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페트(The forbidden pet) -
이 름 배진국
제 목 금단의페트 - promise -
Chapter 1. 엘프들의 숲.
어느새 완벽하게 여름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은
쏘아진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그 동안 나는, 기르디녀석에게 구박받으며 - 왕자녀석에게
매일 깨지기도 하며 - 그렇게 검술을 배우기도 하고, 가식적
인 웃음을 짓고는 손님들과 능청스럽게 농을 나눌 수 있을 정
도로 식당 일을 하기도 했으며, 시아녀석과 함께 셀브렛녀석
에게 글자를 쓰고 읽는 법과 간단한 여러 지식들을 가르치기
도 했다.
뭐, 생각해보면 큰 사건 없이 한가롭기만 한 일상이었지만
말이다.
"여름 방학…."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나는 근처에 있는 리체녀석과 엘리녀
석 그리고 몇 명의 여자아이들이 떠들며 어울리고 있는 곳을
향해, 멍하니 시선을 고정시켰다. 기숙사에서 머물고 있는 아
이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있는 방학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렇게 무더운 여름이라면 가르치는 선생들도 짜증이 날 테니
까.
그나저나, 빨리 계획을 세워두지 않으면 곤란할 텐데 말이
다. -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니,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무엇
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텐데.
"근데 무엇을 하냐는 거지."
검술연습? …지긋지긋하다.
식당일? …차라리 셀브렛녀석과 노닥거리는 게 낫지.
마법훈련?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던가 말던가. - 언
제가 한번 아이린씨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니까, '엘프
어 먼저 배워야 할텐데?'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말이다. 그냥
포기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책 읽는 것도 지긋지긋하니까. 무엇인가 조금 활동적인 일
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
"우우-."
자학하는 듯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는 조금은 한심
스레 그렇게 비음을 흘리자, 갑작스레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허리 위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뭐, 나에게 이런 일을 저지를 녀석이라면, 이 학교에 단 한
명뿐일 테니까. 내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앉아있는 상태 그대로 휙-하고 상체를 빼버리자, 내 허리에
손을 올리며 지탱하고 있었던 누군가의 균형이 흔들리는 것은
'밥 안 먹으면 배고프다.'정도로 당연한 사실인 것이다.
"으윽, 위험하잖아!"
나지막이 "아깝군."하고 중얼거린 후, 나는 똑바로 리체녀
석의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 여학생들과 떠들고 있
었던 걸로 아는데. 넘어지지도 않고 금새 균형을 잡은 것만
봐도, 확실히 리체녀석이 운동성 하나는 평범하지 않은 것 같
다.
"저는 지팡이가 아닙니다."
"쳇, 사내가 돼서 소심하기도 하셔라."
신경질적으로 뭐라고 더 중얼거리더니, 곧 다시 여학생들과
웃고 떠들며 즐거이 수다를 떠는 단순한 리체녀석이었다.
'저런 녀석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렇다. 며칠 후면 소중한 자유시간을 얻을 수 있는 여름방
학인 것이다! 확실히 계획을 세워두지 않으면, 방학 내내 방
에서 뒹굴며 그렇게 바보같이 시간을 허비할지도 모르는 것이
다! - 뭐, 나름대로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으음, 왕자에게 좀 더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워볼까? 아이린
씨에게 엘프어를 배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윽, 내가 이렇게 할 일 없는 녀석이었나."
머리를 감싸쥐며 고민해봐도 그렇게 좋은 선택은 생각나지
않았기에, 왠지 나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 그러니까 여행준비를 해라."
"네에?"
식당영업이 끝나고 열심히 왕자와 대련을 하고 있을 때에
기르디녀석이 다가와서 뭐라고 설명을 하는 것을 한 귀로 흘
려듣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갑작스레 기르디녀석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여행준비를 해라.'라고 말한 것이다. - 그런 까
닭에 나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 …."
정말 죽일 듯이 날 노려보더니, 다시 입을 여는 기르디녀석
이었다. - 예전 같으면 바로 주먹이 날아왔을 텐데, 그래도
최근 사이에는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널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고 했다."
"학교는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아직 방학도 되지 않았는
데."
휴, 하고 작은 한숨을 쉬어 보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사라
지는 기르디녀석, - 마음 같아서는 붙잡은 후,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었으나 목숨은 하나였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그런 나를 흘겨보더니 말없이 칼을 휘두르며, 연습을 재개
하는 왕자녀석이 새삼스레 얄미워 보이는 것을 왜일까.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집중해서 듣는 건데.'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평범한 잔소리
겠지'하고 생각하며 무시한 것이 실수다. '갑작스런 여행'에
대한 사연은 아이린씨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만, 기르디녀석이
삐진 것은 정말 오래가며,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말이다. -
엘프랑 인간이랑 시간관념 자체가 틀린 덕분이겠지만.
