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이 영화는 내게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를 통해 ‘이제는 영상의 시대인가?’ 라는 물음과 함께 ‘사진의 시대’를 추억하게 되었다. 지금껏 사진은 사람들에게 묻고 호명하는 힘을 가져왔다. “현실을 모른 척 할 것인가? 알았다면 일어서라!” 사진 한 장으로도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
1960년 4월에는 김주열의 사진이-
1980년 5월에는 광주 시민들의 참혹한 사진이-
1987년 6월에는 이한열의 수류탄 박힌 사진이-
2002년 6월에는 효순이 미선이의 사진이-
군중의 마음을 거리로 움직이는것에 힘을 보태었다.
지금도 거리 모금운동이나 어떠한 캠페인을 진행할 때 마다 빠지지 않고 전시되는 것은 사진이다. 그런데 이들을 대할 때마다 슬퍼진다. 이렇게 전시되는 그들의 삶이 더 이상 내 마음을 움직이진 못하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폭행당해 온 몸이 피멍이 든 여성, 비쩍 마른 몰골로 큰 눈을 꿈적이는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 전쟁에서 참혹하게 잘려나간 시체들...... 그 사진을 보고 마음이 아파지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것이 두렵다. 그것들은 더 이상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내 시선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단 말이다! 또한 많은 물음들로 머릿속을 괴롭힌다.
사진속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전시되는 것을 허락했을까?
자신의 삶을 통해 주변 현실을 고발해 주라고 부탁이라도 했을까? 자신이 낯선 누군가에게 동정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을 원했을까?
효순이 미선이 사진도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나라면 죽어서 내 시체가 그렇게 전단지로 뿌려지고 거리에 붙어 있다면 이미 죽었어도 다시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녀들에게도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녀들을 장갑차에 눌려 찢겨진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타인에게 내 모습이 그렇게 기억된다는 것, 적어도 내겐 끔찍하다. 특히 베네통의 광고들은 나의 분노를 극에 치닫게 한다. 베네통은 선정적이고 설정으로 사진을 찍어 회사 광고에 이용한다. 예를 들어 지뢰로 몸이 잘린 사람, 에이즈, 인종차별, 키스하는 수녀와 목사, 동성애자 커플, 등의 사진이다. 이러한 광고로 베네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회사 이미지를 상식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그룹으로 인식 시키는데 성공했다. 베네통 광고를 캠페인성 광고로 분류 한다고도 하지만,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왜 타인의 아픔이 상업적으로까지 이용되어야 하는가?
영화 의 한 씬이 머릿속에 맴돈다. 기자가 르완다의 현실을 본부네 알리는 내용의 대사이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본다면 오 하느님 끔찍하군요!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고선 태연하게 저녁식사를 할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다가 먹고 있던 팝콘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나 역시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들을 내안의 프레임에서 아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나? 입으론 “세상은 변해야 해!” 하면서 깊은 속마음으론 ‘타인의 고통이고 뭐고 나만 잘 살아있으면 되지’ 하면서... 당연한 본능이라 할지라도 자꾸 낯 뜨거워 지는 이유는 뭘까..
아직 일말의 휴머니즘이 남아있는 것일까.. 그럼 그것은 인간(人間)강현진이 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일까...
이러한 나의 회의에 대안은 없을까 고민해본다. 타인의 고통을 전시 하지 않고는 의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할 수는 없을까? 이 시점에서 ‘영상시대’가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영상이나 사진이나 피사체를 프레임 안에 가두고 게이트키핑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다. 사진은 가장 극적인 순간을 잡아 감정의 분출을 목적으로 하기에 보다 선정적인 것이 추구될 수밖에 없다. 해석도 관객의 몫이고 이것은 때론 무책임하다. 문제성을 알리는 역할은 하지만 대안을 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은 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제작진은 명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의 사례처럼 보다 구체적인 실천을 유도할 수도 있다. 는 공동체 상영을 통해 꽤 많은 관객동원을 하였다. 다수의 관객들은 영화에 감동받아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에 참여 하고 영화 홍보에 앞장서고 있다. 아마 내년엔 ‘우리학교 그 후’를 통해 “관람해 주신 모든 관객들께 감사합니다.”라는 엔딩 크레딧을 볼 수 있게 될 듯 하다.
뿐 아니라 이미 영상은 다양한 분야에서 미디어 운동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약자의 화법에 힘을 실어줄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언젠가는 영상의 시대도 사진의 시대처럼 무덤덤해지고 퇴색 될 것이다. 그렇지만 곧 또 다른 시대가 도래 하지 않을까?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다수이기에 끊임없이 흐를 수 있기에 우리는 또 그 시대를 타고 끊임없이 흐를 것이다.
를 보며 사진의 시대를 추억하고 영상의 시대를 새삼 의식하면서 카메라라는 도구 앞에 조심스럽고 진지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3년이라는 시간으로 탄생했다는 제작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제작 기간이 선전의 도구가 되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중요한 것은 감독의 시선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이다. 명준 감독은 타지 못하는 배 위에서 아이들이 “명준 감독~” 하면서 손을 흔들어 주는 장면... 그 장면을 배경으로 처음으로 분단의 아픔을 느꼈다는 감독의 나레이션. 내가 에서 뽑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좀 더 객관적으로 우리학교를 평하자면, 한편으론 대단히 정치적이기도 한 영화로 비춰졌다. 영화 중간에 감독은 북한은 지속적인 지원을 해 주고 있지만 남한 정부는 모른 척 해왔다고 말한다. 남한 정부 기만정책 비판 내용도 나온다. 아이들은 북한을 방문한다. 보여 지는 북한의 모습도 밝고 행복하기만 하다. 그동안 남한이 가져왔던 북한에 대한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영상이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북한 체제 옹호로 느껴질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공동체 상영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 또한 이 시각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탠다.
조총련 계열의 학교라는 영화에서 보여 지지 않는 배경을 알면 또 달리 보인다. 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싶었으나.. 또 이놈의 딴지 근성이 꿈틀댄다. 언어를 지키고자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일본에도 있는 한글 학원이나 시민 단체의 한글 교육을 찾으면 되겠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한글만이 아니라 체제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그 아이들 중에는 부모의 강요 때문에 학교에 나가야만 하는 사례는 없었을까? 그런 경우라면 다른 의미에서는 상징적 폭력이 될 수 있지도 않을까? 한겨울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치마저고리를 입고 그러한 복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학교와, 운동 경기에 민족적 자존심마저 거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난 또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ㅎ그저 순수하게 눈물 흘리고 안타까워 할 수만은 없었다.
함께 고민해보자.
'정체성'이라는 것.
'우리'라는 소속감.
우리.. 우리..
우리네 사는 모습과 똑같은데...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우리는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