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위례성의 실체와 계루부 집단의 망명 경로
백제를 건국한 계루부의 망명 집단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한반도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은 백제의 초기 역사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 과정과 마찬가지로 백제 건국세력의 망명 경로에 대해서도 몇 가지 다른 견해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백제의 망명 경로와 초기 정착지에 대한 사학계의 해석이 분분하다. 많은 학자가 다음의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의망명경로를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비류와 온조는 자신들이 태자(유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비류와 온조)은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하였다.
"이 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 같은 천혜의 땅은 다시 얻기 어려우니, 이 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를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거기에 머물렀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서기전 18년)이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비류가 이끄는 계루부 망명세력은 우선 남쪽으로 향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유리의 즉위에 반대한 계루부 망명세력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자신들의 터전인 졸본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처음에 도착한 곳은 한산이었으며, 도읍을 정하기 위해 부아악이라는 곳에 올라갔다. 부아악에 올라간 그들은 도읍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의견 차이로 양분된다. 동생인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에 정착하고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정착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여기에 등장하는 한산을 북한산, 부아악을 인수봉으로 보고 있으며, 미추홀은 인천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남 위례성이 한강 북쪽에 놓이게 되어 하북 위례성이 된다. 이런 혼선은 『삼국사기』본문의 기록이 위례성이 한수 북쪽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미추홀을 인천으로 보는 것은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미추홀을 충남 아산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이 이처럼 혼선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남을 한강 남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당연히 계루부 집단의 망명경로는 졸본을 떠나 동쪽으로 향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현재의 서울 지역에 당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서울에 당도한 그들 세력은 온조파와 비류파로 갈라져, 온조파는 한강을 건너 강남에 자리를 잡고 비류파는 거기서 더 서쪽으로 가서 바닷가에 위치한 인천에 정착해야 한다. 그런데 이른바 강단사학의 주류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주된 근거 사료인 이 같은 기록을 무시하고 『삼국사기』본문에 의존하여 한산을 한강 북쪽의 북한산으로, 부아악을 북한산의 최고봉인 인수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남' 을 '한강 남쪽' 이라고 해석하면서 한편으론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다 설정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리를 전개시킨 것이다.
하남을 '한강의 남쪽' 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 는 위례성에 대한 설명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온조는 이 같은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한강 남쪽에 도읍을 정하지 않았으며, 위례성 역시 한강 북쪽에 건설했다. 다음의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 13년, 14년, 15년의 기사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입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근래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나라의 형세가 불리하니 필히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그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이주 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대해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15년 봄 정월, 세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이 기록들은 온조가 처음에는 한수 북쪽에 도읍을 세우고 위례성을 건설했다가 온조 13년인 서기전 6년에야 비로소 한수 남쪽으로 옮겨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온조 17년 봄인 서기전 2년의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는 기록과 온조 41년인 서기 23년 2월의 '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되는 장정을 선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는 기록을 통해 위례성은 새 도읍지에서 바라볼 때 한수 동북방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는 새 도읍지가 위례성으로부터 한수 서남쪽에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온조가 처음부터 한수의 남쪽에 위례성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뿐만 아니라 위례성의 입지에 대한 설명 역시 조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히려「백제본기」 온조 편의 도입부에 있는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바다로 막혀 있다.' 는 내용은 위례성이 아닌 한강 남쪽의 새 도읍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조작된 기사가 등장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최초로 백제의 역사가 기록된 순간이 언제인지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백제가 최초로 역사서를 만든 것은 근초고왕 30년인 375년이다. 『삼국사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기고 있다.
근초고왕 30년, 『고기』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는 건국 후 약 400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역사서를 편찬한 것이다. 이 사실은 건국 당시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처지에서 역사를 기술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기』를 바탕으로 『삼국사기』가 편찬됐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백제의 첫 도읍지가 '하남의 위례성' 이라는 내용이 쓰였다. 『삼국사기』편찬자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통해 백제의 위례성을 한수 북쪽에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이 '하남의 위례성' 을 고의적으로 설정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따라서 '하남의 위례성'은 『서기』또는 『고기』에 적혀 있는 내용을 『삼국사기』편찬자들이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남이 사학계 일각의 주장대로 한강 남쪽을 가리킨다면 위례성은 한강 남쪽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위례성이 한강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하남의 위례성은 한강과는 무관하며, '하남' 이 '한강의 남쪽' 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는 '하남(河南)' 의 '하(河)' 가 한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이를 증명하듯 한강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광개토왕릉비문' 은 한강을 '아리수' 로 표기하고 있다. '아리수'는 고구려말로 '큰 물' 이라는 뜻이며, 이를 한반도 토착어로 바꾸면 '한물' 이 된다. 이를 다시 한자로 표기하면 '한수(韓水)' 또는 '한강(韓江)' 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이를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 이라고 썼고, 이를 한자 뜻대로 풀이하면 '한(漢)나라의 강' 이 된다.
우리말의 '아리수' 또는 '한물' 이 '한나라의 강' 이 된 것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 이후의 표기일 것이다. 『삼국사기』편자들은 통일신라 이후의 표기법에 따라 아리수를 '한강(漢江)' 또는 '한수(漢水)' 로 표기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말의 '큰 물' 이 '한나라의 물' 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하(河)' 라고 하면 흔히 황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때문에 백제의 첫 도성인 하남의 위례성은 한강의 남쪽이 아니라 황하의 남쪽에 건설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편자들이 백제의 땅이 대륙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뿐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일과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을 마구 뒤섞어 놓은 점을 감안할 때 하수(황하)와 한강을 같은 곳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남의 위례성' 이라는 용어는 이 같은 추론에 가장 확실한 단초를 제공한다. 백제 건국 당시 '하남' 이란 곧 '하수의 남쪽' 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의 중국 하남의 산동성 지역을 일컬었다. 그렇다면 '하남의 위례성' 이란 말은 한강의 남쪽 위례성이 아니라 하수의 남쪽 위례성을 의미하게 된다. 한반도의 한강 남쪽에는 위례성이 건립된 적이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들 역시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은 백제의 최초 정착지가 중국 황하 남쪽이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탁)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백제가 처음에는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쓰고 있으며, 『삼국사기』편자들은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다만 보충적인 의미로 덧붙여 놓았다.
