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본질은 사랑, 자비, 평화,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 모두를 이익되게 하는 것, 영원한 행복 등 우리들이 추구하는 모든 희망을 이루게 할 수 있는 가르침의 말씀으로 되어 있으며, 역할은 본질을 믿고 따르면 본질대로 이루어 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이 본질과 역할외의 어떠한 다른 목적으로 이용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학설이 있습니다
과학의 경우 발전된 새로운 학설이 증명되어 지고 발표되면 이전의 학설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종교의 경우는 증명되어 지기가 거의 불가능 하여 믿는 마음으로서 접근 하여야 하는 까닭에 한번 발표된 학설은 사라지지 않고 그냥 남아 있으므로 너무나 많은 학설로 인하여 무엇이 본질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본질(진리, 섭리)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 학설도 그 자체가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 하였던 것'이며, 학설은 인간의 생각(자아의식)으로 만들어진 `조작적 개념'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경전을 중심으로 같은 주제로서 간략하게 살펴 보면서 무엇이 종교의 본질 인지를 다시 한번 밝혀 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사상은 성부로서의 하나님, 성자로서의 하나님, 성령으로서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동일하며, 다만 맡은바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영원히 초월해 계시며 창조와 역사 주관과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모습으로서 나타내시었으며, 교회를 지키시며 역사를 완성 시키십니다.
성자로서의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일컽는 말이며, 역사의 한 시점 속에서 피조물의 세계를 찾아와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화해를 이루시고, 우리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세상 마지막날 재림하시어 최후의 심판을 주관 하십니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와 같이 역사 하시다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후 교회 안에서 신자들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오늘 우리의 사건으로 현재화 시키시며, 과거의 객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오늘 우리의 주체 안에서 주관적 사건이 되게할 수있는 하나님의 능력 이므로 온누리에 충만 하십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에 순종하므로서 성령님께서 나에게 임하시어 그 능력으로서 모든 것을 역사할 수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삼신일체(三身一體)사상은, 부처의 몸이 다양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應身)의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며, 세몸은 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법신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만물의 본체를 형상화한 부처로서 진리를 상징하므로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佛과 서방정토의 아미타佛이 이에 속합니다.
법신(法身)은 항상 보편한 진리를 스스로 증득(證得)한 `영원의 몸'을 말하며, 화신과 보신의 모체이며, 불교초기에는 석가모니 한 사람만을 부처로 보았으나 대승(大乘)불교가 일어나면서 영원한 과거부터 이미 성불한 부처가 존재하였고, 미래에도 존재하여 인간을 교화할 것이라는 미래불, 과거불 관념이 전개 되었으며, 이러한 부처를 구원의 법신불이라 합니다.
법(法;dharma)이란? 가상(허상;3차원의 세계;3차원 이상의 진리의 눈으로 볼 때를 말함)에 불과한 현상 세계의 진실된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현실과 대조되는 진여(眞如;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本性)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주 만유(萬類)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하고 차별이없는 절대 진리입니다.
법신불은 이 법을 인격화한 것으로 모든 인간에게 영원불멸하게 존재하고, 줄거나 늘어나지 않고, 시작과 끝이 없는(無始無終) 존재입니다.
따라서 `만물은 있는 그대로 다 부처다'라는 말이며,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법계에 가득하다(法身常住說)'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말은 기독교의 `현재이신 성령님은 온누리에 가득하시다'라는 말씀과 동일 합니다.
법신에 관한 내용은 에 잘 나타나 있는데, 신라의 원효대사는 에서 법신을 여래장(如來藏) 이라 하고 지복(至福)한 덕성을 모두 갖춘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법신은
1) 큰 지혜이자 광명(大智慧光明)이고
2) 세상의 모든 대상계를 다 비추어 모두 알게 되며(編照法界)
3) 있는 그대로를 진실되게 알며((眞實識知)
4) 추함이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며(自性淸淨心)
5) 영원하고 지복을 가지며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으며
6) 인과(因果)에 의해서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는 결코 찾을 수 없고 중생의 마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얻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법신은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며, 깨달음에 이른 모든 부처와 중생의 모습 자체입니다.
보신(報身)은 오랜 수행의 과정을 겪어 무궁무진한 공덕이 갖추어진 몸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공덕을 갖춘 전형적인 예가 바로 불신(佛身)의 특징인 `32상 80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갖출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진리의 구현체(俱現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오랜 수행의 결과로서 얻을 수 있었던 몸이 바로 이러한 몸이며, 이것은 이 세상에서 나타낼 수 있는 최종적인 진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佛이 이에 속합니다.
