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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지구인이면 OK -11화: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박가애 |2007.02.13 04:32
조회 27 |추천 0

 

“어라, 이 청년 보게나. 정말로 왔네.”

항상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는 바지런한 김 씨가 현장에 먼저 나와 있는 라파엘을 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참 아름다운 아침이지요.”

“허허, 그래.”

조금은 낯선 아침인사를 듣는 김 씨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느 현장엘 가던 자신보다 더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을 보지 못한 김 씨였다.
저렇게 젊은 청년이, 더구나 저렇게 여자아이처럼 예쁘장한 청년이

정말로 일을 하러 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자네, 그 차림으로 일을 하려는 건가?”

“아, 지금 가진 옷이 이것뿐이어서요.”

“기다려보게.”

김 씨는 간이 막사에서 작업복 한 벌을 갖고 왔다.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있나?”

“아뇨, 처음입니다. 사실 전, 아무 것도 기억을 하지 못해요.
라파엘이라는 제 이름도, 저를 구해준 가은 씨가 붙여준 이름이에요.

“아, 그래…….”

성실과 근면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 씨였지만

그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내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도령으로만 보이는 청년의 기막힌 사연을 듣고

대번에 측은지심을 내는 심성 고운 사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말로 그를 위로할 재주는 없는 김 씨였고,
자신을 라파엘로 소개한 청년은 그다지 불행해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직 제 기운을 차리지 못한 초겨울의 아침 햇살은 받은 청년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평온하고 행복해보이기까지 했다.

“여기다 벽돌을 쌓을 때는 말이지,”

말 대신 지게에 벽돌을 쌓는 방법 등을 알려주며

청년에 대한 호의를 표현하는 김 씨였다.

“여, 일찍들 나왔구먼. 아침은 먹고들 나왔능가?”

이 반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텁수룩한 수염이며 팔도의 사투리가 뒤섞인 사투리가 거칠기는 해도,
세세하게 인부들의 식사며 간식거리를 챙기는 걸 잊지 않는 자상한 사람이

이 반장이었다.

속속 사람들이 도착하고, 현장은 금세 활기를 띠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고는 해도,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자면 금세 이마며 가슴팍에 땀방울이 맺혔다.
일을 하고 있으면, 다른 잡생각은 일체 나지 않았다.
조금 힘들기는 해도, 김 씨는 그래서 이 일을 사랑했다.
일을 하는 틈틈이 김 씨는 라파엘이라는 낯선 청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 몫이나 제대로 해낼까 싶던 그 청년은, 오늘 종일 사람들을 놀래고 있었다.

일단 지게 지는 법과 벽돌 나르는 법을 익히자,

청년은 다른 사람들의 두 배 세 배 몫을 해냈다.

지게 끝까지 쌓아올린 수 십장의 벽돌을 청년은 끙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웃으며 날랐다.
젊었을 때는 힘 꽤나 썼다고 자랑하는 이 반장마저

청년의 믿기지 않는 힘에는 놀랄 뿐이었다.

김 씨로부터 청년의 사정을 대강 들은 이반장이 점심을 먹는 라파엘에게 물었다.

“자네 말이여, 혹시 전에 씨름 선수 아니었능가?
내 이 생활 삼십년 만에 자네처럼 힘 좋은 사람은 처음보네.
나두 소싯적에는 씨름판에서 소도 한 마리 타오고 했었지만 말이여,

 그래도 자네만큼은 아니었거든.”

“허허. 이반장님도. 아니 이 사람 어딜 봐서 씨름을 했겠어요.

그림을 그렸다거나 피아노를 쳤다면 모를까.”

“하긴, 그건 그려. 씨름하고는 통 안 어울리는 인상이제?”

이반장이 다시 한 번 뽀얀 얼굴의 라파엘을 바라보고 껄껄 웃었다.
라파엘은 그저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하여튼 뭐, 이반장님 걱정하시던 차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네요.
이 사람 일 하는 걸 보니 다른 사람 두세 배 일당은 쳐줘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김 씨는 허허 웃으며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라파엘의 눈에 띄는 외모와 기억상실이란 사실과 놀라운 힘에 대해 수군댔지만,
이 반장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속으로 모두가 라파엘과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그에게서는 뭐랄까, 마치 에고가 없는 자연을 대할 때 느껴지는 것과 같은

평온함이 느껴졌다.
별 말이 없어도 그저 웃고만 있는 라파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오늘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기운찬 느낌이었다.

“이 건물 모양 특이허제?”

이 반장이 라파엘에게 웃으며 물었다

“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다른 집들하고는 구조가 많이 달라요.”

“방송국에서 짓는 집이라서 그러제. 여기에서 드라만가 뭔가를 찍을 거라는구먼.”