노크를 한 후 아이린씨의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예
상치 못하게 시아녀석과 함께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셀브렛녀석이 보였다. 불만 있는 듯 조금은 입이 튀어나온 셀
브렛을 품에 안은 아이린씨와 함께, 모두들 잠옷 차림이었기
에 새삼 얼굴이 붉어져 오는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쫑긋 솟아오른 귀 - 푸른 색
줄무늬의 잠옷을 입고 있는 셀브렛녀석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은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녀석의 대비해서 맛있는 먹이 감을 품에 안은 포식자
의 그것과, 유사한 눈빛을 가진 아이린씨가 한껏 기쁜 듯 웃
으며 입을 열은 것이다.
"으응. 여행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듯 그런 아이린씨의 등뒤에 몸을 숨기고 조금
은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시아녀석과, 숨막히는 듯 아
이린씨의 품안에서 창백한 얼굴을 한 셀브렛녀석의 눈을 무시
하며, 그렇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오빠가 말 해준 대로야. 시아와 너를 보고 싶어하시는 분
이 계시거든. 조만간 식당으로 누군가 데리러 오겠지."
그 '분'이란 작자의 정체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
리고 학교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불확실한 것 투성이다.
"모르겠군요. 어디를 가는 것인지, 왜 가는 것인지. 학교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덕분에 조금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아이린씨에게 불
만을 표시해 보는 것이다.
"뭐 학교는 어떻게든 손을 써보면 되니, 걱정하지 않아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
확실히 아이린씨나 기르디녀석이나 굉장히 능력 있는 엘프
들이었으니까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꼭 알아야 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이란 것 덕분
에,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디에 가는 겁니까?"
"간단히 말해서 엘프들의 숲이라고 할까?"
엘프들의 숲이라. 대충 짐작 가는 곳이기도 해서 고개를 끄
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엘프들의 숲 - 에르쥬나'…."
대륙에서 유일한 엘프들의 도시, 그곳이 바로 엘프들의 숲
- 에르쥬나인 것이다. 내 예상이 맞았던 모양인지 아이린씨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셀브렛녀석을 힘주어 껴안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여하튼 여행 간다고 해도 그리 길진 않을 테니. 너
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뭐 특별하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인사를 하고
는 천천히 문을 연 후 아이린씨의 방을 빠져나갔다. - 물론
셀브렛녀석의 애원하는 듯한 눈빛은 무시하며
영업이 끝나고 슬슬 검술연습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에, 식
당의 문이 열리며 깊게 후드를 쓴 두 사람이 실내로 들어왔
다.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만."
가끔씩 야밤에 엉망진창으로 취해서 횡포를 부리는 녀석들
도 있었기에 조금은 못마땅한 어조로 말하는 나였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키가 크고 덩치도 있어 보이는 짙은
검은 색 후드를 뒤집어 쓴 작자가 고개를 들어올리며 입을 열
었다.
"기르디님을 불러주게나."
기르디녀석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평범한 손님은
아닐 것 같았기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주방으로 걸음을 움
직였다.
잠시 후 내가 기르디녀석과 함께 돌아왔을 때에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엘프는 얼굴을 가릴 정도로 깊게 눌러 썼
었던 후드를 한 쪽에 벗어 놓고는, 의자에 앉아서 조금은 멀
리에서 걸어오는 나와 기르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인가."
다크엘프. 척 보기에도 알 수 있는 외모였다. 짙은 붉은 색
의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눈치 챌 수 없었지만 말이
다.
지극히 단정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외모. 다크엘프라는 이
미지에 비슷한 모습이라고 실없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긴 은
발이 허리까지 내려와 어두운 얼굴과 대조적인 모습, 두터운
로브를 입었다고 해도 몸의 굴곡으로 봐서는 확실한 여성이
다.
"확실히…."
순간 무엇인가 기르디녀석의 눈에 '당혹'이란 감정이 엿보
였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오랜 시간동안 같이 지내서 느낄 수 있었다. 기르디는 적지
않게 동요하고 있다.
"이번에는 적이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기르디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그 다크엘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길 안내 역할이니까 말이야"
나와 시아녀석을 안내해주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는 것인가,
저 다크엘프가? 굳어있는 기르디녀석의 얼굴을 봐도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으니 조용
히 하고 있는 수밖에 없었지만.
'기르디녀석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니 대단하군.'
적어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저 다크엘프가 대단
하다는 뜻이 될 테니까. - 물론 약간의 빈정거림은 섞여 있었
지만.
상당히 긴 여행을 했었던 모양인지, 피곤한 기색으로 아무
말도 없이 빈방으로 걸어가는 다크엘프와, 덩치 좋은 양반이
었다 . - 이 식당에서 지낸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식당의 위
치를 파악하고 있을 정도니.
기르디녀석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살짝 코웃음치고
는 주방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잠시 후, 홀로 남은 나도 검술
연습을 하기 위해 천천히 왕자가 있는 뒤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