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따금 화초를 보면, 때려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두 손을 묶고 등을 보이게 한 채로, 맨 등과 엉덩이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다. 즐겁게, 만끽하면서, 허리와 엉덩이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그러면 그녀는 참다못해서,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내게 욕을 퍼붓는 것이다. 이 개새끼! 풀려나면 너를 죽일 거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리고 말 거라구! 이 더러운 개새끼야. 그러면 나는 놀라고 당황해서, 미안한 표정이 된다. 저기요, 많이 아팠어요? 다가가서, 그녀에게 묻는다.
하하하.
그런데 화초는 얼굴이 좋대. 두 뺨을 맞거나, 머리채를 잡혀서 끌려 다니고 싶다는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했더니 여자친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라면 싫은 것 같아. 그럼 엉덩이는? 엉덩이를 때린다면 어떨 것 같아?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글쎄. 당해봐야 알 것 같아. 약간은 침체된 분위기. 그녀는 지금 화초를 생각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카고에 살고 있는 젊고 매력적인 아가씨를 떠올리는 것이다.
너는 언젠가, 화초와 여행을 떠날 거야.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겠지. 당신은 뭐든 올인하는 성격이니까, 나는 곧바로, 버려지고 말거야. 나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겨울에 떠나면 좋을 텐데. 꽁꽁 얼어서 밖에도 못나가고. 하지만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다 중요한 건, 네가 지금, 누굴 더 사랑하느냐는 거야.
그녀는 일전에 첫사랑과 밤을 보낸 적 있다. 연쇄살인범이 출몰하던 여름이었다. 나는 그녀가 실종된 줄만 알고 미친 듯이 사방을 뛰어 다녀야 했는데, 그녀는 결국 살아서 돌아왔고, 약간은 지친 표정이었다. 내게는 그 남자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그거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도 사귄 지도 벌써 이 년이나 됐는데.
2.
화초를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올린 글에 대한 리플 때문이었다. 짧은 에세이였고, 그녀는 밑에 “재밌어요.” 라고 썼다. 심상한 말투. 어쩐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에세이는 내가 어렸을 때, 학교 수위에게 성추행 당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도 우습게 당해버려 쓰면서도 좀 웃겼지만, 어쨌든 성추행인 거잖아. 거기다 대고 재밌다니, 어이없고 황당했다. 뭐야, 이거. 세상의 모든 것이 재미로 치환되진 않는다.
그래도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의 아이에게, 공적인 장소에서, 그런 식으로 면박을 주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으로 된 홈페이지를 검색해서 찾아보았다.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세상의 모든 것을 재미의 감도로만 측정하고 있을까. 찾아서 들어간 곳은,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듯한 분위기의 하얀색 게시판이었다. 산만하고, 삭막한 분위기.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였다.
그곳은 유타. 나중에야 미국이란 걸 알았지만, 처음 들었을 때 그 느낌은 전혀 미국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나, 이집트를 연상시킨다. 넓은 벌판에 드문드문 잡초가 있고, 멀리서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을 피하기 위한 집이 한 채 서있다. 실제로 그 옆엔 호수와 사막이 붙어 있다고 한다. 호수와 사막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여자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외동아들. 섬세하고 여리며, 과묵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상상을 했다. 아이는 전자렌지에 냉동식품을 돌린다. 스파게티나 피자 같은 것. 커다란 부엌, 식탁에 앉아 그것을 혼자 먹는다. 누군가 좀 있다가 돌아오는 분위기가 아니다.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 아이는 음식이 반쯤 남은 접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대로 현관문을 나선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 아이는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 눈을 조금 찡그린다. 나른하고 어지럽다. 그리곤 어딘가 갈 곳도 없이, 그냥 계단에 앉아 빛을 쪼이는 것이다. 유타는 넓고, 시간은 많다. 하지만 할 일은 없는, 영원히 방학만 지속될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런 분위기.
다시 만났을 때 화초는, 시카고에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시카고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신이 들고 보니 그녀는 시카고에 있었고, 거기서 미술대학을 다녔고, 별로 똑똑하진 않은 터라 지하철 한 편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교복 차림의 흑인 여자애들에게 ‘삥’이나 뜯기고 있었다. 바보잖아. 미국까지 갔으면, 좀 더 활기차게 살아보란 말이야, 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일상. 이라고 해봤자, 별 건 없었다. 학교에 간 것도 처음 몇 번뿐, 그 다음부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글을 썼다. 짧은 소설들. 일기. ‘않’과 ‘안’을 구별하지 못하고, ‘체’와 ‘채’를 혼동하며, ‘때’라고 써야 할 부분에선 어김없이 ‘떄’라고 쓰는 주제에, 삼 일에 한번씩은 꼬박꼬박 올렸다. 그녀는 쓰고, 나는 읽는다.
