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가은이의 꿈 ]
방 안으로 돌아온 가은이 물었다.
“어디 다녀 온 거예요, 라파엘?”
“비밀~”
라파엘이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헉……. 윙크하는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순간순간, 모든 것에 너무나 빨리 익숙해지는 라파엘이 가은으로선 놀라울 뿐이었다.
“배고프죠, 가은씨? 내가 얼른 저녁상 차려 올게요.”
가은이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라파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싱긋이 웃고는 주방으로 향한다.
‘잘 거둔 남자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표어 패러디.
가은은 실소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의 자신은 꽤나 수다스럽고 우스갯소리도 잘하는 밝고 쾌활한 아가씨였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에요?”
가은이 싱크대며 작은 냉장고를 여닫느라 분주한 라파엘의 뒤에 서서 물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달걀찜이에요.”
“달걀찜? 그건 또 어디서 배웠어요?”
“가은씨 책장에 꽂혀있는 요리책에서요.”
이 남자, 요리 책은 또 언제 들여다 본 걸까.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가은을 기쁘게 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사람 같다.
내 힘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물 한잔 마실 수 없는 자취생활.
피곤한 밤에 들어와 요리하기가 귀찮아 그냥 쓰러져 잠들었던 밤이 얼마였던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가은은 생각했다.
“근데 왜 두 번째로 맛있는 달걀찜이에요?
이왕이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걸로 해 줘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가은씨가 만든 야채 죽이니까요.”
가은이 묻자, 당근을 썰던 라파엘이 뒤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는다.
진심 어린 맑은 눈동자.
듣기 좋으라고 라파엘이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저 눈동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가은은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들어가 있어요. 금방 될 거니까.”
라파엘이 부드럽게 가은의 등을 떠민다
“자아~ 다 됐어요. 어서 먹어봐요.”
저녁상을 앞에 둔 라파엘의 눈이 빛난다. 칭찬받기를 기다리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음…. 와! 맛있어요. 너무너무 부드럽고 고소해요.
당근이랑 양파가 씹히는 맛도 너무 좋고.
라파엘 원래 직업이 요리사였던 거 아니에요?”
가은은 진심으로 물었다. 라파엘은 말없이 그저 웃었다.
생각만 하면 물질이 창조되는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금은 그녀에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다만, 지금의 그녀에겐 휴식과 안정이 필요했다.
때가 되면,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 알게 되리라.
가은이 고집을 피워 또 함께 설거지를 하고, 둘은 나란히 앉아 티브이를 보았다.
때로 라파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가은이 지구의 풍습과 문화를 설명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던 중, 라파엘이 물었다.
“가은씨는, 저런 게 재미있어요?”
티브이에선 한 개그맨이 다른 개그맨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아…. 저건 그냥, 사람들을 웃기려고 둘이 미리 대사를 정하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 개그맨도 기분 상해하지는 않을 거예요.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웃어주면 더 기뻐할 걸요.”
“그럴까요?”
라파엘의 웃음이, 어쩐지 조금 어둡다.
가은은 그의 고운 마음이 너무나 예뻤지만,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세상은, 다 가은이 맘 같지 않았다.
가은이의 순수함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몹시 급하니 사정을 봐달라며 일을 시키고선 돈을 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혼자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다.
그래봐야 천성이 밝고 여린 가은으로선 작심삼일이 되곤 했지만…….
“아흠….”
가은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가은씨, 피곤하군요. 어서 자요.”
라파엘이 웃으며 가은을 바라본다. 시간은 어느 새 자정을 넘기고 있다.
‘어쩌지, 방이 하나뿐이니…….
어제야 라파엘이 정신을 잃고 있어서 상관없었지만.
아무리 라파엘이라도 한 방에서 둘이 자는 건 좀…….”
가은은 현성 말고는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현성을 사귀는 동안, 몇 번인가 현성이 함께 여행을 가자고 은근히 조르긴 했지만,
가은은 서로를 완전히 사랑하고 믿는다는 생각이 들 때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
“난 저기 주방에서 잘게요.”
