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먼저 용서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원흉인 히틀러의 수하로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한 아이하만이라는 사람이 있다. 1968년 이 사람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드디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아이하만의 사형을 당연하게 여기고 어느 누구도
동정을 하지 않았다.
그때에 뜻밖에도 한 유대인이 사형을 반대하며 일인 시위를 했다.
꼴란즈란 이름의 이 유대인은 아이하만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말 같지 않은 행동일 수밖에 없는데도 이 사람은 그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아이하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유대인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둘때, 사형시키기 않고 내버려두어도 다른 사람이 죽듯이
아이하만도 자연적으로 죽을 것인데 구태여 죽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영혼을 심판하셨는데 우리가 그의
몸뚱아리를 죽인다고 무슨 득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넷째,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정죄한단 말이냐, 우리가 누구를 죽이고
살릴 만큼 정당하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유보다 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섯째로 그는 말하기를,
'참사랑이 없는 이 세상에 이제부터라도 참사랑을 심어가야 하지
않느냐? 누군가는 먼저 용서를 해야 사랑이 시작되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하만을 석방하라고 데모를 한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서방 세계의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면 값싼 동정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갈 일이다. 그러나 유대인이요 피해를 당한
당사자라는 것이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한다.
우리에게는 용서가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없다.
상대방이 용서를 빌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 정도로 도덕적 사치를
부릴 수는 있지만, 내가 먼저 용서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끝없이 비난하고 싸움을 지속한다.
분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가 내게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베푸는 것을 마치 범죄 행위처럼
여긴다.
사실과 이치를 들먹이며 왜 내가 용서할 수 없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강변한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대방도 당신이 말한 것처럼 똑같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쪽도 내 입장이 되어 보라고 한다.
그럼 누가 먼저 용서해야 하나?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영원히 비난하면서 평행선을 달려야 한다. 얼마나 힘겹겠는가?
내가 조금만 숙이면 되는데 그것을 못한다.
'누군가는 먼저 용서를 해야 사랑이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빠진 모든 노력은 헛수고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을 조롱이나 하듯 세상이 여전히 시끄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만 뺴고 해결을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해결책이 답이 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엉뚱한 수고를 하고 있으니 결과는 항상 뻔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언제까지 미움과 분쟁을 계속해야 하나?
왜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진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먼저 용서해 사랑을 회복했다면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누군가 먼저 용서의 손을 내밀어야 할 때
당신이 그 주인공이 된다면 패자가 되는 것인가?
-박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