마음에 들었던 건 그녀의 단편이다. 문법과 맞춤법은 그렇게 엉망이면서도, 문체만큼은 유난히 아름다워서 읽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뭐랄까.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단어를 이용해서 그 세계를 완성하는 것 같았다.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세계. 나약한 환타지. 타인에 대한 멸시와 자아에 대한 공포가 소설 곳곳에 점점이 베어 있었다.
소설 괴물에는, 한 화가에 대한 소설을 쓰는 젊은 여자가 등장한다. 화가는 그림을 완성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러한 열기와 고독 속에 침잠될수록, 점점 더 그 내부의 정신적인 문제가 밖으로 표출된다. 이를테면 과거에 저질렀던 유아 강간이나 여타의 범죄들이, 트라우마나 콤플렉스가 되어 붓 끝에서 그려지는 것이다. 그는 괴물이다. 그는 특별하게 살아온, 특별한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을, 한 젊은 여자가 방 안에서 완성시키고 있다. 담배를 피우고, 컵라면을 비우면서, 점점 더 그 열기와 고독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 괴물은, 화가가 아니라 소설가였던 것이다. 자신의 일상들. 함께 살던 고양이를 목을 졸라 죽이면서, 그 손끝의 감촉으로, 그녀는 소설을 완성해간다.
읽고 있으면, 그 시커먼 공포에 소름이 돋아났다. 정말로 실제적인 감각의 공포가 엄습했던 것이다. 더욱 더 무서운 것은, 그러한 소설가의 얘기를 완성해가는 열정과 광기가 화초 내부에 이미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느끼는, 자기에의 공포. 그녀는 그것을 마주하고, 또한 제어하고 있었다. 멋진걸. 완전히, 반해버리고 말았다.
3.
봄이었다. 어느 틈에가 나는 화초와 만나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양이를 기르며, 시카고의 아파트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야미쿠로 아시죠?
그녀가 문득, 내게 묻는다.
그게 뭐죠?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괴물 이름이에요.
야미쿠로? 지진을 일으킨다는?
아뇨. 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아아. 지하철에서 살고 있는 괴물 말하는 거죠?
네.......야미쿠로가 되시면 멋질 거예요.
하하하하. 싫어!!!!!!!
지하철 요금도 안 내는데????
여자친구가 없잖아.
음....야미쿠로 암놈을 여자친구로 맞이하는 거죠.
아아.....싫어....;;;;; 암놈을 여자친구라니...
이름은,... 야미짱
하하.
역시 불가능하군요.
야미짱...죽이는데요.
그죠.
네.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제가 지하철을 좀 좋아해서 오버하고 말았어요.
지하철 무서워요.
앗! 진짜요?
네. 큰소리가 나면, 테러 아닐까, 라는 생각을 꼭 하게 돼요.
아...
펑. 이라거나, 쿵. 이라거나.
그, 바람 부는 건 어때요? 지하철이 오면서 바람이 부는 것이나, 지하도를 걸을 때 시원한 바람이 강하게 부는 거요.
중금속 함유되어 있어서.
아. 치밀하시군요.
서울 오래 살았으니까;; 하지만 그 바람에 만 원짜리들이 내 앞으로 날아왔을 때는! 좀 바보 같아 보이지만, 참 설레었던 게 사실이에요;
만 원짜리가 날아왔어요?
네.
오...
회오리바람처럼.
최고군요.
만 원짜리들이 멀리서 날아와서, 내 앞에 툭. 그냥 집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막 주우셨나요? 허겁지겁?
아니?
후후
이건 뭐지? 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하하
저라면 몸을 던졌을 텐데.....
아냐. 던질 것도 없이 그냥.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라는 느낌으로 툭. 이었다니까요.
아아. 그게 엄청 많았어요?
글쎄요? 몇 장?
음
엄청 많았다면 신문에도 나오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죠. 아아. 저도 한 만 원 굴러 와서 라면 샀으면 좋겠네요.
라면 떨어졌구나.
네. 월급날인데 엄마가 돈을 안 줬어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언제나 즐거운 기분이었다. 즐겁고, 또한 유쾌하다. 그녀는 우주를 유영하다가 빈 별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배가 고파 라면을 먹고, 문득 생각이 나서 내게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난다 씨, 거긴 어때요? 우리 같이, 지구나 정복하지 않을래요?
그녀의 단점이라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구 정도의 행성을 정복하려면, 그 나름의 노력과 계획이 필요한데도, 그런 문제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힘든 일은 언제나 내 몫. 때려버리고 싶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화초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거라고. 그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고, 계절은 바뀌어서 가을이 됐다.