말을 마친 이 반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튼튼하지 않아도 좋으니 설계도대로 빨리만 지어달라는 주문이 생각나서였다.
이 반장은 대학에서 건축설계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집에 대한 이해와 현장 경험이 풍부했다.
설계도대로라면 집은 무척 특색 있기는 하겠지만

안정감 있는 튼튼한 건물은 되지 못할 터였다.
방송국에서야 어차피 촬영을 위한 집이니 그 후엔 허물어도 상관없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어찌 멀쩡한 집을 허문단 말인가.
이 반장은 공사일정을 서두르면서도 최대한 튼튼한 건물을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드라마요? 그럼 이 집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인가요? 근사한데요.”

해사하게 웃는 청년의 웃음을 바라보며 이 반장은 불쾌한 기억들을 털어버렸다.

“워쪄, 일당으로 받을려능가?”

이 반장이 물었다.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파엘은 가은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려, 오늘 수고혔고, 내일 아침에 보드라고.”

봉투엔 십 오만 원이 들어있었다.

다른 인부들 보다 세 배 이상의 돈이었지만 라파엘은 오늘 충분히 그 몫을 해냈다.

 라파엘은 기뻤다. 이 돈이라면 한 달 안에 삼백만원을 모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가은은 집 때문에 울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음, 가은 씨에게 뭔가 선물을 하면 좋겠는데…….’

라파엘은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생각났다.
집에 올라가던 라파엘은 다시 시장으로 내려가 장미꽃 한 다발을 사고

나뚜루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한 통을 샀다.
지난 번 함께 시장을 볼 때 가은의 눈길이 아이스크림에 머물다 아쉽게 지나치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어머, 지난번에 그 학생이랑 같이 왔던 잘 생긴 총각 아냐?

다시 봐도 인물이 훤하네. 이 동네 살아? 그 학생 남자친구?”

계산대의 애교 많은 주인아주머니가 살갑게 말을 붙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 가은씨 남자친구 맞아요.”

라파엘이 웃으며 대답한다.

“어머나, 어쩌면…….

그 학생 그리 알뜰살뜰 열심히 살더니만 복 받았네, 복 받았어.”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서는 라파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주인아주머니의 옆구리를 두부상자를 가지고 들어오던 주인아저씨가 쿡 찌른다.

“아이구 사모님, 침이나 닦고 쳐다보시죠.”

“오호호호, 당신도 참. 쳐다보긴 내가 뭘 쳐다봤다고 그래요.

근데 정말 저 청년, 잘 생기지 않았어요?
그 학생이랑 같이 사나? 이 동네 살긴 아까운 미모야.

영화배우로 나서도 될 것 같지 않우?”

주인아주머니가 수다스럽게 말하며 남편의 팔짱을 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젊었을 때 당신만은 못하지만 말에요.”

“어이구, 말만?”

주인아저씨가 곱게 눈을 흘기며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티격 태격 해도 이십 년 가까이를 매일같이 함께 일해 온 잉꼬 부부였다.

“가은씨, 나 왔어요.”

라파엘이 현관문을 밀며 큰 소리로 가은을 불렀다.
작은 주방 안은 된장찌개를 끓이는 구수한 냄새로 가득했다.

“아니, 라파엘,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에요?”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가은은 슬슬 그가 걱정이 되려던 참이었다.

“음, 맛있는 냄새, 저녁 메뉴는 두부 된장찌개군요? 기대되는 걸요?”

라파엘이 웃으며 말하곤 뒤에 감추고 있던 장미꽃과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가은씨, 선물이에요.”

“어머…….”

뜻밖의 선물에 가은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라파엘은 낯선 작업복 차림에 먼지투성이다.

“ 요 아래,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방송국에서 짓는 집이라는데, 좋은 분들이 너무 많으셨고 일도 참 재미있었어요.
나 이제 공사 끝날 때까지 매일 일하러 가려구요.”

“라파엘…….”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였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나도 오늘 출판사에 취직했거든요.
아직 몸도 안 좋을 텐데 나 때문에 그런 힘든 일 하는 거 싫어요.”

“가은씨, 가은씨는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가은씨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난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 걸요?
그리고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기억은 없지만 컨디션은 아주 좋은 걸요.
이것 봐요. 돈도 이만큼 받았어요.”

라파엘이 가은에게 하얀 봉투를 건넸다.
라파엘이 자신을 위해 종을 땀을 흘려 일한 돈이 든 하얀 종이봉투…….

“어서 열어봐요.”

봉투에서 나온 열 두 장의 푸른 지폐를 바라보는 가은의 눈엔 금세 이슬이 맺혔다.

“고마워요, 라파엘…. 그리고 미안해요….”

“가은씨는 울보네. 툭하면 울어요. 우리 예쁜 가은씨, 울보.”

