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페트(The forbidden pet) -
이 름 배진국
제 목 금단의페트 - promise -
"인간 매니아?"
생소한 단어에 나는 조금은 당황한 눈을 하고, 티레스를 마
주 바라보았다. 간단하고 편해 보이는 옷을 갈아입은 두 소녀
들은 내 오른쪽 근처에서 힘없이 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네네. 베리오빠가 온다고 델리만님이 말씀하셨을 때 제일
흥분한 녀석이기도 하죠. 어젯밤도 글쎄 뭐시기 인간 용사가
나오는 책을 보느라 한숨도 못 잔 것 같아요. 지금도 졸면서
걷고 있네요. 신기하기도 해라."
말하는 티레스 자신도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듯, 입
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단잠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운 거 같아 조금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나중에 사
과하기로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인간을 좋아하는 거지?"
"예전에 이 녀석이 엘프주제에 길을 잃고 숲을 헤맸을 때,
어떤 인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엘프를 동경하는 인간들은 많이 보았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기에 조금 놀라운 것이 사실이었다. 내
가 이 숲에 온다고 했을 때 제일 흥분한 엘프가 저 아이라니,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고 말이다.
"대화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매일 중얼거렸는데, 소원은
푼 거 같네요."
내가 유명인사라도 된 거 같아서 킥킥-하고 웃음이 새어나
왔다. 그런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걸음을 걷는 티레스.
"하아품-. 열 시간도 못 자서 조금 졸리네요."
"열 시간이라."
"전 그 정도는 자야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구요."
잘한 것이 있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하는 티레스. 평
범하디 평범한 나 같은 녀석에게는, 그런 뻔뻔함에 질린 눈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대충 건물의 내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곧 아침식사 시간이네요. 밥 먹고 몇 시간 정도는 더
자야할 것 같은데."
내가 머물던 방의 문 앞까지 돌아와서 티레스는 졸린 눈으
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나도 잠이 조금 많은 편이긴 하지
만 저 아이는 정도를 넘어선 것 같군. 잠을 많이 잔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 그 정도면 꽤 괜찮은 것이겠
지. 세상에는 별 해괴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녀석도 많으니까
말이다.
"단잠을 깨워서 미안하군, 그럼 기회 되면 나중에 또 보기
로 하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졸린 눈으로 자신의 방을 향해 천
천히 걸아가는 티레스. - 반쯤은 질질 끌려가는 세레스의 모
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굉장히 배가 고팠긴 하지만 이제 곧 식사시간이라고 하니
근성을 발휘해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침식사 후, 가벼운 운동. 그리고 좀 빈둥거리다 점심을
먹었다. 처음 왔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이 도시는 참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엘프들이 나와 시아에게 상냥하
고 친절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델리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라고 짧게 답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라니,
조금 무책임한 발언 아닌가? 차라리 무엇이라도 일을 시켜주
는 것이 나 같은 녀석에게는 더 편하단 말이다. 가만히 방에
서 농땡이 부리는 것도 좋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곳까지 와
서 궁상떤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들이 정령마법을 배우는 것을 보기 위해
학교 비슷한 곳에 와 있었다. 학교라고 보기에는 조금은 지나
치게 아담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듯 했지만, 여하튼 '선
생'이라고 말 할 엘프가 있고 '학생'이라고 말 할 엘프가 있
으니 그걸로 족한 것이다. 굳이 배움이란 것에 형식을 찾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스무명 정도 들어가면 꽉 차버릴 정도의 공터와 칠판 한
개, 이것이 이 학교의 전부였다. 청년엘프는 아이들과 공부에
도움되는 말보다는, 일상적인 잡담을 더 많이 했으며 수업은
자유롭기 그지없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아무 말 없이 일
어서 가면 되는 것이고, 질문이 있으면 굳이 손을 들지 않고
그냥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세레스는 수업보다는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는 날 더 의식하
고 있었고, 티레스는 선생님 몰래 단잠을 자느라 정신이 없었
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둘은 쌍둥이였다. 인간들이라면 모르
겠지만 쌍둥이라는 것이 엘프 세계에서는 굉장히 흔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저 둘은 도시 내에서도 꽤 유명한 편이라고
한다.
사실 규모가 적을수록 결합력이라던 지, 친목 같은 것은 튼
튼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살고 있는 수도
내에서는 근처에 살고있는 이웃의 이름과 얼굴도 제대로 기억
하기 힘들다. 사람이라고는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생판 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엘프들의 숲 같은 경우는 수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도 적고 규모도 아담하다. 게다가 엘프들은 인간
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수명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
다. - 사실 수 십, 수 백년 동안 살면서 그런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오크만도 못한 종족일 것이다.
