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들보다 어려운일들을 일찍겪었다.
누구나 살아가며 인생의 위기가 있다지만
사실 그 위기는 우리가족 4명이 모두 함께 겪고 헤쳐나간거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우리가족을 훑고 지나갔을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정도로 지쳐있었으며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처음 나를 내쳤던 그분의 목소리는
나의 정신적인 피폐함이었다.
아버지는 반도체 연구원이셨고, 어머니는 음식점을 경영하셨기때문에 중학교 3학년때까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었다.
배우고 싶은것 다 배우고, 먹고싶은것 다 먹고, 입고싶은것 다 입고.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듯,
딸만 둘인 우리집의 부모님은 부모님이 가진것 이상으로 무리해서 우리에게 최고를 주셨었다.
나와 내동생은 나름대로 공주님이었던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 그렇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중학교 3학년때까지는 매주 주말마다 가족나들이를 갔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아버지에게는 정말 힘든일이었을것같다.
경기도 포천에서 서울 마포, 또는 인천까지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셨는데
나는 학교 통학할때 대중교통수단으로 6시간이 걸려서 차에서 가는동안 그냥 잠자면 되지만
아빠가 통근할때는 왕복으로 최소 5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아빠는 졸려도 잘 수 없었던것이다. 게다가 연구직이라 아빠는 항상 야근을 하셔서 집에 도착하면 12시가 넘기 일쑤였다. 출근 거리가 남들의 두배가 되니, 기상시간도 항상 6시 이전이었다.
그렇게 주중에 몸을 혹사시키고 나서 아빠는 금요일마다 가족끼리 나들이 갈 곳을 정하셨다.
그때 아빠의 표정을 기억한다. 정말 행복하고 편안한 표정을.
아빠는 공원, 놀이공원, 식물원, 공연장, 생태공원, 학습장, 강, 바다, 동물원등 전국에 있는, 또는 수도권에 있는 각종 놀이시설과 학습장은 모두 섭렵하며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든곳을 보여주셨다.
엄마는 강원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식물에 대해 굉장히 노련하게 알고계셨다.
우리는 나들이를 가면 항상 엄마의 부탁으로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들꽃이나 야생식물을 보며 사진을 찍곤 했는데,
엄마는 그 모든 식물의 이름을 줄줄 외우며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곤 했었다.
때문에 나와 내 동생은 청소년기까지 부모님과 나들이를 다니며 찍은 사진이 동생과 내 사진을 각각 나눈 앨범 10권이 넘고, 현상하지 못한것들까지 있을정도로 많다.
부모님은, 행복했던 그때의 기억을 모두 사진으로 남겨놓으려 하셨던것같다.
그리고 나서 바이올린을 계속하고싶다는 나의 마음을 꺾고
부모님은 한사코 안된다고 반대를 하셨다.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1로 넘어가던 시기
사춘기가 왔고
극도의 우울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제법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던 나.
사회에 나가면 남자들에게 무시받지 않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경쟁해야 한다며
신문을 3개씩 구독하시고
나에게 매일 신문을 스크랩해서 논조를 비교하고 내 의견을 적게 하시고
그내용을 토대로 토론을 하게 해주셨던 아버지
쉬는날이면 아빠가 일하던 회사, 연구실, 공장에 데려가 아빠가 일하는 것들을 상세하게 알려주시고
아빠가 운전할때 옆에 타면 내가 쉴새없이 질문하는 엉뚱하고 신물나는 반복되는 질문들을
아빠는 한번도 짜증내지 않으시고 대답해주셨었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만들고
영어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만든것도
아버지와 어머니덕분.
아빠는 어릴때부터 내가 일반적인 아이들이 관심갖지 않는
정치, 경제, 사회분야에도 관심을 갖도록
아빠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셨고,
내 생각의 물꼬가 마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나의 대화의 장이 되어주셨다.