라파엘이 웃으며 가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다채롭고도 기이하다.
지금 라파엘의 가슴에 느껴지는 가은의 감정은 분명 감사와 기쁨인데도, 그녀는 울고 있다.

"어머, 라파엘, 손을 다쳤어요.”

가은이 라파엘의 오른 손을 들어 자세히 바라본다.
언제 다쳤는지 라파엘 손등의 껍질이 벗겨져 조금 붉어져 있다.

“쓰라리지 않아요? 어디, 약이 있을 텐데….”

약을 찾으러 가려는 가은을 라파엘이 돌려세운다.

“가은씨, 내가 가은씨 손가락 치료해 주었던 일, 기억해요?”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피가 흐르던 손가락이 단 몇 초 만에 흔적도 없이 나아버렸던 그 놀라운 일을.
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엔 가은씨가 날 치료해 줘요.”

“내가요? 하지만 난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걸요.”

가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라파엘이 자신의 손가락을 치료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적어도 지구인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은가.

“아니에요. 당신도 할 수 있어요. 가은씨.

내 손을 잡고 눈을 감아요. 그리고 내 손에게 말해주는 거예요.
다치지 않았을 때의 건강한 내 손을 떠올리면서 어서 되돌아오라고 말하면 돼요.”

라파엘이 웃으며 가은을 바라보고 있다.

문득 가은은, 어릴 적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기도하던 일을 떠올렸다.
부모님은 특별한 종교를 갖고 계시지 않았었다.
그러나 때로 나들이를 겸해 온 가족이 교회나 절에 다녀오곤 했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언젠가 가은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였었다.

“가은아, 사람들을 보렴. 다들 뭔가 기도를 하고 있지?

기도란 아름다운 마음이란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특히나 아름답지.
그 아름다운 믿음이,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힘이란다.”

그래서 어린 가은은 종종 기도를 했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 추운 날씨에 고생하시는 군인 아저씨를 위해,
감사한 농부 아저씨를 위해, 관절염이 심해지셨다는 친구 할머니를 위해,
그리고 오소리에게 물려간 병아리를 위해서도…….

그러고 보니 지난 3년간,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이없게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고 연달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현성마저 떠나고서,
가은은 세상을 원망했었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몸부림 쳤었다.
복수해 줄 거라고, 내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세상에 그대로 갚아줄 거라고,
가은은 꿈에서조차 더 이상 감사의 기도가 아닌 증오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 불과 이틀 전에 가은의 인생에 불쑥 나타난 이 외계인이,
가은을 밑바닥부터 흔들어놓고 있다.
다시 한 번 사람을 믿어 보고 싶게 만들고,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게 만들고,

행복했던 지난 기억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든다.
이상한 사람…….

참으로, 이상한 사람…….

말간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라파엘을 바라보다가, 가은은 마침내 눈을 감았다.

“하느님, 부처님, 무엇이라고 부르건, 지금 내 기도를 듣는 당신.
제 기도가 들린다면 이 사람의 손을 낫게 해주세요.
자신이 누군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면서 나를 위해 공사판에 다녀온 착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픔을 겪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이에요.
다쳐야 한다면, 그건 나이지, 이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하얗고 예쁜 손을 기억합니다.
아마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 누구도 증오해 본 적이 없는 손이겠지요.
부디, 지켜 주세요. 이 사람의 천사 같은 손을…….
그가 언제까지고, 그런 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가은의 기도는, 자기도 모르게 간절해지고 있었다.

“가은씨, 이제 되었어요. 이걸 봐요.”

눈을 뜬 가은은 라파엘의 손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조금 전까지 분명하던 상처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와…….”

가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로, 이런 기적이 일어나다니….

내가, 이런 기적을 일으키다니…….

“믿음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요, 가은씨. 그건 이 행성에서도, 마찬가지네요.”

라파엘이 웃으며 가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은씨, 나 가은씨가 내 대신 다치는 건 싫어요.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앞으로 다치지 말고 계속 건강하기로 해요.”

라파엘이, 마치 가은의 기도를 들은 사람처럼 말한다.
이젠 그가 마음을 읽는 것에도 놀라지 않는 가은이었다.

“네. 그래요.”

가은도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배고프죠? 얼른 샤워하고 와요.”

“네, 가은씨. 가은씨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다니,

난 아마 이 행성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에요.”

예전에 현성이 했다면 그저 웃어 넘겼을 말도, 라파엘에게선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마, 진심이기 때문이겠지.’

가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라파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아직 쑥스러워 혼자 삼키고 만다.

‘아니에요, 라파엘. 지구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바로 나인 걸요.’

창 밖엔 어느 새 무겁고 축축한 어둠이 내리고,

집집마다엔 하나 둘 따스한 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따스한 김이 오르는 식탁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가족들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겠지.

마치,
가은과 라파엘의 집 저녁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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