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박환규 |2007.07.13 23:40
조회 66 |추천 0


출처: 히딩크 자서전 네덜란드 감독 시절, 세계적인 축구 스타 요한 크루이프의 아들 요르디(Jordi)를 대표팀에 발탁한 적이 있다. 1996년 영국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에 그를 투입했다. 내가 스페인 발렌시아팀 감독일 때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뛰었기 때문에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득점 감각이 뛰어났고, 상당한 기술력을 겸비한 스트라이커였다.
그가 크루이프의 아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를 대표팀에 합류시킨 것은 그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는 대표팀에 합류하자마자 스위스를 상대로 중요한 골을 보란 듯 성공시켰다. 요르디는 기술적으로 플레이를 펼치는 스트라이커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프로선수로 뛸 만큼 완숙한 단계에 올라서 있었다.


차두리가 넘어야 할 산 '아버지'

한국대표팀의 차두리도 비슷한 경우다. 내가 차두리를 최종 엔트리에 포함시킨 것은 그가 천부적인 체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가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의 아들인지는 알았지만,. 만약 그가 별 볼 일 없었다면 결코 선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두리는 한국에서 스피드와 파워를 겸비한 몇 안 되는 선수다. 기술적으로 완숙한 경지는 아니지만, 잠재력이 풍부했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성실한 훈련태도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다.


그가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면 상대 선수가 위협을 느낄 만큼 파워가 넘친다. 체격과 힘도 좋아 유럽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으리라는게 주된 선발 이유였다. 물론 차두리는 골 결정력이 약한 게 흠이었다. 그래도 힘이 넘치는 선수인 만큼 월드컵을 거치면서 성숙한 단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2002년 월드컵에서는 주전이 아니었지만, 2006년 월드컵에서는 주전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


나는 두 선수와 각기 많은 대화를 나눴다. 둘 다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하려고 노력했고, 나는 옆에서 그들의 노력을 도왔다. 하지만 두 선수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둘 다 아버지 유명세 속에서 성장했지만, 요르디는 차두리보다 나이가 많았던 만큼 대표팀에 합류할 당시 이미 독립한 상태였다. 스페인 프로 리그에서 검증 받은 스트라이커였고, 프로 선수로서 자기 영역을 다져나가고 있었다.


두리는 대표팀에 합류할 당시 대학생이었다. 부모 그늘에서 완전히 독립한 상태가 아니었다. 한국 문화 탓이겠지만 아직 자기 영역을 구축하지도 못했다. 당시 프로 리그에서 검증 받은 선수도 아니었지만, 내 눈엔 그의 성장 잠재력이 보였다. 만약 내가 그를 잘못 봤다면 월드컵 이후 독일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이 그와 계약을 맺을 리 없다. 차두리의 또 다른 강점은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차두리가 대표팀에 들어온 뒤 나는 그를 혹독하게 다그쳤다. 그는 아버지의 유명세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도 뭔가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에게 골을 넣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골이 들어갈 때까지 계속 슛을 날리고 찬스를 만들어내라고 격려했다. 축구란 잘되다가도 안 될 때가 있는 것이다. "골이 안 들어간다고 포기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해서 공 뒤에 숨지 말라. 다음 기회를 노려라."


차두리는 사람들이 항상 아버지와 자기를 비교한다고 투덜거렸다. 요르디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요르디를 지도한 경험을 차두리에게도 적용했다.
"너는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세상에 아버지 아들이 아닌 사람은 없다. 너는 이제부터 차두리라는 국가대표 축구 선수이지, 차범근의 아들이 아니다. 네가 실수하면 혼내고 야단치겠다. 네가 겁이 나서 골을 넣으려는 시도조차 안 한다면 국물도 없다, 아버지 이름을 더럽히기 싫다고 해서, 실패가 두렵다고 해서 아무런 시도도 안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실패했다고 해서 의기소침하고, 실패가 두려워 다음 기회를 노리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지만 찬스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모험을 감행하다 실패하는 것은 얼마든지 용납한다. 언론이 너를 아무리 비판해도 나는 너를 보호한다. 네 뒤에는 항상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라."


축구 선수는 실패가 두려워 공 뒤에 숨어버릴 수 있다. 슬럼프에 빠지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가장 단적인 예가, 경기 중 빈 공간에 뛰어들어가야 하는데도 실패가 두려워 들어가지 않는 경우다, 실패가 두려우면 선수는 공이 안 오는 곳에 가 있곤 한다. 그래서 나는 차두리에게 " 만약 네가 그런 행동을 보이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느 경기에선가 차두리는 골을 넣을 결정적 찬스를 놓쳤다,. 그러자 관중은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차두리는 머리를 감싸쥐고는 못내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를 불러 야유에 반응하지 말라고 야단쳤다. 오히려 당당하게 나와서 골이 들어갈 때까지 뛰고 또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코스타리카전에서 골을 넣었을 때 힘이 넘치는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골 세레머니를 하지 않는 걸 보고 아직도 아버지의 명성에 짓눌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축구는 실패투성이 게임이다. 골을 만들어내려고 수많은 드리블과 패스를 시도하다 겨우 한두 골로 승부를 결정짓는 경기다 . 그 숱한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따라서 축구는 실패를 컨트롤하는 경기다. 정확한 슈팅을 날리고 정확한 패스를 하는 게 중요하지만, 축구 속성상 부정확한 게 훨씬 더 많다. 따라서 한 번 실패했다고 그 선수 체면이 손상되는 건 아니다.


