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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기억을 부여잡아: 왕의 남자

배소영 |2007.05.01 20:07
조회 32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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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공전의 작품. 천만 관객 돌파. 비주류 영화의 승리....

말 그대로 모두가 사랑했던 이 영화다. 그런데도 왜 나는 리뷰를 아직껏 쓸 엄두를 못 냈나-. 영화 본 횟수도 몇 번 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한 번 봤고, 있는 DVD는 두 번 틀었다 꺼 버렸다.


첫째. 내가 처음 가졌던 관심. 이준기의 행보는 예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영화를 찍던 그 시절부터. 그런 그가 왕의 남자라는 독특한 작품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여, 그 어느 영화기자도 영화인들도 관심가지지 않던 시절부터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언제 크랭크업하게 될까 손꼽아 기다렸고 진심으로 영화가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막상 영화는 너무 많이 성공해 버렸고 관심은 너무 많이 공유되어 버린 뒤, 시들해졌다. 같이 환호하는 건 재미없잖아 하고 투덜거리면서.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이해되지 않는 속상함이다.

둘째. 이거야말로..... 큰 이유다. 영화 음악만 들어도, 장면 하나만 보아도 가슴이 아파지는 것이 이유다. 유난 떠는 것이 싫었다. 혼자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척 혼자 아픈 척 하는 것이 질색이었다. 나는 그의 가족도 친척도 아닌 그냥 친구다. 내 친구가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친구가 떠났으니 나 혼자 아프지 말고 ‘우리들’이 아픈 만큼 아프고 싶었다. ‘우리들’이 그 아이를 생각할 때 나도 생각하고, ‘우리들’이 그 아이를 원망할 때 나도 원망하고. 딱 그만큼만 하고 싶었다. 내가 뭐가 잘났다고 지지리 궁상을 떠냐고, 그냥 남 하는 만큼만 하자고. 그런데도 그게 참.. 안 된다, 병신같이. 에빙하우스의 망각의 곡선은 신나게 바닥을 치던데, 이놈은 주기적으로 내 머리통을 두드리고 간다. 극장판 DVD, 감독판 DVD, OST CD까지 들어있는 초호화판 세트를 얄궂게도 선물해주고 간 그 친구가 미워져서, 그 DVD는 건드리지 말기로 했었다..... 영화 속 공길과 장생은 폼나게 하늘로 뛰어올라가지만, 그 놈은 그렇게 폼나게 간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한번 써보고 싶어졌다. 졸업을 맞아 1년을 드디어 마무리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졸업앨범에 웃는 네 사진이 변함없이 들어있어서인지. 그 사진을 보면서 생각만큼 쉽게 망각하지 않는 튼튼한 기억회로를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 그럴 것이라고 안도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모두들 너를 생각할거라 여겼다..... 그리고, 왕의 남자 DVD를 다시 꺼냈다. 이건 너를 용서하겠다는 것. 자신은 없지만, 한번 용서해 보겠다는 것이다. 눈물콧물 다 빼면서 온갖 흉한 모습 짓게 만들어주고, 지키지도 못하는 약속만 수십 개 남기고, 내가 지금은 어떻게 도와줄 수도 없는 고민만 잔뜩 털어놓고 간 너를 아무렇지 않게 언급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라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하겠다고. 자신도 없고 어이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유난떠는 것이 너무너무 싫으니까. 너는 나 말고도 친구가 많았고 그 많은 ‘우리들’이 공평하게 슬퍼해야지 나만 이렇게 궁상떨고 있는 것은 억울하니까. 결국, 이 글의 제목은 ‘아픈 기억을 부여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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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가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당시 나는 바로 영화의 원작이라는 연극 대본, 爾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영화관에 갔다 와서 다시 읽었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동성애 영화, 호모섹슈얼리티적 요소를 흥행 코드로 잡아 낸 영화라고 했다. 이준기의 여성적 연기에 감탄했고 ‘메트로섹슈얼’이라는 트렌드를 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동조할 수 없었다. 나는 동성애자 인권단체에 가입했고 동성애자 문제에 무척 관심이 많지만 그런 것은 이 영화와 전혀 관계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길과 장생, 공길과 연산은 그런 측면에서 논할 수 없다. 만약 이것을 동성애 영화라고 규정짓는다면 동성애담론의 의미 자체를 왜곡해버리는 잘못일 수도 있다고 느꼈다. 아름다운 남자를 다른 남자가 사랑한다, 라니- 그가 아름답기 때문에(비록 남자라도) 사랑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준기같은 외모가 아닌 사람들은 동성을 사랑하고 동성에게 사랑받기는 힘든가? 공길은 장생을 사랑하고 연산은 공길을 귀히 여겼으며 공길도 연산을 존히 했다- 이것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진 모든 감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호히 매듭짓고 싶지는 않다. 영화의 흥행을 돕기 위해 공길을 극도로 아름다운 자로 설정해 두었을지는 몰라도, 공길이 미인이든 미인이지 않든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열쇠는 변함없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는 극히 미약하다. 애정, 증오, 연민, 공감, 동정, 기껏해야 이 정도 뿐인 단어들은 복잡한 인간간의 관계를 나타내기엔 역부족이다. ‘왕’이라는 극상층과 ‘천민’이라는 극하층. 이 극단적인 세력들이 만나 얽히고 섥히며 감정을 공유한다니, 이처럼 복잡미묘한 실타래가 어디 있을까. 장생과 공길은 서로에게 기둥이다. 공길이 없이는 장생은 제대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고 장생 없이는 공길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생의 모든 걸음이 놀이판이고 그 놀이판에서 서로는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다. 한편 공길에게 연산은 연민과 이해의 대상이다. 연산은 어린 시절의 어머니가 남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목을 묶여 있으며, 수직적 주종관계로 이루어진 궁 안에서 고독해한다. 따라서 묶인 곳 없이 자유롭고 서로가 있기에 고독하지 않은 공길(과 장생)을 부러워하며 나아가 의지하려 (곁에 두려) 한 것이다. 공길은 그런 왕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왕을 위한 인형놀이를 한다. 그것은 치유의 손길이고, 왕은 그런 공길을 어머니처럼 여기게 된다. 그들 셋의 움찔거리는 시선이 절정에 이르는 때, 바로 패왕별희를 연상시키는 연극 장면이 아닐까- 피비린내 나는 “어머니!”. 그곳에 그네들의 모든 감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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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훌 털어버리고 새파란 하늘로 훌쩍, 일말의 미련도 없이 뛰어오르는 공길과 장생의 모습은 분명 장관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라고. 그러나 그 이전에, 어쩌면 슬픔을 넘어선 잔혹한 영화라고.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의 흔들거림,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가질 수 있는 하나부터 백까지의 애증을 낱낱이 드러낸 것. 왕이든 광대든 감정의 끝바닥까지 드러내게 되는 극한적 상황에 나는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게 얼토당토않는 소린지, 이치가 맞기는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차피 그러려고 쓴 글이다. 나는 너를 참 많이 좋아했고, 의지했고, 위로받았다. 그러나 내가 너로 인해 웃은 만큼 너는 나로 인해 웃지 못한 것 같아 결국 너는 내 아픈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억지로 잊으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울지 않으려고 폼잡는 것보다, 구차하게나마 ‘아픈 기억을 부여잡자’. 그렇게 붙잡은 이상에야 이 영화는 영영, 나한테 그런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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