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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 신 앞에 선 인간에 대한 감독의 뛰어난 통찰력

이성근 |2007.05.25 21:05
조회 20 |추천 0


5월 24일 석가 탄신일. 서울의 한 극장은 밀양의 관객으로 꽉 차 있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 가는 순간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곳곳에서 민망스럽게 새어 나왔다.

이런 관경이 증명 해 주듯이 밀양은 분명 대중과는 거리가 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 할 수 있는 자들이 이해 못하는 자들을 바라보는 아쉬움이 될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은 불필요한 오만이 될 듯 싶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수 많은 메이저들을 외면 했으니.

하지만 이 영화의 묵직한 이야기들은 어쩌면 대중성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에 있었지 않았나 생각 해 본다. 

 

우선 감독은 (감독이 각본 연출을 모두 하였으므로 감독이라 총칭한다.) 사색가 혹은 철학가 혹은 신학적 인간으로서 한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이 작품을 구상하였을 것이다.

그 생각은 바로 전도연이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면회하는 씬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신애는 신(기독교의 하나님)을 영접하고  구원자의 광대한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진짜 깨달음 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에서 대심판관을 설명하기 전에 이반이 말하는 대목을 떠올리게 하듯, 그녀의 고통은 신의 섭리 아래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행복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일 부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됐던 것이다. 

 

하나의 나약한 인간으로서 그녀는 살인자를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이 부분에서 또한 전도연이 이런 묵직한 시나리오를 완전히 파악하고 훌륭하게 연기 해 준 것이 용서를 결심한 것에 대한 불안정함이 표정 연기에 잘 나타난다.

 

하여튼 신애는 살인자를 면회하고 생각치 못했던 뒷통수를 맞게 된 것이다.

 

신이 이미 해 버린 살인자에 대한 용서.......................................

 

 

이창동 감독은 아마도 이러한 발상과 통찰력을 떠올리고 이 작품을 구성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러한 충격 뒤에 이어지는 전도연의 행위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귀여워 보이는 모습이다. 물론 표면 상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광적이고  퇴폐적이며 비도덕적인 행동을 연달아 하고 있으나, 신 앞에서 반항하는 그녀의 모습이 불쌍하면서 귀여운 모습으로 느껴졌다.(물론 그녀가 겪은 인간의 커다란 상처 앞에서 귀엽다는 표현은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우선 감독은 이러한 발상을 영화의 중앙에 집어 던지고, 그 뒤의 벌어질 일들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신애는 신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것은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신 앞에서의 돌발 행동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 뒤의 일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예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 해 보았다.

 

가장 예상하기 쉬었으면서도 불안하게 했던 장면은 신애의 자살기도씬이다.

 

'신을 인정한다면 살아야돼, 절대 죽어서는 안되지, 종찬(송강호)이 와서 구해 줄라나..?'하며 가슴 졸이며 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애는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게 아닌가.

 

그 다음으로 중요한 씬은 신애가 살인자의 딸에게 머리를 하는 장면이었다.

살인자의 딸의 손에는 가위가 있고 전도연의 신체 중 일부분을 잘라내는 장면 또한 긍정적인 예상을 하면서도 혹시나 혹시나 하며 가슴 졸이던 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애는 그 아이의 안부를 묻는다..............................................................

 

신애의 안부는 곧 용서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나왔던 용서의 모습에 놀란 신애는 다 자르지도 못한 머리를 그대로 둔채 미용실을 뛰쳐 나온다.

 

이 얼마나 가련하고 솔직한 신 앞에서의 인간의 모습인가.

영화는 신애가 남은 한쪽 머리를 가위로 다듬으며 끝을 맞이한다.

 

영화가 끝나고 이게 머냐며 웃던 관객들은 신애가 차라리 가위를 뺏어서 아이를 죽여버리는 것을 원하진 않았을까.

 

감옥 면회씬부터 감독의 대단한 통찰력과 신학적인 심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가야한 장면들이 나올 때 마다. '음 대작이야. 대작이야를 외치고 있었다.'

 

소설로 읽었더라면 배는 더 걸려서 읽을 수 있는 좋은 내용을. 두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큰 물리적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던 시간이었다.

 

점수: 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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