여하튼 인간과 엘프의 정확한 생물학적 차이라는 것은, 생
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파지는 문제니 그냥 신경 끄고 사는
게 현명할 것이다. '왜 엘프들은 쌍둥이가 흔하지 않은 것인
가?', '엘프들의 장수의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고민
하는 것보다는, '오늘 먹을 저녁메뉴 무엇인가?'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될 테니
말이다.
멍하니 실없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수업은 끝나있었다.
모든 엘프들은 삼삼오오 패거리를 이루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
한 발걸음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무엇인가 처음 데이트할 때 여자친구의 부모에게 인사를 건
네는 애송이 소년 같은 말투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레스가 얼
굴 가득 홍조를 한 체, 빛나는 눈을 하며 날 바라보고 있었
다.
역시 이 아이들과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미소지은
얼굴로 세레스에게 대꾸했다.
"응, 안녕. 이제 수업이 끝났으면 돌아갈까?"
어색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세레스.
"졸려. 집에 돌아가서 조금 더 자야겠어."
티레스는 수업 내내 졸았으면서도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듯,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여하튼 그 두 소녀들의 손을 마
주잡고 천천히 돌아가기 위한 걸음을 움직이는 나였다.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 저녁식사 시간이다. 풍성하게 차
려진 테이블의 음식들을 바라보며 세레스가 입을 열었다.
"엄청난 메뉴네요."
엘프들은 인간에 비해 조금은 소식하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저 아이들이 놀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겠
지만.
뭐 쓸데없이 혈기왕성한 인간 청소년들이라면, 이 정도 먹
는 것은 평범한 수준이 될텐데 말이다.
빵과 고기, 샐러드, 으깬 감자요리, 과일로 만든 상큼한 맛
의 마실 것들. 모두가 군침 도는 맛있는 것들뿐, 적어도 나는
소중한 음식을 남기는 것은 천벌 받아 마땅한 파렴치한 행위
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 만든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배
불리 먹어 치워주는 것이 예의겠지.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으로 스프를 한 입 떠먹어 보았다. 야채의 향이 몸
전체로 퍼지는 것 같아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향신료나
재료의 신선함 같은 것들의 차이덕분인지 몰라도 모든 음식이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맛있는 편인 것이었다.
조용하게 식사만 하는 것도 어색하고 해서, 두 엘프 쌍둥이
자매들에게 입을 열었다.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이지?"
입안 언저리에 샐러드를 머금고 세레스가 초롱초롱한 눈으
로 날 바라보며 답변했다.
"제가 언니죠, 근데 티레스는 죽어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
요."
"왜 내가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건데, 그깟 몇 초 늦게 태
어났다고."
뭐 하긴 꼭 언니라고 부를 필요성은 없겠지. 일 년 이상 차
이나도 반말하며 지내는 형제, 자매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
하지만 세레스는 그런 티레스의 말이 그리 맘에 들지 않는 모
양인지, 조금은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괜히 이런 문제로 싸
움 나게 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말을 돌리기 위해 다시 입을
여는 나였다.
"근데 티레스는 왜 그렇게 잠이 많아?"
"모르겠어요. 심할 때는 꼬박 하루동안 침대에서 잠만 잔
적도 있어요. 지금은 날이 춥지 않아서 그렇지, 겨울이 되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별명도 '곰돌이'인 걸요."
세레스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순식간에 그렇게 줄줄이 말
하자 이번엔 또 티레스가 화가 난 것 같았다. 입을 내밀며 세
레스를 노려보는 티레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 같아서 조
금 미안하기도 해오는 순간이었다.
괜히 더 이상한 소리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묵묵히 음식만
먹기로 작정했다. 뭐 어렸을 때는 저렇게 싸우기도 하면서 지
내는 게 더 정상적인 것일 테니 말이다.
시아녀석이 식욕도 없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두고보기로 하고 묵묵히 음
식을 먹는 나였다.
'근데 내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델리만의 목적은 시아에게 있는 것, 나는 같이 딸려서 온
덤에 불과하다. 뭐 특별히 이곳 생활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
니었지만 그래도 왕자녀석을 따라 잡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검
술을 연습해야 하는 데, 이곳에서는 가르쳐 줄 사람은커녕 연
습하기 적당한 곳을 찾기조차 힘들다. 덕분에 화가 나는 정도
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지내기가 거북하고 답답했다.