화신(化身)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육신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 영원한 법칙을 바탕으로 하여 법신(法身)을 생각했고, 더 나아가 그것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변신해서 나타나는 이른바 화신(化身)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佛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神)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법신, 보신, 화신을 보다 쉽게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 의학(醫學)에 비유하여 설명 드린다면, 의학이라는 학문 전체는 법신이며, 의학을 공부(수행)하여 의사 면허증을 취득하여 의사가 되는 것은 보신이라 할 수 있으며, 의사가 되어 의술을 펼쳐, 병을 고치는 행위를 하는 의사는 화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힌두교는 라고도 합니다.
힌두교는 BC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 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 침입(AD2000~AD1500?)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 로는 아리안계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 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 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성전, 전설, 의례, 제도, 관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 입니다.
이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제도 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재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 직업, 종교적인 모든 조건이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제도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 입니다.
힌두교의 경전은 베다 이며 그 외에도 등의 문헌이 있습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 신화(神話)를 계승 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多神敎) 같아 보이지만 神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神들을 최고의 현현(顯現;權化) 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 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一神敎)적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힌두교는 삼신일체(三神一體)사상이며, 우주 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三神을 一體로 하여 최고의 실재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힌두교의 우주관은 절대자인 브라마(梵天)가 우주를 창조하여 이 현상 세계를 브라마의 환력(幻力)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본래는 환영 처럼 실재하지 않고 브라마 만이 실재(實在) 한다고 합니다.
브라마가 만든 환영의 세계라는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보는 사람마다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만들어 보기 때문에 실상이 없다는 말일 것이며, 브라마 만이 실재 한다는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힌두교의 神관념 가운데 化神이라는 관념도 있어서 비슈누神이 신격, 인격, 동물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이 세계에 현현(顯現,나타남)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화신佛과 같은 것입니다.
힌두교는 神과의 계약이라는 관념도 없으며, 파괴의 神으로 두려움을 주는 쉬바神의 경우에도 절대적인 신앙, 즉 박티(신애,信愛)를 바치면 어떠한 사람도 쉽게 구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힌두교에서는 이로 인해 이단(異端)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힌두교와 대립관계에 있던 종교로는 자이나교, 불교, 이슬람교와 유럽의 근대사상, 근대과학 혹은 유물론이 있습니다.
힌두교는 이들 대립하는 모든 종교, 사상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결하기 보다는 그들을 자기 안으로 흡수 동화 시켰습니다.
예컨데 사회적인 신분제도에 저항했던 불교도 실제로는 힌두교의 한파로 간주함으로써 붓다(석가모니)는 비슈누神의 아홉번째 化神으로서 힌두교의 신화 속에서 융화 됩니다.
이와같이 불교, 자이나교, 이슬람교 기타 토착적 모든 요소가 어울려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힌두교로서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관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아담과 하와(인간)의 원죄의 상속으로 부터 시작되며 인간의 원죄의 극복은, 원죄를 지은 인간의 자력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오직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 받을 수있는 타력적 구원관의 특색을 나타내는 반면 불교는 인생의 고통은 탐내고(貪), 성내고(嗔), 어리석은(痴) 삼독(三毒:번뇌,망상;무명;자아의식,我相,지식,알음알이;고정관념)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無明을 걷어내면 자연히 인간의 본래 깨끗한 마음(本性,淸淨心)이 드러나 반야의 지혜(완성된 지혜;중도의 지혜)를 얻어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하는 자력적 구원관의 특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기독교는 인간의 교만(탐욕)과 불신앙에 의한 타락의 결과인 죄성(원죄)으로 보는 반면, 불교는 무명에의한 인간 본성의 상실과 괴리 혹은 고통으로 보는 점이며, 구원의 상태는 기독교와 불교가 각각 모든 번뇌와 고통이 극복된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평화가 실현된 천국(기독교)과 열반(불교)으로 표현 함으로서 가는 길의 방향은 틀리나 도착의 목적지는 같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인간의 원죄는 진리(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이며, 불교에서의 무명(無明)도 진리(부처;본성,진여,법)를 깨닫지 못한(진리를 모르느 것) 결과 이므로 사실은 가는 길의 방향도 틀리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은 믿지 않으면(불신앙) 깨달을 수 없으며, 깨닫지 못하면 절대적인 믿음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보신 , , 사상 또한 말의 표현만 다소 차이가 있을뿐 의미상으로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결론 부터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내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며,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내 마음에 긍정적인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에는 단 하나의 진리 만이 존재하며, 그 진리는 [만유(萬類)는 하나다] 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은 자꾸만 다르다고 하여 분쟁을 일으키고, 긍정적인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줌으로서 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본질(근본;體)로 보면 하나(不二,不異;같다,一體)이고, 현상(쓰임새;用;相)으로 보면 다 다릅니다.