4.
나는 아직도, 연애에 대해 생각한다. 상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밤 나가서 야구공을 치다보니, 왼쪽 손가락이 벗겨져 피가 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연애는 계속 됐고,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나는, 누구와도 잘 수 있는, 그녀라는 인간 자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마음이 몹시 까매져서, 전화도 받지 않고 혼자 있었다. 그녀는 내 이런 상태를, 난다 먹구름이라고 불렀다.
난다 먹구름이야?
응.
그럼 오늘도, 전화하지 말까요?
응.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는 가만히,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TV도 보고, 게임도 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엔 잠을 자며 꿈을 꿨는데, 일어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잠은 이미 충분히 자두었으므로, 새벽엔 언제나 깨어 있었다. 나가서 밤거리를 쏘다니다가, 돌아와선 샤워를 한 다음 책을 꺼내 읽었다. 그것은 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였다. 두고두고 읽는 책. 하지만 뭔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나 자신이 변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더니, 나는 어느새, 야미쿠로가 되어 있었다.
야미쿠로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당연히 화초.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화초는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온다. 짧은 머리. 하늘색 풍선 티셔츠에 최민수 가죽점퍼를 입고, 청바지에 부츠를 신었다. 그녀는 여전히 길치라서 지하철 환승구를 지나다 길을 잃는다. 여기가 어디지. 시카고든 서울이든 지하철은 다 똑같다. 좋아는 하는데 그리 친하진 않은 것이다. 그 때 저 앞에서 휭 하고 바람이 불며, 만 원짜리가 날아와 발치에 떨어진다.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다. 아아, 난다 씨가 말한 그대로잖아? 정신이 없다. 그녀는 빠르게 움직여 돈다발을 줍는다. 여기에도, 아, 저기에도. 그리고 마지막 한 장까지 전부 다 주웠을 때, 그녀는 철도원장도 모르는 사각지대에, 야미쿠로와 함께 있다.
아앗, 난다 씨! 드디어 야미쿠로가 되셨군요!
네. 야미쿠로가 되었습니다!
멋져요. 그럴 듯 한데요?
나는 웃는다. 화초는 예뻐서, 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소리가. 야미쿠로의 웃음소린 하이에나의 비명 같다. 그 웃음소리에 놀라서, 나는 그만 표정이 굳어진다.
으으. 내 목소리 이상하죠?
네. 괴상하고, 끔찍해요!
후후후.
어쩌다가 야미쿠로가 되신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나는 단지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뿐인데.
상실의 시대?
네. 거기 보면 왜 와타나베와 미도리가 점심을 먹고, 옥상에서 키스를 하잖아요.
네.
예전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막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째서 미도리는 애인을 놔두고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는 걸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전혀 다른 입장에서 그들의 관계를 바라보기 시작한 거죠. 나는 이제 와타나베도 아니고, 미도리도 아니고, 그저 그들을 감시하는 제 3 의 인물. 내가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변했을까. 이상하다 싶어 거울을 봤더니, 어느새 야미쿠로가 되어 있었어요.
괜찮아요, 난다 씨?
잘 모르겠어요. 나는 전부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네요. 이를테면, 나에겐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사귀는 사람 말고는 자지 않겠다는 거였죠.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여자친구는 이미 다른 사람과 잤으니까, 그런 내 원칙을 지킬수록 결국엔 여자친구를 비난하게 될 것 같은 거예요. 나는 안 잤는데, 너는 대체 왜 그랬니. 하고요.
네.
하지만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낼 수도 없었죠. 자고 나면 여자친구와 헤어질 것 같았거든요. 그냥 그 모든 변화가 두려웠던 거예요.
네.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더 깊숙이, 지하세계로 내려갔겠죠. 말도 잃어버리고, 눈도 멀어버리고, 손톱과 이빨만 날카로워져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거예요.
네.
생각해봤는데요.......누군가와 꼭 자야 한다면, 그때 나는 당신과 자고 싶어요.
음. 왠지, 고마운걸요.
네. 진심이에요.
그래도 채찍으로 맞는 건 사양! 절대로, 사양입니다!
후후후후. 그건 농담이었다구요.
정말?
네.
그렇구나. 휴.. 뭘까요, 이런 아쉬운 심정은.
하지만 이왕 묶는다면, 역시 간호사복을 입히고 싶어요.
하하. 그물 스타킹 신고?
응!
어디선가가 바람이 불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지하철이다. 지하철이 왔다가 떠난다는 걸, 나는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난다 씨.
네.
그래도 야미쿠로는 싫어요. 내가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네.
그러니까 인간이 돼서, 다시 한번만 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