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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알고 보면 더 재밌다! (6/10 - 열사 이야기2)

김상규 |2007.07.27 19:40
조회 116 |추천 1


2.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오월 열사이야기



• 최미애 (25세-주부)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우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남편이 부인을 떠나보내며 비석에  피눈물로 새긴 이별가다.

임신 8개월이던 최미애씨는 5월 21일 오후 1시 30분쯤 남편을 기다리다 전남대 정문 쪽 도로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친정 어머니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갔는데 딸이 뇌 속의 골과 피를 길바닥에 쏟아 놓은 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딸을 집으로 옮겨 놓고 배를 만져보니 몸은 차가운데 태아는 아직도 살아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이라도 살려보려고 여러 병원에 연락을 했으나 아무도 와주질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딸을 싣고 병원을 찾아다닐 수가 없었는데 20분쯤이 지나자 아이도 엄마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가족들이 손수레에 관을 싣고 장례식을 하였다.

최미애씨 아들 진홍이도 벌써 군대에 갈 나이로 자랐다. 최미애씨 어머니는 혼자 된 사위를 자신이 나서 중매결혼을 시켰다. 재혼한 사위는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 윤상원 (31. 노동운동가)

윤상원 열사는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의리가 강했다.

임곡초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닌 그는 71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 75년 복학했다. 민청세대인 학교선배 김상윤씨와 만남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77년 9월 김상윤씨가 사회과학 서적판매와 광주 운동권 인사들의 모임터인 녹두서점을 열자 이곳에서 운동권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다졌다.

그는 광천동 빈민촌의 셋방에서 남동생과 함께 자취하면서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다  7형제의 장남으로 돈 잘 버는 직장을 잡아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기로 마음먹고 78년 1월 서울 봉천동 주택은행에 입사했다. 이 때 은행은 최고 직장이었다.

그는 봉천동 빈민촌에서 살았다. 학생운동을 하는 후배들이 경찰에 쫓기는 몸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는 아버지의 바램 때문에 은행에 들어갔으나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학력을 속이고 광천공단 한남 플라스틱에 들어갔다. 남들이 부러워하고 장래가 보장된 은행을 버리고 생산직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노동자 생활을 하며 전남대 휴학생 박기순씨가 중심이 되어 만든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면서 노동야학을 이끈다. 들불야학과 박기순씨와 만남은 그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인연이었다.  그는 야학을 통해 성숙한 운동가로 자라났다. 6.29 교육지표 사건으로 강제휴학 당한 뒤 노동운동에 헌신해 ‘노동자의 누이’로 불리던 박기순씨는 78년 겨울에 연탄가스로 숨진다.  82년 두 사람은 영혼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은 5.18묘역에 함께 누워있다.

이 두사람을 위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 . . . .

그들은 노동자를 위해 정열을 쏟았고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79년에 전민노련과 전학노련 두 조직에 가입하여 이태복씨와 가까운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한국계 미국인이 사장인 YH무역 파업사태에도 관여했다.

그는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민중항쟁을 지휘한 전사였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군인가족이 일러주었다. 그때 도청에는 300여명정도 사람들이 있었는데 윤상원 열사는 여자들과 고등학생들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는 말을 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아 결사항전을 다짐한 150명은 총을 들고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27일 새벽 무장전사들은 대부분 건물 앞에 배치되었으나 계엄군 특공대는 뒤에서 기습공격을 하였다. 윤상원 열사는 대항하기 위해 복도로 나오다 총에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피는 흘리고 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바로 밑에서 시민군 기획부장인 들불야학 동지 김영철씨가 그를 커튼에 싸서 옮기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 커튼에 불이 붙어 윤상원 열사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모난데 없이 원만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면서도 원칙을 양보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였다고 말한다.


• 김명철 (65세-상업)

김명철 노인은 대문에서 공수부대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얼굴 한 쪽이 완전히 짓뭉개진 아버지 시신을 본 큰아들은 그 충격으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 박연옥 (51세-농업)

송암동에서 농사를 짓던 박연옥씨는 전남중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이 걱정이 되어서 24일 동네 아주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가 도로에서 공수부대가 총을 쏘아대자 청년과 함께 광주대 입구 하수구로 몸을 숨겼으나 이를 발견하고 쫓아온 공수부대의 총탄에 아랫배를 맞고 쪼그린 채 하수구에서 숨졌다. 이날 공수부대는 계엄군과 총격전이 벌어져 군인이 죽자 전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송암동 주민들에게 분풀이를 저지른 것이다.

