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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무역 사건에 관하여 YTN에서 다큐가 방송되었다.

이원기 |2007.02.20 16:42
조회 111 |추천 0

 

YH무역 사건에 관하여 YTN에서 다큐가 방송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악덕기업주의 강제적 직장 폐쇄조치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하다가 경찰의 강제 진압에의하여 해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한 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결찰 조사에서는 자해 후 투신으로 발표가 되었지만, 오늘날 밝혀진 것은 경찰 진압과정에서 폭행에 의한 사망인 것으로 보인다. 강한 정황 증거들이 남아있다.

문제는, 이 문제가 단순한 노동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문제로 비화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김영삼이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김대중 전대통령에 버금가는 민주투사로서의 명망을 얻는다.

그러나... 그런 그가 삼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태우에게서 4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노동자들이 피흘려 가면서 마지막으로 기댄 곳이 그의 신민당이었는데, 그는 정말 정치계의 "쓰렉"에 합당한 사람이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사람이라면. 정치인이라면. 제정신을 가졌다면, YH 사태때 죽는줄 알았다고 뻔뻔하게 증언을 하면서 삼당합당을 할 수가 있었을까?

정말이지...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들이다.

이하. 삼당합당에 관하여.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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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선거로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되자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여소야대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보수연합구도를 구축하려는 목적에서 국민의 의사와 배치되는 위로부터의 정계개편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90년 1월 22일 민정당의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합당을 선언함으로써 거대보수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약칭은 민자당이다. 3당합당의 요인으로는 당시의 상황적 요인과 더불어 보수정당이라는 이념적 동질성,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엘리트정당, 최고지도자 개인에게 집중된 당권 등의 구조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3당합당으로 민자당은 국회에서 개헌선인 2/3를 넘는 218석을 확보하고, 지역에 기반한 4당구조를 보수 대 혁신의 양당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초기에 민자당은 민주 ·번영 ·통일을 이념으로 내걸고, 총재 1인(노태우)과 대표위원 3인(김영삼 ·김종필 ·박태준)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계파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공천 및 당직배분으로 당내갈등이 지속되고, 인위적인 정계개편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으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총 299석 중 149석을 얻는 데 그쳐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였다.

5월 19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이종찬 ·박태준 ·박철언 등 20여명의 의원들이 탈당하였다.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41.4%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됨으로써 민자당은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민자당은 김영삼 정부의 개혁정책을 선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개혁의 장애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 3계파간의 갈등만 증폭시켰다. 1993년 3월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 전 ·현직 국회의장 김재순과 박준규, 국회의원 유학성 ·김문기 ·임춘원 ·정동호가 정계를 은퇴하거나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민자당을 탈당하였다. 이어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당대표를 역임하였던 공화계의 김종필 대표도 민주계의 배척운동으로 인해 1995년 2월 9일 공화계를 이끌고 탈당하였으며, 당내의 충청권 국회의원들도 동요하여 박준병 등이 탈당하였다.

이후 민자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6월 27일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였으며, 그 결과 내분은 증폭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1월과 12월 두 전직 대통령 노태우와 전두환이 구속되면서 12월 6일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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