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후.
삼식이가 기숙사로 방을 옮기고 영어 공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 달호는 사랑에 목마른 하이에나가 되간다.핸드폰의 문자는 언제 배웠는지 빠른 속도로 마음을 전하는 통신 수단이다.이미 다른 사람들은 음성 인식이니, 화상 폰이니 하는것으로 정보를 주고 받고 있는데 배운게 삽질인 달호는 문화의 속도를 잡지 못하는지 아직 서툴다.아니면 이런 문화가 싫은지도 모른다.삼식이가 연거푸 내뱉는 고부랑 글씨보다 콩글리쉬에 익숙한 달호는 사랑이의 행동 하나 하나가 궁금하기 시작한다.
시내에 작은 동네 영화관이 생겼다.작은 마을에 고작 있어봐야..큰 마트 1개, 편의점 두어개,10년 전 유행했던 비디오 방 몇개, 변퇴 업소가 되 버린 노래방 몇개, 이것이 전부여서 달호와 사랑이가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고작 놀이 공원 의자나 영화관, 먹고 죽어라고 만든 페스트 푸드 점을 드나들곤 한다.
비디오 방은 말 그대로 방이다.입맞춤이나 해대며 사랑을 확인하듯 입술을 삼켜버리는 곳.요즘엔 중고딩도 버젓이 이용하는 애정행각의 장이 되버린지 오래다.그것도 옛날 얘기가 될 것 같다.달호 방에는 40인치가 넘는 액자식 tv가 24평 아파트를 꽉 채우고 있다.험상 궂기까지한 그 놈은 밤이면 큰 소리로 재잘 거린다.그 소리에 놀라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사람도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그래도 영화관 같이 웅장한 곳에서 봐야한다고 늘상 얘기하는 사랑이의 요구에 못 이긴척 달호는 극장으로 향한다.
"오빠 ,나 잘생긴 남자 배우 나오는거 있잖아 그거 보고 싶어."
"응, 그래. 그거 볼까?"
"오빠는 뭐 보고 싶은데?"
" 난, 맨날 울고 징징거리는거 싫은데.더운데 시원하게 액션이나 보자?"
"난,싫어!?"
"그럼 아무거나 봐"
달호의 무딘 성격이 사랑이를 건드린다.
"남들은 여자가 보자면 무조건 보자고 하던데.오빤 왜 그래?"
벌써 사랑이의 눈은 고양이도 삶킬 듯 한 모습으로 변한다.
"아니, 보고 싶은거 아무거나 보자는데 왜 화를내?"
극장 앞에서 30분 동안 실랑이가 오가다 결국 들어간 곳은 패스트 푸드점이다. 먹어라 먹고 죽자. 기름에 튀긴 음식들이 나오고 죽어라 먹는다.사랑한다면서 화내고 살뺀다면서 먹는 패스트푸트는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후식으로 콜라까지 곁들이며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나오는 첫 마디가 '꺽'이다.곳 죽겠다는 소린가!
5년전에 독극물 사건으로 안먹던 콜라,어느샌가 다정한 이웃 사촌으로 다가온걸 보면 한국 사람은 망각을 잘한다.15년 전 삼풍 사건도 잊혀지고 성수 대교 붕괴 사건도 그렇고 효순 효선양 사건도 그러하고 . 달호는 세월이 모든걸 지운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안다.
"있잖아!미안해,내가 사랑이 화나게 해서"
"됐어, 나 영화 안봐"
"그러지 말고 보자. 응"
"보기 싫다니까."
"자꾸 그럼 나도 안본다"
"그래 보지마"
고개를 돌려서 어느새 열발 자국 앞서 간다.'집으로 가려나 보다'
달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혹시나 하고 따라간다.천천히 뒤를 따르고 가는데 어느새 큰 호랑이 한마리가 달호 앞에 서있다. 붉은 불을 뿜고 용머리를 흔드는 듯 다가서서 말한다.
"왜 붙잡지 않는거야?"
"왜 날 무시하는 거야?"
"........." "화내지마! 그렇게 화낼것도 없잖아""언제 무시했다고 그러는 거야"
사랑이와 달호의 사랑 싸움은 참 별라게도 한다. 다른 연인들도 그렇게 한다고는 하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달호의 고개는 허공을 젓고 있다."집에 들어가! 사랑아!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울분을 삼키지 못한 듯 사랑이는 택시에 몸을 싣는다.목젖을 간지럽히는 연기만 뿜어대고 눈 앞에서 사라진다.
터벅 터벅 무거운 발걸음이 천근 만근이다.그냥 보낸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들었는지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나 달호야! 미안해"
"됐어"
뚜뚜뚜......참 길게만 느껴진다는 듯 달호는 이미 석고상이 되버린다.'이게 정말 사랑일까!'
삼식이가 그리운지 한숨섞인 전화를 한다.
" 장도사,나야! 데이트 잘하고 있냐?"
"응,영화 보고 있슈"
"잼있냐? 난 영화 못봤다."
"또 싸운겨? 어지간 허다!"
"너네는 안싸우냐?"
"응, 지금까지 한 번도 안싸웠지?"
"그래, 재밌게 봐라"
'사랑은 저렇게 하는건가' 달호는 말끝을 흐리며 전화를 끊는다.
'몇 일 후면 추석인데 앞 두고 이게 뭐람.'
달호는 전전긍긍하며 화 풀어줄 묘안을 생각하는 듯 피식 웃으며 허벅지를 친다.'그거야!"
어떤 놈들은 사과 박스에 돈을 많이도 담아 넌다던데 사과 몇 개 담겨 있는 박스를 들고 헐떡거리며 차에 모셔간다.
"띵동 띵동"
"누구냐?"
"사랑이 친군데요?" .굵은 목소리의 남자, '누구일까!'오지가 후들거리고 코 끝이 시큰한지 달호는 또 한번 석고상이 되버린다. 문 앞에 박스를 놓는대신 사랑이와의 짧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빠 헤어져!"
낙뢰가 피뢰침을 부수는지 상상도 못했다는 듯 말을 잊지 못한다.사랑(?)에게 받은 이별 통보라..집 앞을 배회하는 강아지 새끼마냥 돌아가지 못하고 우둑허니 서있다.
'난 어떡하라고.......'
정전이 되었는지 온통 새까맣게 어둠이 찾아오고 도둑 고양이 한마리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