다행히 공수부대에게 발견되지 않아 살아남은 아주머니 증언에 따르면 박연옥씨는 피를 흘리면서 갈증을 느낀 듯 하수구 물을 손으로 마셨다고 한다.

부인을 잃은 남편은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다 2년 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남도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다 마흔 둘에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떠나갔다.


• 조사천 (35세-건축노동자)

조사천씨는 전남대 후문에서 집을 짓고 있었다.

18일 학생들이 맞는 것을 보고 항쟁에 참여해 21일 도청에서 목에 총을 맞고 눈을 뜬 채 숨졌다.

부인 정동순씨는 화병으로 뱃속에 멍울이 생겨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고 근무 도중 피를 토하며 쓰러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조사천씨 어머니는 87년 대통령선거 유세가 조선대 운동장에서 있었을 때 김대중씨의 연설을 듣다가 5․18 사진전에 손자가 아들 영정을 안고 있는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3일간 식사 한번 못하시고 숨졌다.


• 김경철(29세-장애인노동자)

어릴 때 사고와 약물 후유증으로 농아가 된 김경철은 5·18 최초 희생자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현장에서 공수부대에 붙들린 그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할 수 도 없어 그저 두 손으로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들겨 패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갔으나 19일 숨졌다.

화려한 작전의 첫 희생자는 불행하게도 장애인 노동자였다.

그는 4살 때 바위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사지가 마비되면서 3개월이나 병원생활을 하였다. 농아학교에서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과정을 독학으로 끝낸 그는 서울에서 구두기술을 착실하게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80년에는 광주에 내려와 국제양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농아처녀와 결혼해 80년 1월에 혜정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5월 18일 그날도 온 가족이 모였다.  첫딸 혜정이 백일을 지낸지 스무날이 된 날이다. 김경철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처남이 영암에 간다 해서 버스터미널에 배웅을 나간 후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날 오후 금남로 제일극장 들어가는 골목에서 공수부대에게 뒤통수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농아신분증을 보여주고 악쓰며 몸부림치는 경철이를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을 친구들은 손을 쓰지 못하고 숨어서 지켜봐야만 했다고 한다.

그는 말못한 것이 죄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온 몸이 두부처럼 으깨진 것이다. “차라리 총에 맞아 죽었으면 편히라도 갈 것인데, 온 몸이 터질 때 꺼정 맞아 죽다니, 불쌍한 내 새끼 듣도 못하고 말도 못헌 것도 불쌍한디 맞아 죽다니…….”

어머니 임금단씨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우리들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들이 죽은 후 어린 혜정이를 버려둔 채 부인은 친정으로 가버리고 혜정이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면서 컸다.

• 민병렬 (32세. 운수노동자)

택시시운전을 하던 그는 20일에도 여느날과 같이 출근했다가 계엄군이 도로를 막아 차량운행이 불가능하자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것이 가족과 마지막이었다.

98년 이영희씨는 뜻하지 않게 민병렬씨의 사망경위를 듣게 되었다.

5․18 부상자 이영희씨가 민병렬씨의 아내임을 알고 같이 구금됐던 그 때 상황을 말해주었다.  80년 5월 21 새벽 광주역에서 시민들의 결사항전에 밀린 공수부대는 전남대로 도망가 잡혀온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공수부대 한 명이 대검을 들고 “이 대검은 월남여자 유방를 40개나 자른 것이다.”며 한 사람을 불러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그리고 민병렬씨 뒤로 돌아가 대검으로 정수리를 찔렀다.

순간 피 분수가 솟았고 골이 나왔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시체를 두 명의 공수부대원이 끌고 나갔다.


• 한영길 (31. 노동자)

화천기공사에 다니던 그는 친구가 공수부대에게 죽자 항쟁에 적극 참여한다. 아시아 자동차에서 가지고 나온 군용차량에 타고 항쟁을 하다 21일 도청에서 숨진다.


• 황호걸 (21. 노동자)

조선말 항일 의병활동을 한 할아버지를 모신 자긍심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황호걸씨는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남이 싸우기만 해도 꼭 나서서 말리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많았다. 그는 형의 대학진학을 위해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자격증을 따서 화천기공사에 근무하며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에 다니고 있었다.

21일 도청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항쟁에 참여했다. 며칠 후 그는 총을 들고 집에 들렀다. 가족들은 깜짝 놀라 총을 빼앗아 농 속에다 숨겨뒀다. 22일 아침밥을 먹고 나서 아버지가 ‘총을 돌려주고 오라’는 말을 듣고 집을 나섰으나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가고 말았다. 그는 주남마을에서 김춘례씨가 탄 차에서 함께 숨졌다.