가은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라파엘이 웃으며 말했다.
“네? 하지만….”
“괜찮아요. 여기 이불도 또 있잖아요.”
라파엘이 얇은 여름이불과 담요를 꺼내며 말했다.
“추울지도 모르는데….”
“난 괜찮아요. 문 앞은 밤새 철통같이 지킬 테니,
가은씨는 아무 걱정 말고 편안하게 자요.”
그가 다시 예의 그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가 저 미소를 지을 때마다,
가은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얼음장들도 하나둘씩 사르르 녹는 것만 같다.
“그럼, 좋은 꿈꾸어요, 가은씨.”
방문을 닫고 불을 끄고 누운 가은은, 지난번 집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그 집은, 여기보다 더 낮게 들어가는 반 지하 방이었다.
밤늦게 돌아온 가은이 샤워를 마치고 무의식중에 정면에 나 있는 창문을 보았을 때였다.
“꺄악!”
가은은 놀라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웬 남자 하나가 손톱만큼 열린 창틈으로 가은의 방을 훔쳐보고 있던 것이었다.
가은의 비명에 놀란 남자는 금방 달아났지만,
공포에 질린 가은은 밤새 한잠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은이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동네 사람의 짓일 터였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소름끼치는 눈빛이 생각나서,
그 후로 집에서 마음 편히 창문도 열어놓지 못하고 사는 가은이었다.
그래서 이 집을 구할 땐 높은 층으로 이사하고 싶었지만
가은이 마련한 돈으로는 역시 반 지하 방밖엔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라파엘이 있다.
내 방과 현관문 사이에, 믿음직한 그가 잠들어 있다.
그 누구라도, 오늘밤의 가은에게 해코지를 할 순 없으리라.
가은은 문득, 살짝 일어나 그에게로 가서 그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라파엘을 좋아하는 걸까?”
깜박 잠 속으로 빠져들며, 가은은 생각했다.
*
가은은 동그란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하얀 색의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가 따라오라는 듯 귀를 쫑긋거리며 가은은 뒤돌아보곤,
동굴 입구로 뛰어 들어 갔다.
가은은 잠시 망설였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 동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어?”
수평인 줄 알았던 동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수직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
가은은 그 동굴 안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마치 중력이 없는 듯이,
혹은 수만 개의 깃털이 그녀를 몸을 받치고 있는 듯이 부드럽게 둥실 떠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가은은 자신이 지하 아주 깊은 곳까지 떠내려가고 있음을 알았다.
‘지저 세계구나.’
가은이 막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몸이 폭신한 바닥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음?’
정신을 차린 가은이 둘러보니 두 개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사방은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판이었다.
다시 눈앞에 나타난 하얀 다람쥐가, 귀를 쫑긋 거리며 앞서서 달려갔다.
다람쥐를 따라 얼마간 달려가자,
놀랍게도, 치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유년시절 가은의 집이 눈 앞에 있었다.
“엄마! 아빠!”
가은은 마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은은 어느새 여섯 살 꼬마로 변해있었고, 치자꽃 향기 가득한 마당엔,
꿈에라도 보고 싶던 가은의 엄마 아빠가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셨다.
“엄마, 아빠, 보고 싶었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 흑흑….”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 내렸다.
엄마아빠는 옛날 모습 그대로 가은을 꼭 껴안아 주었다.
“가은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가은이….
엄마랑 아빠 없이도 씩씩하게 잘 살고 있어서,
엄마랑 아빠는 우리 가은이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지 모른단다.”
“몰라요, 몰라. 나 하나도 안 잘살고 있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는데….
나 혼자, 얼마나, 얼마나, 흐흑…….”
얼마 만에 부려보는 투정이고 어리광인가. 가은은 채 말을 잇지 목하고 목 놓아 울었다.