한국 문화에서는 단 한번 실패가 그 선수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패보다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느냐가 축구에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 실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차두리에게도 그렇게 말해주었다.


내게 '빽'은 통하지 않아

1998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나는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제의를 받아 감독으로 옮겨갔다. 레알 마드리드를 거의 1년 동안 지휘하면서 성적도 매우 좋았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 해 12월 도쿄에서 열린 도요타컵 대회(세계 프로축구컵 대회)에서 우승했다. 도요타컵은 코파아메리카(남미)우승팀과 유럽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이 단판 승부로 세계 최강 프로팀을 가리는 권위 있는 대회였다.


내겐 진작부터 도요다컵을 꼭 안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1988년 PSV는 우루과이 몬데비데오를 상대로 2대 1로 앞서다 경기 막판 89분에 동점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연장 접전을 펼쳤지만 결국 승부차기로 넘어갔고, PSV는 아깝게 졌다.
레알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그 도요타컵 대회에 나가게 되어 감회가 컸다. 스페인 기자들은 내게 도요타컵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고 질문했다. 나는 내가 27년 동안 간직해온 콧수염만큼이나 의미가 크다고 답해 회견장이 웃음바다가 됐다. 나는 우승하면 콧수염을 깎겠노라고 공언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우승했고. 나는 기자들과 맺은 약속을 지켰다. 이후 콧수염을 다시 기르지 않았다. 사실 콧수염을 기른 것은 젋은 시절 장난기 넘치는 팀 동료들 때문이었다. PSV아이트호벤에서 뛰던 1971년 여름, 우리 팀은 필립스 광고를 찍느라 인도네시아에 갔다. 귀국길에 고국 팬들에게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콧수염을 기르기로 했던 것이다.


그 후 콧수염을 간직해온 세월과 함께 불편도 커갔다. 담배를 피울라 치면 콧수염에 담배 연기가 배 불쾌한 적도 많았다. 나는 잘됐다 싶어 레알 마드리드 우승과 함께 콧수염을 깎아 버렸다.


레알 마드리드가 도요타컵 대회에서 우승하기는 처음이었다. 감독 개인에게도 큰 업적이었고, 레알 마드리드로서도 큰 성공이었다. 시즌도 아주 잘 굴러갔다. 그러나 1999년 3월부터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구단 관계자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더니 결국 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단초는 간단했다. 구단 고위 관계자 아들이 하필 레알 마드리드 선수였다. 이 고위 관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자기 아들이 주전 선수로 뛰게 되기를 희망했다.
이전 감독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그 선수가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자기 뜻이 제대로 먹히지 않자 그 아버지는 여기저기 불평을 하고 다녔다. 구단 사람들도 그를 옹호하는 쪽과 나를 두둔하는 쪽으로 갈렸다. 나중엔 내게 직접적인 압력이 들어왔다. 난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레알 마드리드 구단은 내분에 휩싸였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가 사임하는 게 제일 속 편했다.


만약 내가 요구에 응했더라면 자리는 보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내 양심에 어긋났고, 내 원칙을 꺾어가면서까지 일한들 그 일이 즐거울 리 없었다. 내가 팀을 책임지고 전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차라리 해고되는 편이 나았다.


나는 오로지 축구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모든 일을 결정하고 싶었다. 다른 정치적 요인이 끼여든다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감독으로서 내리는 최종 결정은 오로지 축구에 의해, 축구를 위해 축구를 통한 결정이어야 한다는 게 내 신조다. 만약 내가 일하는 환경이 나를 얽맨다면 나는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없고, 정치적 요인이 개입되면 올바른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구단 고위 관계자 아들을 데리고 팀을 꾸려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기는 생리적으로 싫었다. 그러면 내가 현실과 타협하는 꼴이고, 나는 그게 죽기보다 싫었다.


레알 마드리드를 그만두고는 몇 개월을 쉬었다. 마드리드에 살면서 가끔 네덜란드 TV의 스페인 리그 해설자로 활동했다. 가끔은 유럽 축구를 중계하는 카날플러스(Canal+)TV에도 해설자로 얼굴을 내밀었다.


세비야에 있는 레알 베티스 구단이 감독직을 제의해왔다. 베티스 구단의 성적이 부진하자 감독을 시즌 중반에 해고한 직후였다. 몇번 거절하다 남은 시즌만 맡아달라고 간청해서 동의했다. 하지만 팀이 워낙 엉망이라 성적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1999년 시즌부터 다시 TV해설자로 나섰다. 당시 나는 네덜란드와 스페인을 오가며 생활했다.


거스 히딩크 자서전 중에서.....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