에 가 있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행성의 사람들은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이라는 교환수단을 얻어야만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이동을 하려면 탈 것을 타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야만 했다.

그러면 그 사이에 시간이라는 것이 흘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어차피 홀로그램, 일종의 환영이었다.

꿈을 통해 라파엘은 알 수 있었다.

가은이 ‘라파엘’ 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존재 또한, 일종의 홀로그램, 환영이라는 것을.
자신은 어떤 목적에 의해 라파엘이라는 육체를 입고 이 행성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막강한 방해 세력에 의해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이 행성의 물질화 속도가 이토록 느린 것은 육체라는 자연의 장치 때문임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성인 남자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잠, 아픔, 치유, 음식을 먹는 것, 그리고 다른 육체와 포옹했을 때의 따스한 느낌….
불편하기는 하지만 또 한편 육체는 경이로운 기적이었다.
이렇게 생생한 느낌이 존재하다니. 이건 마치, 실제와 같았다.

그러나 이 행성의 사람들이 육체를 통하여 온갖 경험을 하고 있다고 하여도,
그들은 단지 육체에 속한 존재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영혼을 가진 존재였으며, 영혼을 존재하게 한, 바로 그 본질이었다.

가장 쉽게는 지나는 사람들의 색색가지 오라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 자신은, 그걸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시장의 물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옷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얼굴빛이 좋고 나쁨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자신의 오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가진 오라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현재 그의 기분이나 마음상태뿐만이 아니라,
신체의 어느 부분이 취약한지, 이 상태로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몸의 어느 부분에 병이 날 지까지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스스로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참으로 놀랍게도,
이 행성의 사람들은 온통 자신의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심장부분의 오라가 시커먼 보랏빛으로 멍이 든 여성이

옷가게에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슬픔은, 그런 식으로 달래질 것이 아니었다.

조용한 곳에 앉아 자신의 내면과 차분히 대화를 해 본다면 좋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충동구매를 함으로 심장의 통증을 잊어버리려고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심장부분의 시커먼 오라는 조금씩 더 몸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라파엘에게 그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돕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 또한 알고 있었다.
마음의 문은, 그 스스로 열기 전에는 그 누구도 대신 열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주인은 온전히 자신이므로,
모든 감정과 행동의 선택권은 100% 순간순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어둠에 가까운 선택으로 자신을 망치고 있었지만,
그것이 극에 달했을 때, 충실한 그녀의 도구인 몸이 그녀에게 위험신호를 보낼 것이다.
더 이상은 주인의 선택을 감당할 수 없노라고. 그러면 그녀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온전히 자신을 돌아보며 치유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녀의 경험이 그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음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무 것도 원망할 것이 없음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엔 좀 더 나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되겠지.
라파엘은 그녀의 여정에 안타까움과 또한 경이로움을 느끼며 옷가게 앞을 떠났다.

이 행성엔 어둠의 요소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오라에 멍 자국이 없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사랑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환경과 타인을 원망하며 스스로의 삶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라파엘의 마음은 무거웠다.
내가 저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가 있을까.
어둠의 체험이 극에 달하면 다시 밝음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굳이 어둠을 체험하고야 빛으로 돌아서려는 사람들의 여정이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웠다.

라파엘은 곰곰 생각에 잠겨 길을 걸었다.


*

“김씨, 이만 허이. 어느 새 해가 져버렸네 그려.

여튼 일을 하고 있자믄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께.”

검은 피부에 수염이 텁수룩한 이 반장이 자그마한 몸집에 바지런한 김씨를 불렀다.

“오늘도 수고혔어. 탁배기 한 사발 하러 갈꺼나?”

“아, 좋지요. 허허.”

김씨가 이 반장을 바라보며 즐겁다는 듯 껄껄 웃었다.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들의 오라는 건강한 파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라파엘의 마음도 덩달아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저 이 동네 사는 사람인데, 여기서 일을 좀 해보고 싶습니다.”

이반장이 유심히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옷차림도 그렇고 몸에서 귀티가 폴폴 풍기는 것이 육체노동을 할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덩치가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실하게 일을 해 낼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가 젊었을 때와는 달리 일을 하겠다고 와서 하루 이틀 일하고는 드러누워 버리는 약골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한 달 내내 일하는 젊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할 수 있겠능가? 보기보다 쉬운 일은 아니여.”

“걱정 마세요.”

라파엘은 싱긋 웃어보였다.

“그려, 그러믄 내일 아침 밥 든든히 먹고 아홉시까지 나오드라고.”

“예, 내일 뵙겠습니다.”

라파엘은 꾸벅 인사를 하고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거 참, 별난 사람이네요. 저런 몸으로 어디 일주일은 버티겠어요?”

김씨가 장갑을 탁탁 털며 이 반장에게 말했다.

“한번 지켜 보드라고. 저도 무슨 생각이 있겄지.

어디, 목포집 가서 한잘 할꺼나?”



*

한 편, 집으로 올라가던 가은은 교정 일을 구할 생각에 피시방에 들렀다.
국문과에 다니던 가은에게 컴퓨터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지만
예전과 달리 집에서 편안히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할 여력도 없었거니와
중고라도 백만 원을 호가하는 물건을 쉽게 장만할 수는 없었다.

“어디 보자. 교정 아르바이트.

나래 출판사에서 곧 출간 될 책, 교정 교열과 윤문 작업.
급한 사정으로 한 달간 일할 사람 급구.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고, 점심식사 제공에 시간당 칠천 원?
오, 이거 괜찮네?”


가은은 당장 이력서를 보냈다.
이력서라고 해보아야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가은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은 몇 줄 안 되었지만
정성을 다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서 나래 출판사 앞으로 보냈다.

보증금도 그렇고, 가은 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는 라파엘까지 함께 생활하려면

생활비가 두 배로 들 것이었다.
이력서를 보낸 가은은 어쩐지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일할 수만 있으면 힘든 마트일은 주중엔 안 해도 좋을지 모른다.

좋은 예감에, 집으로 향하는 가은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가은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꼭 3년 만에 흥얼거리는 콧노래였다.

“앗, 라파엘?”

“어, 가은씨!”

현관문을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가랑잎 같던 저 남자를 업고 들어 온 게 바로 어젯밤인데, 불과 하루가 지난 시간,
이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가은의 앞에 서 있다.

'불 꺼진 차가운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 이 아름답고 착한 사람, 나는 지금 그와 함께 내 집으로 돌아간다.'

가은의 마음은 뿌듯하고, 또 묘하게 설레고 있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