또 이 기록을 바탕으로 사학계 일각에서는 대방의 옛 땅을 한반도의 황해도 일대에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이른바 '한반도사관' 에 한정된 시각이다. '동명의 후손 구태(九台, 혹은 구이)' 를 제8대 고이왕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는 단순히 '구이'와 '고이' 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의존한 억측 논리이다.
대방의 옛 땅은 한나라의 무제가 서기전 108년에 조선을 치기 위해 설치한 전진기지인 4군 중 진번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한반도의 황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의 황하 남쪽, 즉 하남과 산동 일원에 설정 되어야 하며('온조왕 시대의 주변 국가들' 대방 편 참조), '구태' 는 망명세력을 이끌었던 비류왕의 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온조파와 비류파의 왕위 다툼' 참조).
다음의 기록들은 백제가 처음에 황하 남쪽의 대방 옜 땅인 진번 지역에 머물렀다는 추론에 더욱 확신을 더해준다.
책계왕 원년(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 왕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했기 때문에 왕은 "대방은 우리와 옹서간이 되는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책계왕 13년(298년), 한(漢)나라가 맥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한(漢)' 은 서진 말년에 흥기한 흉노 귀족 유연의 세력을 일컫는 것으로 이들이 백제를 침략했다는 것은 백제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대방에서 왕비를 간택했다는 것은 대방 땅 또는 대방 주변에 있었다는 뜻이다(「고이왕 실록」 '백제의 대륙 진출 과정과 그 증거들' 참조). 대륙에 진출한 백제가 대방과 이웃하고 있었다면 대방은 당연히 대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백제가 건국 초기에 대방 옛 땅에 머물렀다면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은 하수 남쪽의 대방 옛 땅, 즉 진번 지역 근처에 설정될 수밖에 없다.
백제가 황하 남쪽의 하남에 정착했다는 것은 『북사』와 『수서』의 '처음에 1백 가구가 바다를 건넜다고 하여 백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는 기록을 통해서 더욱 확실해진다. 『수서』의 기록은 백제의 망명객들이 육로를 통해 망명한 것이 아니라 해로를 통해 망명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류가 이끄는 계루부 망명객들은 졸본을 출발하여 배로 발해를 건넌 뒤에 하남 지역인 지금의 산동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계루부의 망명객들이 초기에 산동성에 머물렀다는 증거는 '비류가 그의 아우와 함께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는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백제 건국세력이 육로를 통해서 한반도에 진입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지금껏 비류 일행이 건넜다는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한반도 안에 있는 강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패수는 예성강에 비정하고 대수는 임진강에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추론은 그 구체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반도 지리에 끼워 맞추면서 생긴 정황적인 주장일 뿐이다.
비류 일행이 건넜다는 패수와 대수는 한반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황하 남쪽 산동 지역에 있는 강이다. 비류 일행은 『북사』와 『수서』의 기록대로 졸본을 출발하여 발해를 건넜으며, 황하 아래의 대방 지역에 도착하여 패수(沛水)와 기수(沂水)를 건넜던 것이다.
현재 황하 아래 남쪽을 흐르는 소청하(小淸河)는 진(秦)나라 시대에는 제수(濟水) 또는 패수(沛水)로 불리다가 백제 건국 당시인 서한 무렵부터는 패수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기수는 소청하 바로 아래쪽을 흐르는 강으로 현재도 기수로 불리고 있다. 비류 일행이 건넜다는 패수(浿水)와 산동 지역의 패수(沛水)는 서로 글자는 다르나 그 뜻(물)과 음(패)이 같기 때문에 같은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수를 대수라고 부른 것은 기수가 대방 지역의 중앙을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기수의 또 다른 이름이 '대방의 물' 이란 뜻의 '대수(帶水)' 였을 것이란 뜻이다. 이 같은 예는 패수(沛水)를 제수라고 불렀던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졸본을 떠난 비류 일행은 황하 남쪽의 하남에 도착하여 대방에 의지하고, 대방의 배려로 패수와 대수를 건너 정착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대방이 자신들에게 '위로와 예로 대해준 것' 을 기리기 위해 도성의 이름을 '위례성(慰禮城)' 이라고 붙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 편에 나오는 '하남 위례성' 의 실체이다.
하남의 위례성에 정착한 비류 일행은 열 명의 중신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라고 하여 국호를 '십제' 라고 한다. 하지만 대방은 낙랑의 간섭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망명객들은 낙랑의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자 자구책으로 비류는 온조에게 군사와 백성의 반을 내주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마한 땅으로 가서 새로운 정착지를 물색할 것을 명령한다. 비류의 명령을 받은 온조 일행은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미추홀(인천)에 도착하게 되고, 마한의 배려로 마한의 북방 지역에 터전을 잡는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의 한강 북쪽에 건설된 위례성으로, 하남의 위례성과 마찬가지로 '마한의 위로와 예' 에 보답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온조왕 시대의 주변 국가들' 만한 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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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님이 지은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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