멍하니 방에만 쳐 박혀 있는 것도 지친 나머지, 델리만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기 위해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식당으로 돌아가면 등골이 휘어지게 일을 해야겠지만, 지금
이렇게 멍하니 허송세월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보다는 힘들고 보람찬
일상을 택하겠다. 대충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힘차게 델리만
이 있는 방의 문까지 걸어나갔다.
'똑똑-'
마음을 각오한 것에 비하면 굉장히 작은 노크소리. 그것은
델리만이라는 엘프를 내가 조금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 같
았다. -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는 것 같은 그의 탁한 눈은 왠
지 모르게 똑바로 마주치기가 힘들다. 뭐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약해진다고 할까?
"들어오게."
기별이 오자마자 몸 안 가득 기합을 넣고 힘차게 문을 열었
다.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왔으나, 방안에 델리만을 제외
하고 또 다른 엘프가 있다는 것에 다시 주눅드는 나였다.
엘프치고는 드물게 장신인 편인 그 사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잠시, 그 장신 엘프를 탐색하느라 대답해야할 타이밍이 조
금은 어긋난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델리만의 눈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옆의 이 녀석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무슨 일인가?"
뭐 한 사람 더 늘었다고 괜히 쫄아서 도망갈 내가 아니지.
목숨의 위험을 받고 있다고 해도 남자로 태어난 이상 해야할
말은 꼭 해야하는 법! 그렇게 마음 속으로 다시 한번 기합을
넣고 입을 열었다.
"식당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뭐 불편한 것이라도 있는가. 망설이지 말고 말해보게."
"아뇨, 이 곳 생활의 불만은 없습니다. 단지 개인적인 이유
입니다."
순식간에 작은 방에 정적이 찾아왔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기 때문에 어찌 됐든 후회는 없었다. - 설마 '안 돼! 넌 여
기에서 방학 내내 궁상 떨어야해!'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테
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고 말이다.
"개인적인 이유라…. 알려줄 수 없는 것인가?"
"아뇨, 일단 검술 연습하기에 이 곳은 그리 적합하지 않
고."
"검술연습? 이곳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델리만이 살짝 미소지으며 내 말을 잘랐다.
"좋네. 필요하면 오늘부터 이 대륙 손가락에 꼽히는 검술을
배우게 해주지, 그럼 불만은 없는 건가?"
"아, 그러니까."
"운이 매우 좋은 편이군. 이 녀석이 인간세계에 물들어서
성격이 이상하긴 하지만, 검술 실력만은 기르디 이상 가는
녀석이지. 몇 년 동안 무슨 북방의 야만인들과 같이 생활하다
가 방금 막 돌아왔는데 말이야."
으윽, 이 늙은이가 사람 말할 틈을 안주네. 쉴새없이 중얼
중얼 거리는 델리만을 바라보며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나였다. - 평소에 과묵해 보였던 것도 다 위장이었던 말인가?
"반가워, 난 카이츠라고 한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오른손을 내밀며 내게 악수를 청하는 카이츠라는 이름의 엘
프. 역시 엘프 특유의 모습으로 남자인 내가 볼 정도로 '아름
답게' 생긴 편이었지만. 하도 그런 녀석들과 같이 생활한 나
같은 녀석에게는, 그런 사실 정도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
다. 막말로 오크같이 생긴 녀석들과 평생 살다보면 '추함'이
라는 것도 적응하기 마련이니까.
"카이츠, 거절하진 않겠지?"
델리만이 쏘아보며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뒤통수를 긁
적이는 카이츠.
"네, 해보겠습니다."
으윽. 젠장!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내가 '그래도 전 식당에
돌아가야 합니다!'하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 검술 연습
을 해야 합니다, 말고는 달리 변명을 할 건덕지가 없었기 때
문이다. 이제 방학이 시작되었으니 수도에 돌아간다고 해도
마땅히 할 일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으니.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저 카이츠라는 엘프에게 검술을 배
운다는 것이 조금은 기대되었다. 기르디라는 녀석과 대적할만
한 실력을 가진 존재가 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
지 못했는데, 그 이상 가는 실력이라니. 저 델리만이란 엘프
가 뭐 이득이 있다고 나 같은 녀석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
을 테고.
"잘 부탁드립니다."
쳇, 이왕 이렇게 된 거 철저하게 한번 배워 버릴 테다. 나
를 놀라게 하려면 적어도 드래곤 정도는 대적할 수 있어야 할
테니, 각오 단단히 하라고 카이츠라는 엘프 씨.
"그래, 잘 해보자."
인상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카이츠라는 엘프는 날 바
라보고 있었다. - 어쩌면 방학 내내 이 숲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