• 김동수 (23. 대학생)

조선대 공대 3학년에 다니던 그는 불교연합 전남지부장으로 불교운동을 하고 있었다. 18일 오전 목포에 내려가 있던 그는 21일 오후 광주에서 소식을 전하러온 차에 탔다.

4남2녀중 장남이었던 그는 27일 도청에서 결사항전하다 목에 총탄을 맞고 숨졌다.


• 고영자 (24. 일신방직 노동자)

고영자씨는 화순에서 태어나 많은 농촌누이들이 그러했듯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을 마치고 일신방직에 다니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집으로 보내며 어렵게 생활하면서 주말에 한번 정도 집으로 와 잠만 자고 가곤 했다.

18일 공장이 문을 닫자 같은 회사 동료이자 동생인 김춘례씨 집에서 5일 동안 함께 있다가 23일 춘례의 할아버지 제삿날에 영자에게 같이 가자고 졸라 집을 나섰다가 김춘례씨와 함께 주남마을에서 사망한다.

어머니는 가슴앓이와 고혈압으로 고생하다 84년에 세상을 떠났다.

83년에 김윤수씨(화순 능주에 있는 누나집에 가다 23일 지원동에서 총에 맞아 사망)와 영혼 결혼식을 시켜 나란히 묻어 주었다.

• 나홍수 (34. 목수)

월남전에서 군복무를 마친 나홍수씨는 21일 도청에서 숨졌다. 부인 이금자씨는 화병(가슴앓이)으로 87년에 남편 뒤를 따랐고 갑자기 고아가 되버린 3남매는 동생 이경숙씨가  서른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길렀다.


• 김남석 (20. 학원생)

4남매중 막내인 김남석씨는 평소 의리있고 인정이 많았다. 그는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포기하고 삼촌이 운영하는 인천기술학원에 서 용접을 배우 있었다.

계엄령이 내려 학원이 쉬게 되자 18일 고향에 왔다. 어머니는 시위가 불안하고 언제 끝날지 몰라 아들을 못나가게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21일 집을 나섰다.  22일 새벽에 그는 친구인 백대환과 총을 메고 집에 왔다 못나가게 하자 총을 반납하고 온다면서 나갔는데, 그날이 어머니와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는 주남마을에서 김춘례씨가 탄 버스에서 희생되어 암매장되었을 것이다. 김남석씨는 친구인 백대환, 황호걸씨와 늘 함께 다녔다고 한다. 두 사람도 주남마을에서 희생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뼈라도 찾기 위해 3년간 돌아 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한을 풀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지는 봉분이 없이 행방불명자 자리에 비석만 세워져 있다.

앞으로 아르헨티나 유골 감식반과 함께 주남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암매장 발굴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 김복만 (29. 운수노동자)

현대교통 시내버스 운전기사인 김복만씨는 18일부터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실어 나르며 항쟁에 적극 참여했으며 광주민중항쟁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20일 저녁 차량시위에 참여하고 21일 도청에서 집단 발포때 숨진다.

그는 3살 먹은 아이와 1개월 된 갓난아이의 아버지였다.


• 문용동 (28. 대학생)

문용동씨는 목사를 꿈꾸며 호남신학대학 4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상무대에 있는 상무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으며 야학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8남매 중 여섯째인 문용동씨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착한 성품을 지녔는데, 거리의 부랑아까지 집에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밥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80년에는 개인적으로도 일이 많았다. 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19일 도청에 갔다가 잘 아는 목사가 공수부대에 붙들려 얻어맞자 이를 말리다 자신도 얻어맞고 말았다. 그리고 항쟁에 적극 참여한다.

5월 24일 집에 들어와서 도청에서 지하실에 있는 무기고 관리를 한다고 했다. 5월 26일 문용동씨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형과 형수가 도청으로 찾아갔는데, 완강히 거부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에 동생친구의 전화를 받고 상무관으로 갔는데, 군인들이 출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반 강제로 밀치고 들어가 한참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동생의 시신이 있었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았는데, 목 부분을 보니 많이 부어 올라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로 말문이 막혀 술로 세월을 보내다 10년 후 돌아가시고 형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두었다.

신묘역으로 이장하면서 관속에서 27일로 멈춰진 손목시계와 M16총탄이 나왔다.

목사의 꿈과 달콤한 신혼의 꿈을 뒤로 접은 채 그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목숨을 바쳤다.

• 임균수 (22. 대학생)

한의사인 할아버지 가업을 잇기 위해 원광대 한의학과 본과 2학년에 다니던 그는 토요일인 17일 집에 내려와 항쟁에 참여했다.