그러던 나와 아빠의 관계는
내가 우울증 진단을 받으며 잠시 소원해졌고
나는 악기를 할 수없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우리집이 제법 부자인줄 착각하며 살았던 나는
바이올린을 시켜주지 못한다는 말에
매일 밤마다 부모님을 원망하며 화난 얼굴, 화난 마음으로 밤을 지새기 일쑤였다.
결국 그런 화와 불만의 연속은
내 감정의 안정을 무너뜨리고
나를 극도의 우울로 이끌었다.
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화는
우리 부모님에게 까지 돌아갔다.
시름시름 아프면서 마르고
밥도 제대로 안먹고
학교에서는 멀쩡하게 생활하다 집에오기만하면 말없이 엉엉 울기만 하는 딸을 보는 부모마음은 어떨까.
그때의 나는
소리없는 폭탄이었다.
언제 어디서 뛰어내릴지
스스로 목을 맬지 모르는 극도의 불안과 우울상태에 시달렸고
그런 증상이 한달넘게 계속되자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시고 내가 마음의 병이 생겼다는것을 인정하셨다.
나에 대한 기대도, 접은지 오래.
그저, 웃는얼굴로 돌아가기만 해달라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기도를 했고
아버지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수십권사고
우울증에 용하다는 병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입원이 아닌 통원과 상담치료로 유명하다는 강남의 한 병원을 알아내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나는 중학교 2학년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4년넘게 매주 토요일마다 병원에 가서 나의 두번째 은인인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끊임없는 상담
부모님과의 상담
음악치료, 상담치료, 미술치료, 작업치료
나의 사춘기와 청소년기는
우울증으로 얼룩졌다.
다행히 입원같은건 하지 않았지만
나는 병원에서 나보다 더 심한 상태의 사람들을 보면서
서서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잃어갔던 나는
나를 되찾기 시작했다.
뇌파검사, 호르몬 검사등 각종 검사를 통해
내 우울증의 원인이 유전적인것이나 기질적인것이 아니라는것을 알려줬을때 우리부모님은 정말 많이 기뻐하셨다.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조울증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고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우울증이 발병하면 완치가 잘 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은지 4년후
의사는 나에게 완치 판정을 내렸고
예방차원에서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을것을 권했다.
나는 의사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너처럼 좋은 환경에서 좋은 부모님, 오로지 너에게 헌신하는 부모님 밑에서 민주적으로 자란 네가, 이렇게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이유는 단 하나다. 네가 너무 모자라고, 너의 마음이 너무 못됐기때문에, 이기적인 너의 성격을 고치기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만약 네가 우울증을 앓지 않았다면, 너는 평생 너 자신만 보고, 이기적으로 살았을것이다. 하지만 너는 우울증을 통해 너의 극한을 경험하고, 너 자신을 이기는 것은 물론, 너 혼자가 아닌 남을 보는 법을 배웠다."
우울증을 이겨냈을땐,
제2의 위기가 시작됐다.
아빠는 내가 어느정도 제자리를 찾으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실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전기전자쪽은 급변하는 곳이라, 이미 40대 중반을 훌쩍넘긴 아빠가 회사로 다시 돌아가는것은 무리였다.
회사에서는 높은 월급을 받던 아빠를 달가워하지않았고
젊은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치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내가 중3때부터 재취업을 시도하시던 아버지는
좌절을 거듭하시고,
결국 퇴직금으로 엄마의 식당을 넓혀 일하시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직도 마음에 응어리가 있다.
나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시고 내가 아플때 내 뒷바라지로만 시간을 보내신 아빠, 엄마.
엄마 역시 나를 위해 모든걸 희생했다.
내가 사춘기때, 역시 사춘기를 겪었던 내동생은
순식간에 찬밥신세가 됐었다.
집안의 재롱둥이였던 동생은, 주체없이 우울해하는 나를보며, 자신의 아픔은 부모님께 차마 말하지 못했고,
부모님은 나만 신경쓰다가 동생에게는 거의 신경쓰지 못하시고 내동생은 청소년기에 혼자크다시피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못되디 못된 언니답지 않은 언니였어서
동생을 질투하고 미워했으며
부모의 걱정과 관심이 나에게로만 향해있다는 사실을 좋아했었다.