한동안 가만히 가은을 안아주던 엄마가,
가은의 어깨를 감싸 쥐고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가은을 바라보았다.
아! 엄마…. 너무나 보고 싶던, 세상에 한 분 뿐인 우리 엄마.
“가은아,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어.
지금 네 곁에 있는 라파엘 말이야, 그는, 지구인이 아니란다.
그는,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안타레스라는 별에서 온 사람이야.
아주 중요한 일로 지구에 오던 중에,
그가 지구에 오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모든 기억을 잃고 말았단다.
그가 다시 기억을 회복하고 지구엔 온 목적을 달성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래서 우리 착하고 씩씩한 가은이가 라파엘과 만나게 된 거란다.
라파엘이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 가은이, 라파엘을 잘 도와줄 수 있지?
엄마랑 약속해줄 수 있겠니?”
“응 , 응, 엄마. 그럴게. 내가 그를 잘 도와줄게. 그러니까 걱정 마.”
꼬마 가은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이구, 우리 이쁜 가은이, 역시 자랑스런 우리 딸이라니까. 그렇죠, 여보?”
아빠가 가은은 번쩍 안고 빙그르르 돌았다.
“네, 그럼요.”
박꽃처럼 하얗게 웃는 엄마 얼굴이 보인다.
두 개의 태양이, 만발한 꽃들이, 아직도 눈물이 글썽이는 가은의 두 눈 가득 아롱거렸다.
“하하하, 어지러워 아빠. 하하하”
“띠리리링~ 띠링~”
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가은은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었구나.’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에는 보슬보슬한 금빛 털실 같은 햇살이며,
선명한 색채의 꽃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안아주었던 따뜻한 감촉이 너무나 생생했다.
마치, 가은의 몸이 잠든 사이, 가은이의 영혼의 하늘나라, 아니 지저세계로 가서
엄마아빠를 만나고 온 것만 같았다.
“엄마….”
라파엘을 부탁하던 엄마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았다.
자상하고 쾌활하던 가은의 아빠와 달리 엄마는 말이 없고 조용한 분이셨다.
그리고 종종, 예지몽을 꾸셨다.
가은이 초등학교 3학년,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어느 여름날 아침이었다.
“가은아, 오늘 학교 끝나면 아무데도 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와야 해. 알았지?
초콜릿 케이크 사 놓을 테니까, 절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으로 와. 응?”
엄마는 가은에게 옷을 입혀주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꿈을 꾼 거예요, 여보?”
아버지의 물음에 어머니는 가만 고개를 끄덕이셨고,
조금 서운했지만 가은은 곧장 집으로 왔다.
그리고 다음날, 교실엔 빈자리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어제 생일 파티에서 주문한 음식이 잘못되어
반 아이들 몇이 식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이었다.
그 때의 일을 가은은 잊지 않았고,
엄마가 꿈을 꾼 다음 날이면 가은은 반드시 어머니의 말을 따랐었다.
그런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가은에게 라파엘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가은은 맑고 깊은 우물 같은 어머니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안타레스라고 했지? 라파엘이 온 별이….’
“안타레스…….”
가은은 가만히, 소리 내어 낯선 별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 10화 : 은빛 수트의 남자 ]
“띠리리링 띠링~”
가은의 깊은 잠을 깨운 벨소리.
꿈 속, 엄마의 이야기를 곰곰 생각하던 가은은 아르바이트 건이 생각나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가은씨죠? 여기 나래 출판사에요.
오늘 낮에 잠시 출판사에 들러주실 수 있나요?”
“아, 네, 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들르겠습니다.”
반가운 일이었다.
출판사 일은 가은이에게도 도움이 될 터이고 이곳은 시간당 칠천 원씩이나
아르바이트 비용을 준다고 했다.
지원자가 많겠지만, 가은은 최대한 열의를 표현해 볼 생각이다.
“라파엘, 아직 자요?”
가은은 살며시 방문을 열어보았다.