그는 원광대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쟁 참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1일 전일빌딩 앞에서 저격병이 쏜 총알이 왼쪽 머리에서부터 턱을 뚫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원광대에는 87년 9월에 그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 박병규 (21. 대학생)

2남4녀 가운데 넷째였던 박병규씨는 평소 깔끔한 성격에 학업성적도 우수한 편이어서 부모님이 많은 기대를 하고 계셨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많아, 동생들에게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서울에서 자취하며 동국대학교 1학년에 다니다 5월 19일 저녁 무렵에 광주로 내려왔다. 그 날 저녁 집에서 자고 20일 오전 집을 나가, 27일 사망하기 전까지 두 번 집에 들어와 자기활동과 목격담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시위를 하는데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어떤 아저씨가 분노하면서 하얀 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며 각목을 쥐고 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 “젊은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할 수 있겠느냐? 가정이 있고 자식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나서면 안된다”는 말을 동생에게 했다.

박병규씨는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주로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찾으러 나온 가족을 도와주거나 도청 지하와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을 확인하여 가족들에게 안내해주고, 무기를 회수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5월 26일 밤 8시경 집에 여유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해 마지막일지 모르는 순간까지도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27일 새벽, 어머니는 총소리를 듣고 상무관으로 가서 보니 사망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 관을 열고 시신을 확인했는데,  왼쪽가슴과 오른쪽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슴에 쌓인 울분을 삭히며 살다 84년에 돌아가셨다.

동생 박경순씨는 오빠의 뜻을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 안두환 (28. 노동자)

보일러 수리기사인 안두환씨는 전남대 정문에 있는 집에서 공수부대에게 학교로 끌려가 30일 교도소에서 발견되었다.


• 조일기 (33. 주방장)

27일 새벽 광주공원을 방어하던 그는 총상이 아니라 온 몸을 얻어맞아 머리가 깨진 채 숨졌다. 아마 공수부대에 붙들려 맞아 죽었을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본 아버지는 충격으로 혀와 오른쪽 얼굴이 굳어버렸다.


• 유영선 (29. 대학생)

전남대 공대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18일 전남대 정문 투쟁부터 27일 도청 결사항전까지 모든 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형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있었는 데 신군부는 유영선씨가 형을 구하기 위해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라고 하면서 가족들을 차례로 불러 조사했다.  통일되는 날 그는 얼굴에 흠뻑 웃음을 머금고 우리를 반길 것이다.


• 박용준 (25. 사무직 노동자)

고아로 자라 YWCA 신협에 근무하던 박용준씨는 78년에 생긴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함께 활동했던 후배의 이야기로는 학동 영신영아원에서 유아시절을 보내고, 무등 육아원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숭의실고를 졸업하고 YWCA 신협 준 사원이 되었다고 한다. 김영철씨를 만나고 부터 남은 인생을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이웃을 위해 바치겠다며 주민운동에 뛰어 들었다

18일 투쟁이 시작되면서 야학에서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어 광천동과 시내에 뿌렸다.  박용준씨는 글쓰기에 소질이 있어 동료들과 도청 집행부가 준 소식을 정리해 투사회보를 만들었다.

25일 시민 궐기대회때는 사회인 대표로 연설도 하였다. 그러다 26일에는 투사회보 제작을 중단하고 총을 들고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고아로 자란 그는 윤상원, 박관현등 동료들 속에서 진한 애정을 느끼며 민주화운동을 했고 해방광주의 아들이 된 그는 마침내  YWCA에서 생을 마치며 민족의 아들로 영생하고 있다.


• 류동운 (20. 대학생)

목사인 아버지의 길을 따라 한국신학대학 2학년에 다니던 그는 18일 항쟁에 참여해 붙들려 상무대로 끌려갔다 22일 풀려났다. 그리고 25일 도청으로 들어가 마지막까지 항쟁에 참여하다 생을 마쳤다.

동생 동인군은 광주민중항쟁과 미문화원 점거농성의 진실을 왜곡 보도한 KBS방송국에 화염병을 던져 구속되었다.


• 이정연 (21. 대학생)

2남3녀 중 장남인 그는 전남대 상업교육학과 2학년에 다니다 18일 정문에서 공수부대의 진인한 공격을 보고 피가 끓어 항쟁에 참여하다 27일 도청에서 숨진다.  어머니는 도청에서 울리는 총성을 들으며 새벽까지 애를 태우며 아들이 죽지만 않길 빌었지만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빗나가고 말았다.   


추천수1
반대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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