이제와 느끼는거지만
난 정말 이기적인 아이였다.
어쨌든 아버지가 재취업에 실패한 이유는
그에 앞서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신 이유는
정말 나때문이다.
내가 아프지만 않았다면 아빠는 회사를 그만두실 필요도 없었고
가정경제가 악화될 이유도 없었다.
나의 병이 다 낫자
이제는 아빠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한탄을 하셨다.
아빠의 삶이란 어디간거냐고
아름이 너때문에 내인생이 이렇게 됐다고 나에게 직접 주정을 부리시기도 했다.
나 역시 아빠의 인생을 내가 망쳤다는 생각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곤 했고
아빠는 더더욱 마음의 문을 닫고 동굴속으로 들어가려고만 하셨다.
그럴수록 상처받는것은 엄마와 우리들이었고
가장많이 상처받는것은 아빠 자신이었을것이다.
내가 고2때의 일이다.
한 친척분은 동업을 제안하셨고,
엄마와 우리는 반대했지만
아빠의 결정으로 우리는 그 친척과 동업을 하게됐다.
시작할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엄청난 부동산과 재산을 가지고 있던 그 친척은
이미 재산이 많은데도,
우리가 집팔고 가게 팔아서 동업자금으로 준 돈까지 빼앗고 내놓지 않으며
우리를 자신들이 동업하는 가게에서 내 쫓다시피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거리에 나앉게 되었고,
아빠는 더욱더 방황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된 결정으로 온가족이 고통을 겪는거라며
심지어 가족 동반자살을 계획하시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쫓아낸 우리를 동네사람들에게 음해하며
거지새끼들을 거둬먹여줬더니 자기네 재산을 몰래 빼돌리다가 도망갔다고 얘기하고 다녔다.
우리는 기가차고 어이가 없지만
그들에게 우리가 투자한 돈을 받기는 불가능하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소송걸 돈까지도 없어질때까지 우리를 코너로 내 몰은다음에
정말 가차없이 내쫓았고,
고3, 고1딸과 45세, 49세의 엄마와 아빠는
하루아침에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비참했다.
쌀이 없어서 밥을 굶고
매일 꽁치통조림에 신김치로 김치찌게를 끓여먹거나
라면을 끓여먹었다.
고1짜리 동생은 꼬챙이처럼 말라
키 170에 41키로가 나갔다.
나는 간신히 완치한 우울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나 스스로를 다잡으며 열심히 공부했고,
아빠는 자꾸 자살얘기밖에 안하셨다.
어디가서 자기만 죽어 없어지면 된다고,
우리 셋이 살라고
자기는 세상에서 살 가치도 없다고 했다.
우리가 어렸다면 아빠를 말리지 못했을텐데
우리 4가족은 단칸방에서 울고, 굶고, 또 울면서도
방황하는 아빠를 붙잡고 또 붙잡았다.
엄마는 울면서 기도하다 탈진하기도 했다.
아빠 회사 후배중 코스닥에 상장될 정도로 개인사업을 크게 키운 분이 있었다.
아빠는 끝까지 버티다가, 그분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돈을 빌리러 가셨고,
한때 그분의 상관이었던 아버지가
그런 모습으로 돈을 빌리러 갔던 모습을 본 그 후배 사장님은
아빠의 사정을 모두 듣고는, 개인돈으로 가게보증금정도를 빌려주셨다.
그리고 엄마아빠는 다시 식당을 하기로 하시고
주변에 단칸방이 딸린 식당을 구하러 다니셨다.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을정도로
먹을것도, 입을것도, 잘곳도,
최소한의 의식주도 없던 우리에게
생전 처음보는 남인 그분은
자비를 베푸셨다.
30여평의 식당과
20평의 방세개짜리 빌라를 월세 25만원에 제공해주셨고,
500만원의 보증금은 장사를 하다가 자리잡으면 달라고 하셨다.