어젯밤, 그를 처음 방안에서 보았을 때 생각이 나, 가은의 가슴은 조금 두근거렸다.
“어? 어디 갔지?”
두리번거리는 가은의 눈에, 냉장고에 붙은 쪽지가 보였다.
‘가은씨, 나 일이 있어 어디 좀 다녀올게요.
저녁때쯤 돌아올 테니 염려 말아요.
집도 안 잃어버리고 잘 찾아올 테니 걱정 말구요.
밥솥에 밥 지어놨어요. 콩나물국 끓여놨으니까 혼자라도 아침 꼭 먹어요.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해가 뜨는 걸 보았어요.
난, 해 뜨는 건 처음 보았는데 정말 아름답고 장엄한 경관이었어요.
어쩐지, 그리운 느낌도 들었고요.
가은씨에게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가은씨가 날 구해준 덕분에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저 방문 안에 가은씨가 잠들어 있어요.
가은씨에게 인사하고 다녀오고 싶지만, 가은씨 깨울까 봐 그냥 가요.
나 잘 다녀올게요.
햇님처럼 방긋 웃는 하루 보내기에요.”
어쩌면 이렇게 다정한 사람일까.
어쩌면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일 수가 있을까.
그의 쪽지엔, 너무나 다정한 글 말고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해가 떠오르는 걸 바라보고 있는 라파엘 자신인 듯 보이는 그림.
마치 초등학생처럼 서툰 그림이었지만 어딘가, 마음에 와 닿는 그림이었다.
‘참, 아름다운 사람…….’
조그만 밥솥에 담긴 하얀 밥에선 모락모락 맛있는 김이 피어오르고,
조그만 냄비엔 맑은 콩나물국이, 그리고 접시엔 아직도 따뜻한 콩나물 찜이 담겨 있다.
그러고 보니, 냉장고와 싱크대도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밥상 위에도, 부엌에도, 방안에도, 어디를 둘러보건 온통 라파엘의 흔적이 있다.
24시간이 아니라, 마치 24년을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여느 때처럼 혼자 먹는 아침상이었지만, 밥알은 더 이상 모래알 같지 않았다.
라파엘이 차려놓고 간 아침밥을, 가은은 두 공기나 뚝딱 먹어치웠다.
라파엘이 만든 음식은 그것이 얼음이 동동 뜬 냉면이라 할지라도 따스할 것만 같았다.
“헤헷, 세양 언니가 알면 부러워 죽으려고 하겠는데?”
아버질 닮아 가은은 손재주가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요리도 곧잘 하는 편이었지만,
세양은 요리는 정말 젬병이라고 했다.
계량스푼을 써도 어쩐지 너무 짜거나 터무니없이 싱거운 음식이 되고 만다며,
마트에서 파는 반찬을 사갈 때면 결혼 상대자의 첫 번째 조건이
요리 잘하는 남자라고 웃곤 했다.
‘그러고 보니, 라파엘은 세양 언니 이상형이네?
꽃미남에, 요리 잘하고, 거기다 청소까지 잘하는걸?
호오……. 세양 언니한테 절대 보여주지 말아야겠다.’
“이 문디 가스나!
이런 꽃미남을 언니한테 신고도 안하고 혼자 감춰두고 감상했단 말이가!
이거는 범죄다, 범죄!”
보나마나 귓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흥분하여 소리칠 세양이 생각나,
가은은 밥을 먹다 말고 혼자 쿡쿡 웃었다.
*
나래 출판사는 성북동의 한적하고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정성들여 가꾼듯한 정원과 자연석으로 만든 계단이
집주인의 고상한 취향을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학교는 아직 졸업하지 않았네요.”
“네. 3년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그럼 지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군요.”
“어머니께도 2년 전에….”
“아, 실례했어요.”
은테안경을 끼고 머리를 올려 묶은 편집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무조건 동정의 눈빛으로 보는 사람과,
백 원짜리 동전하나 부탁한 적이 없건만, 눈에 띄게 가은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
가은은 이미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 익숙해 있었다.