즉 모양만 다를 뿐 구성요소는 같다는 뜻입니다.
본질을 볼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진리)을 믿고 순종하거나, 수행을 통한 깨달음(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보는 것;진리)을 얻는 것 뿐입니다. 이 둘도 다른 것 같아 보이지만 절대믿음과 깨치고 보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차별있는 세계(무명, 用,相,쓰임새,현상,중생)에서 차별없는 세계(본성,청정심,진여,體,부처)를 보는 것이며, 이말은 차별 있는 세계(차안.此岸;생사가 있는 이세상)와 차별 없는 세계(피안.彼岸;차안을 떠난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번뇌를 버려서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말고(煩惱卽菩提.번뇌 즉 보리), 生死를 떠나서 열반을 얻으려 하지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바는 같습니다.
종교의 이러한 본질적인 역할은 흐려지기만 하고, 우리들의 종교에 대한 이기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종교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 되고, 전쟁을 일으키며, 종교가 세력화 됨으로서 정치적인 도구로도 쓰여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교의 역할에는 장단점이 있어서는 안되며, 본질에 충실하면 단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본질(진리) 외적인 학설이나 종교적인 여러가지 형식(의식,윤리,도덕)에 얽메이기 때문에 단점이 생기게 되며, 본질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항상 변합니다.
가정에서 종교 문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제사 모실 때, 자녀들이 결혼할 때, 가족간에 서로 다른 종교의 문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문제, 종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문제 등의 크고 작은 일들 입니다.
비종교인의 대부분은 종교의 이러한 단점(모순) 때문에 분쟁의 불씨가되는 종교를 차라리 믿지 않거나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윤리관, 도덕관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생각과, 종교를 가지므로해서 당장 수입보다는 지출이 많아 지게 되므로 비현실적 이라는 판단과, 일부 종교인들의 개인적인 인격의 문제로 인하여 종교를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비종교인들만 탓할 것이 아니라 종교인들이 많은 반성을 하여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러나 비 종교인들 께서는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윤리, 도덕은 거의 대부분이 종교로 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자신의 철저한 윤리관과 도덕관으로서도 훌륭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윤리, 도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옳고(善), 그름(惡)을 분명하게 가려야만 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항상 분쟁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 까닭은 종교마다 의식이나 윤리, 도덕이 다르기 때문이며, 이것은 본질 외적인 것이어서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에 조화를 이루어 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윤리 도덕관을 자기의 고정관념으로서 가지고 있으면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지금까지, 또는 10년전과 현재를, 여러가지로서 비교해 보십시요.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자고나면 변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진리도 내 것으로 삼아서(고정관념) `이것만이 최고다'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종교공부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떠한 변화에도 최고의 조화를 만들어낼 수있는 지혜를 얻는데 있습니다.
윤리, 도덕만으로는 이러한 능력을 갖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정관념(我相;無明)은 모든 불행의 씨앗(종자) 입니다.
모든 변화는 서로 상관관계(緣起)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힘으로서도 막을 수는 없으며, 이것은 우주의 섭리(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때 지혜롭게 잘 대처해 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이 바로 `中道的인 삶'이며, 가장 쉬운 말로 말씀드린다면 "사이 좋게 지내라" 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나(我) 이니까요.
종교의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웃 종교를 비방하고 배타시하지 않는 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이 좋게 지내라" 라는 말은 "원수를 사랑 하고,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 "동체자비(同體慈悲)",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주었어도 주었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는 말들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어떠한 종교의 훌륭한 학설도 이러한 본질적인 가르침 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르다고 하는 것들을 깊게 들여다 보아 본질을 알면, 다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인 원핵세포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의 집합체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세포속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토콘드리아를 통해서 우리들은 다른 것들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 현상은 아직도 태초나 지금이나 35억년 동안 한번도 움직여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고등 생명체라는 말은 부적절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날 과학이 밝혀낸 사실입니다.
결국 다르다는 것은 우리들의 눈에 보여지는 것만 다를 뿐 본질은 모두 같으므로 만물의 형상이 다른 것을 인정 하여야 하며, 그것을 배타시하면 그 결과는 모두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며 그것은 진리입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너는 틀렸다"고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 하십시오.
이것은 모든 분쟁과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구원 받고,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사랑합니다.
하나님앞에 매일 나를 죽여야 하며, 매일 나(無明;번뇌,망상;我相)를 버려야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 받을 수 있으며, 해탈,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