엄마 아빠의 사정을 다 들으시고는 젊은사람들이 너무 안됐다며 오히려 힘내서 열심히 살라고 격려해주시고
자신이 농사짓는 쌀을 5달씩 공짜로 대주시기도 했다.
그분은 그 마을 이장님이셨는데
그분 형제분들이 서울에서 시의원, 교수들을 하는 분들이라
골프를 치러 포천에 오실때 마다 손님을 많이 끌어주셨다.
그 곳에서 2년간 장사를 하며,
엄마아빠는 빚을 많이 갚아나갔고,
그 마을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어 부모님의 식당은 그 마을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 식당을 처음 열때가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때다.
나는 포천에 있는 대학과 서울에 있는 대학 두군데에 합격했었다.
가나다군 모두 합격했다.
중학교때 내가 아팠기 때문에 나는 출석일수가 상당히 모자랐었다.
100일이상 결석해서 집에 틀어박혀있었기때문이다.
가출하거나 했던적은 한번도 없지만
학교에 가도 울기만 할정도로 상태가 안좋았기때문에
나는 학교에 가지않고 집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4시간을 내리 울기도 했고
밤 새도록 울기도 했다. 눈물은 아무리 흘려도 마르지 않았다.
결국 그런 나의 학창시절을 비교했을때
나는 고등학교때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이 포기했던것 보다는 좋은대학에 붙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집안 사정은 최악이었기에
부모님은 아픈 마음을 무릅쓰고 나에게 부탁했다.
너에게 서울에 있는 대학을 보내줄 형편이 안된다.
포천에 있는 대학 갔다가 편입하든지, 대학원을 좋은데 가라.
하지만 나는 끝까지 버텼다.
내가 포천에 있는 대학나와서 뭘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나도 가장역할을 해야하는데
그럼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테니 입학금만 보태달라.
학비와 생활비는 나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
통학도 하겠다. 라고 선언했다.
결국 부모님은 학자금대출을 받았고
통학하면서 이후의 학비와 생활비는 내가 스스로 벌어서 다니는 조건으로 입학을 허락했다.
그러면서 나의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학원강사, 외국인 모델 통역, 외국인 회사 비서, 자동차 부품회사 비서, 번역사, 전시회 통역, 수출입상담회 통역, 전화영어 강사, 동영상 영어 강사, 리포터, 외국인 회사 인턴 등.
나는 입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쉬지않고 일을 했다.
일하면서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정도로 공부해야했고
학교 방송국 생활이 너무 좋았기때문에 학교 방송국일도 열심히 했었다.
방송제 직전에 정말 방송국을 나와야 할만큼 집안 상황이 안좋았지만 결국 고집을 부리고 끝까지 남았고,
하루 4~5시간, 심지어는 밤새기를 밥먹듯이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일을하고, 방송국일을 했다.
이제는 철이들어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한 부모님 밑에서
걱정 한번 없이 큰 몇몇 학생들을 보면
부러운건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준 카드로 쇼핑을 하고
학교다니면서 영어나 컴퓨터 자격증을 따러 학원에 다니고
정말 유치하지만, 그런게 부러웠다.
친구 만날 시간도 없을정도로 나는 세가지일을 한꺼번에 하느라 쓰러질 지경이었고
나의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은 왜 항상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냐고, 시간만 있으면 여학생 휴게실에가서 잠을 자냐고 의아해 했다.
그들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어제 잠을 못잤다고 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년이 흘렀고,
나는 하나님이 실재하시다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첫번째로 나를 내 쳤던것은 우울증이다.
나의 자만과 이기를 빼앗으려고 주님은 나에게 마음의 병을 주셨고
그것을 이기게 하셨다.
두번째로 나를 내 쳤던것은 엄마의 사고이다.
엄마는 믿지 못할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며 일을 하셨다.
아버지의 방황때문에 그 정도는 더 심했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도 두지않고
요리, 설거지, 서빙등의 주방일을 혼자 다하셨다.
