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하버드에는 '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최고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패자다'라는 문화가 있다. 그런데
무언가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은 이곳에서는 매우 힘든
일이다." (로힛 초프라, 2004년 하버드 졸업생)
케임브리지에 가을이 찾아왔고 하버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의 9월은 대대적인 변화의 계절이다. 그 유명한 뉴잉글랜드의 단품 시즌이 시작되면서 주변 풍경이 완전히 바뀐다. 싱그러운 초록색이 어쩜 그렇게 선명한 빨강과 노랑으로 바뀔수 있는지 경이로울 정도다. 또 한편으로는 '대학도시' 보스턴에 신입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분위기가 한껏 상쾌해진다. 보스턴시와 그 인근에는 100개가 넘는 대학이 있다고 한다. 개학을 맞아 학생들이 일제히 몰려들면 도시는 놀라운 활기로 가득 찬다.
긴장감은 긴 여름 방학이 끝나가는 8월 말부터 조금씨 높아지기 시작한다. 잡다한 살림살이를 가득 실은 자동차가 기숙사 앞에 속속 도착한다. 트렁크를 옆에 세워놓고 지도를 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학생들이 늘어난다. 기숙사 앞에서 가족과 끌어안고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도 보인다.
느지막이 학교로 복귀한 재학생들은 이 광경을 아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얘, 나도 그랬단단. 내가 하버드에 처음 왔을 때도 말이야. 정마 낯설고 두려웠단다. 하지만 걱정 마. 다 견뎌낼 수 있어'하는 표정이다. 그럼, 그렇고말고. 모든 일에 시작이 있는 법이다.
보스턴 토박이들은 '바에' 힘을 잔뜩 주어서 '바-스턴'이라고 발음한다. 나중에 워싱턴에 살면서 '바스턴'이라고 발음하면 사람들이 킥킥 웃었다. "너, 보스턴 물 잘못 먹었구나" 하면서. 보스턴 사투리가 다른 지방에서 간혹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우선 보스턴에서 촌뜨기 대접을 받는 비결(?)을 몇 가지 알려드리겠다.
첫째, '하버드'로고가 커다랗게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해라. 냉정한 보스턴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 '어이구, 저 촌뜨기!'하면서 피식 웃을 것이다. 다른 주에서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너 정말 하버드 다녔니?"라고 물어보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지만 '바스턴'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둘째, 택시를 타고 '보스턴 유니버스티(Boston University)'에 가자고 말해보라. 택시 운전사는 보스턴 사람들이 '비유(BU)'라고 줄여 부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보아 초행자가 틀림없는 승객을 보스턴 칼리지(Boston College)에 내려줘 골탕을 먹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이방인들에게는 '보스턴 칼리지'나 '보스턴 유니버시티'나 비슷비슷하게 들릴 테니까.
하지만 보스턴 사람들의 텃세가 아무리 심하다 해도, 하버드에 합격해 흥분한 상태로 달려온 하버드 신입생들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지는 못한다. 케임브리지는 긴 여름의 한산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벗고, 새로 기름을 친 기계처럼 착착 돌아가기 시작한다. 9월부터는 케임브리지 공기에 호기심과 열정, 공포가 뒤섞여서 숨 쉴 때 공기에서 다른 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버드는 대학원 중심의 대학교라고 하지만, 진짜 하버드생은 역시 학부생이다. 학부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레이몬트(Lamont)'라는 도서관이 있다. 레이몬트의 분위기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동네의 칙칙한 독서실에 처박혀 고달픈 10대를 보낼 때 꿈꾸었던 이상적인 도서관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학생들은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기도 하고,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과제물을 풀기도 하고, 몇 시간이고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공부에 몰두하기도 한다. 자유롭게 공부하고 생각할 수 있는 대학이란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분위기가 거기 살아 있었다.
학생들은 기숙사의 저녁식사 시간인 오후 6시가 되면 썰물이 빠지듯 일제히 몰려 나갔다가 7시 반쯤 되면다시 도서관으로 밀려든다. 겉보기에는 제멋대로인 것 같은데 자신이 할 일은 착실하게 하고 있는 모습이다. 도대체 어떤 아이들이 하벋에 오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지낼까.
하버드생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 전에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리처드 라이트 교수가 쓴≪하버드 수재 1600명의 공부법≫이란 책에 나타난 '평균적인 하버드생들'의 학교 생활을 살펴보자.
보통의 하버드생들은 대개 한 학기에 네 과목을 수강한다. 일주일에 12시간에서 18시간 정도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인문사회계열 전공 학생들은 12시간, 실험을 해야 하는 자연과학계열 학생들은 18시간을 강의실 안에서 보낸다. 숙제 하고 예습·복습하는 시간을 다 합하면 일주일 평균 30시간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과외활동도 열심히 한다. 여학생 76%, 남학생 86%가 과외활동을 하는데, 남학생들은 운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과외활동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70%는 두세 가지의 과외활동을 동시에 한다. 네다섯 가지의 과외활동을 동시에 하는 학생들의 비율도 14%나 됐다.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약 25%였다.