“교정일은 해본 적이 있나요?
우리 일은 단순한 교정이 아니라 거의 윤문수준으로 문장을 부드럽게 다듬을 줄 말아야 해요.
담당자가 일이 생겨 사람을 구하게 된 거라 사정이 급하긴 하지만,
그래도 실력이 없는 사람을 뽑을 수는 없어요.”
“본격적인 윤문 일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맡겨 주시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만일 일을 하시게 되면 오늘 안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편집장은 무척 유능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퍽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일반적인 출판사 급여를 생각해 볼 때, 시급 7천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회사 입장에서야 경험이 많은 사람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기대를 하고 왔건만, 가은은 조금 허탈한 기분이었다.
“이제 어떡하나…. 역시, 다시 마트 일을 해야겠지.”
터벅터벅, 기운이 빠져 땅만 쳐다보고 걷던 가은은 그만, 마주오던 누군가와 부딪혀
잔디밭에 주저앉고 말았다.
“앗, 정말 죄송합니다. 다친 데 없으세요?”
“다친 건 내가 아니라 아가씨 같은데요. 괜찮아요?”
깔끔한 은빛 수트를 입은 남자가 가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전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남자가 예의로 손을 내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손을 잡기엔 가은은 너무 수줍음이 많았다.
“이 출판사에 볼 일이 있었나 보군요?”
은빛 수트의 남자가 물었다.
“네. 이제, 올 일이 없을 것 같지만요. 그럼, 정말 죄송했습니다.”
가은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정원을 빠져 나왔다.
“사장님, 이제 오십니까.”
황 편집장이 막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강민우 사장에게 인사를 했다.
“네. 편집장님. 근데, 방금 나간 아가씨는 누구죠?”
“아, 최인영씨 일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일에 면접을 보러 온 학생입니다.
개인사로 학교도 다 마치지 못했고 경력도 짧아서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합니다.”
“개인사라니요?”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셔서 학교를 다 끝내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그냥 그 학생을 쓰도록 해요.”
“하지만 사장님,”
“황 편집장님?”
“네, 사장님.”
“막 입문자였던 시절, 네겐 재능이 없으니 일찌감치 이 일을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천재 예술가가 역사상 얼마나 많았는지는 나보다 편집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죠?
우리까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요.
기회는 균등하게 제공되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 편집장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강민우 사장은 평소엔 편집장의 의견에 모든 걸 맡기는 편이었지만
본인이 한번 언급한 것은 반드시 관철시키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소문엔 자수성가한 수백억 원대의 부자라고 했으나 출판사에서 보는 그는
성공한 사업가라기보다는 고집 센 예술가의 느낌에 가까웠다.
“지시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황 편집장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들보다 일찍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황 편집장이
숱한 러브콜을 거절하고 나래 출판사에 머무는 이유는,
나래 출판사가 이윤을 생각하지 않고 좋은 인문학 책을 꾸준히 펴내는
국내의 몇 안 되는 출판사 중 한 곳이기 때문이었고,
이 사람, 강 사장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황 편집장이 온 뒤 직원들도 모두 그 수준에 맞는 사람들로 고용해왔다.
그런데 저런, 스물일곱 살이 될 때까지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풋내기를 고용하라고
직접 지시하다니….
완벽한 황 편집장의 삶에 흠집이라도 나는 것 같아 편집장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가은씨, 내일 아홉시까지 출근하세요. 그럼.”
딸깍, 짧게 전화가 끊겼지만
출근을 거의 포기하고 있던 가은은 하늘에라도 날아오를 듯이 기뻤다.
어서 가서, 라파엘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그가 온 뒤로는, 어째 모든 일이 순조롭게 술술 풀려가는 것만 같다.
어쩌면 안타레스는 행운의 별 이름이 아닐까?
가은의 마음은 벌써, 어디에 있는지 모를 라파엘의 곁에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