6시에 일어나서 12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드셨고
집안일까지 하셨기때문에 실제로 주무신 시간은 아마도 4~5시간 미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엄마는 아직도 얼굴은 곱고 예쁘시지만
몸은 상할대로 상하셨다.
퇴행성 관절염진단을 받아 관절염 전문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니 관절 나이가 70대에, 연골이 모두 다 닳아 없어졌다고 하셨다.
진찰을 받고 나오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고.
게다가 자궁에는 양성종양이 다발로 있다.
엄마는 무려 3달간이나 하혈을 하면서도 식당일을 하셨다.
막내이모가 매일같이 철분주사와 링거 영양제를 놓아줬고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엄마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엄마가 아파서 죽어가는데도 아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었다.
그러던 와중 엄마가 크게 다치셨고,
칼국수를 국수로 뽑아주는 기계에 엄지손이 빨려들어가 엄지손가락이 잘리셨다.
병원에서 접합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쉬셔야 했기때문에
엄마는 결국 식당을 접고 쉬시게 되었다.
사고는
엄마의 손은 아프게 했지만
엄마의 몸은 회복시켰고
아빠도 다시 일을 하게 만들었다.
나도 아픈 엄마를 생각하며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할 수 밖에 없었고
동생도 휴학하고 일터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온가족이 고생한지 3년여가 흘렀다.
가장 행복한 시간과
가장 불행한 시간을 함께 견뎌낸건
가족이었다.
이제는 4가족 모두 돈을 벌며 빚을 갚아나가
도저히 못갚을것 같던 빚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도 더 넓고 좋은 집으로 옮겼다.
동생이 유학가겠다고 악착같이 모았던 1600만원을
집을 옮기는데 선뜻 내놓았을때
나는 동생에게 배웠다.
물론 나도 동생과 비슷하거나, 그이상으로 부모님을 도와드리긴 했지만 나보다 어린동생, 나보다 하고싶은게 많을 동생이 12시간씩 힘들게 일해서 벌고 모은돈을 부모님께 드리는 모습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부모님께 통장을 드리던날 동생은
내방에 와서 울다가 나에게 안겨 잠이 들었다.
그것도 2년이 지났다.
다시 동생은 부모님에게 드린돈 만큼, 그 이상의 돈을 모았고
나도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우리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이제 사회에 나갈 나이의 아이들보다 3년, 5년 먼저 사회에 뛰어들어
죽도록 노력했고,
이제는 엄마가 사달라고 투정부리시는것들,
아빠에게 필요한 것들,
내가 사고싶고 동생이 사고싶은것들,
마음대로 살 수 있을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다.
저축도 남들보다 많이 하고있고,
다시 가족들과 외식도 하고
쇼핑도 하고
나들이도 하고있다.
5년의 악몽
5년의 성장
5년의 노력
5년의 아픔.
그 후에 우리를 기다리는것은
더욱 더 돈독해진 4식구
엄마와 아빠의 건강회복
나와 내 동생의 직장경력
저금통장
다시 찾은 여유로움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해봤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몇방울 또로록 흘러내렸다.
주님은
내가 넘어질 때 마다 넘어지게 놔두셨다.
나는 피를 철철 흘렸다.
그것은 몸의 피일 수도 있고, 마음의 피 일수도 있다.
나는 자살시도도 3번이나 했다.
매번 실패로 끝났고,
한번은 나를 구해준 친구가 없었다면 정말 죽을뻔 했었다.
나의 나약함과
이기심,
불안함을 주님은 겪도록 놔두셨고
스스로 이기게 놔두셨다.
내가 경쟁에서 지거나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할때도
주님은 내가 좌절감을 느끼게 놔두셨다.
그러나 더불어
내 힘으로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경쟁에 이겨 우뚝 서거나
직장을 옮길 때 마다 더 좋은곳과 더 좋은 페이로 가게 된다거나
직장을 옮길때 전보다 일할 시간은 줄어들지만 월급은 더 늘어나게 된다거나 하는 기회와 도전은 계속해서 주셨다.