중국어 수업에서 만난 제니는 1학년생이다. 한눈에 모범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분하고 침착하다. 제니는 9월 초 트렁크 세개를 들고 텍사스 주의 샌안토니오를 떠나 케임브리지에 도착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학교 기숙사 이름에 딱 어울릴 법한 '위글스워스(Wigglesworth)'의 3층 꼭대기 방이 제니가 앞으로 하버드에서 첫 1년을 보내게 될 곳이었다. 기숙사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제니가 있는 곳은 방 세 개짜리 작은 아파트를 세 명이 공동 사용하는 식이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니 비스듬한 천장 아래 있는 방은 조그맣다. 침대, 책상, 작은 서랍장과 책장을 빼곡하게 들여놓았다. 다른 방들도 다 비좁은 것 같았다. 공동 사용하는 거실 창으로는 시끌시끌한 하버드 스퀘어와 매사추세츠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제니에게 하버드 진학은 일종의 어드벤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텍사스와는 분위기가 다른 뉴잉글랜드 지방으로 공부하러 오게 됐다. 텍사스 사람들끼리는 하버드 근처에 가면 '진짜 미국'을 볼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대서양을 건넌 영국 이민자들이 미국 대륙에 도착해 처음 정학한 곳이 뉴잉글랜드 지방이니까 맞는 얘기다. 미국에는 평생 자기가 사는 주 밖으로 나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꽤 많다. 그러니 텍사스에서 보스턴을 먼 나라 얘기하듯 '낯설게' 생각하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제니는 동급생 322명 중 유일하게 하버드에 지원해 합격했다. 하버드는 한 해에 약 1600명을 선발하는데, 미국이란 나라의 큰 덩치를 생각하면 정말 들어가기 힘든 학교다. 그래서 어느 고등학교 '개교 이후 첫 하버드생'이라든지 '10년 만에 나온 하버드생'이라는 학생들이 꽤 많다. 제니도 그런 학생이었다. 제니의 꿈은 '군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군인이라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고, 장학금도 ROTC에서 받았다. 하버드와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지원서를 냈는데 두군데 다 합격했다.
"원래는 웨스느포인트에 갈 생각이었어요. 군인이 되려면 제일 좋은 학교잖아요. 하버드는 그냥 한 번 지원해봤던 거에요. 그런데 막상 하버드 입학허가서를 받아 드니 마음이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버드를 졸업해도 군인이 될 수 있으니까 우선 하버드에 가보자고 결심했어요."
제니가 하버드를 선택할 때는 공부를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도 컸다.
"공부하고 배우는 거 좋아하거든요.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면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도 알게 되겠지요? 그것을 알고 싶어서 하버드에 온 거예요."
하버드 대학은 제니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해 합격시켰을까. 워낙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것이 신기해서 제니도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고 한다.
"하버드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곳이니까 제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한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고등학교 때 치어리더 팀을 이끌었고,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SAT 시험도 잘 봤어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들 어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적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단순히 '뭔가' 잘하는 수준이 아니고, 그런 경험을 통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운 학생들이었어요."
제니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공군이었고, 어머니느 도서관의 사서였다. 아버지와 사냥을 다니고, 어머니가 권해주는 책을 읽으면서 두 살 아래인 동생과 평범하고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베트남전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반전 시위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돌아왔는데, 인정해주기는 커녕 비난받는 입장이 되자 혼란을 느꼈던 것이다.
제니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과 반전세력으로 상징되는 부모님 세대는무조건 복종이 아니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던 세대였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성향이 강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앞 세대와는 다른, 균형감각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더 나은 세대가 아닐까요?"
제니가 입학 후 가장 재밌있게 공부하는 과목은 물리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관심이 그쪽으로 흘렀다. 특별히 다른 분야가 더 강렬하게 관심을 끌지 않는다면 물리학을 전공할 생각이다. 군인이 된다던 딸이 하버드에 입학하자 부모님도 마음이 바뀌어서 이제는 의사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제니는 생물학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의과대학원에 갈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제니는 학기가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벌써 공부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의 수준이 어떤지 잘 몰라서 걱정이 많다. '나는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 '계속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워낙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앞날에 대한 불안은 별로 없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제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리더'가 되고 싶어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서 따라오게 하는 사람이 리더 아닌가요? 빌 게이트가 훌륭한 것은 그 사람이 벌어들인 돈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빌 게이츠가 없었다면, 그 이후 다른 사람들의 성공도 없었겠지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실력과 재능이 있고 일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성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제니는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성공 아닌가요?"
멋진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도 안 됐는데 벌써 이걸 알고 있다니 놀라웠다. 성공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이미 그 나이에 이뤄야 할 성장을 충분히 이룬 것이 아닐까.
하버드는 미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최고 엘리트를 배출해온 기관이다. 밝고 건강하고 의욕이 넘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돕고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그런 젊은이들 말이다. 뽑을 때도 그런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우선한다고 한다. '이기적이라도 좋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 이것은 아니다. 빌 게이츠가 그랬던 것 처럼 자신도 성공하고 세상도 변화시키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그런 인재를 키워내려는 것이다. 어쩌면 하버드의 입학 사정 담당관들은 제니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