어떤 기회를 잡으면
또 시련이 왔다.
정신적으로 열등감이 들거나
육체적으로 쓰러질만큼 피곤하거나, 혹은 실제로 병원신세를 지거나.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몇개월 지나보면 나는 그일에 익숙해져있거나 정신적인 열등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되고,
그 일에 노련해지고 나면
또 다른 기회의 문이 열려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주님의 뜻을 알게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둥글어지고
내가 진정으로 평안해지고
내가 진정으로 너그러워지고
내가 진정으로 지혜로워 질때 까지
끊임없이 나를 단련시킨다는것을.
그래서 나는 이말을 믿는다.
너는 넘어져라. 나는 너를 붙들것이다.
시련에 몸부림치며
고통의 밤을 보낼때 마다
나는 기도했고
울고, 또 울고, 또 울면서
퉁퉁 부은 추한 내 눈을 볼때마다 생각했다.
언제쯤 이 눈물의 밤이 끝날것인가.
남들보다 더 일찍 수많은 고통의 밤을 보낸 까닭에
나는 남들보다 더 일찍 웃을 수 있었다.
이제는 나에게 고통을 준 그 어떤 사람들이나
나에게 상처를 준 그어떤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까지 하게되었다.
우리를 쫓아낸 그들,
이제는 사람들의 질타와 욕이 무서워
필리핀으로 도피이민을 갈 생각이라고 한다.
아마,
우리가 일부러 원망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아도
그들은 스스로 부끄럽고, 불안해서
꽤나 불행했던 5년을 보냈을지도 모를일이다.
외제차와 전원주택, 수영장이 딸린 대형 갈비집, 골프장.
그들이 가진 재산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풍요로운 물질을 가졌음에도 왜 베풀줄 모르고
오히려 평화롭게 살던 가정을 깨고, 우리의 재산을 모두 앗아가고
가족의 연까지 끊으며 우리를 음해했을까.
왜 있는사람들은 더하다는, 못됐다는 질타와 무시를 받으며 그렇게 도망치듯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하는걸까.
교훈을 얻는다.
그래서 생각한다.
돈을 조금 벌든,
나중에 많이벌게되든,
나중이란 없는거라고.
성공해서 부모님께 잘해드리려고 하면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없을지도 모른다고.
성공해서 기부하려고 하면
이미 내 나이가 50, 60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부터 잘 해드리고
지금부터 남을 돕고 싶다.
이미 실천을 해왔었고,
나의 마음이 더 둥글어지고
더 너그러워지도록
계속해서 기도하고,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힘든사람들도 많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시련의 끝은 절망이 아닌 희망이라는것을.
희망과 열정을 잃으면 정말 세상을 잃지만
벼랑끝에 내몰려도, 살려는 의지만 있으면
하나님은 그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동생과 엄마의 생일은 일주일 간격으로 5월에 있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가족끼리 외식하고
가족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때문에 일도 주중에 몰아서 하고
나는 부푼가슴으로 토요일을 기다리고있다.
세상을 헤쳐나가는 힘이 되었던 가족.
마음이 무너질때마다
내가 지혜롭지 못하고 바보같았을때마다
나를 붙잡아주신 하나님.
그리고 항상 내곁에서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친구와
내 마음을 슬프거나 기쁘거나 나눌 수 있었던 친구들.
나는 오늘도 일어나서 걷는다.
때로는 뛰고
쉬었다가
힘차게 달렸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툭툭털고 다시 일어나서 걷는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며
언젠가 내가 가진것들을
한없이 베풀며 살아가는 나의 미래를 본다.
그것은 나의 사명이자
나를 세상으로 보내신 주님의 계시.
어떤 빛이될지
어떤 소금이 될지
나는 아직 자라고 있다.
하지만 내가 느꼈던,
주님이 깨달음을 주는 방법은
내가 진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그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