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자성대 공원에 있는 유적과 문화재들을 살펴봅시다.
자성대로 들어가는 문이 동문, 서문이 있습니다. 동문은 建春門(건춘문)이라 현판하고 있는데 옛 부산진성일 때의 이름은 鎭東門(진동문)이라고 했답니다. 1974년 중창하면서 성문 이름도 바꿔버렸습니다. 봄을 세우는 문, 봄을 맞아들이는 문이라 괜찮네요. 진동이란 동쪽을 鎭撫(진무 - 진압하고 누른다.)한다는 뜻인데 지금의 상식으로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 것이겠지요.
건춘문은 화강암으로 높고 길게 축조한 돌기단 陸築(육축)위에 門樓(문루 - 문 위의 누각)를 세운 형태로서 육축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문 안쪽으로 크고 두꺼운 문을 두었는데 나무문 위에 철판을 덮어서 적의 화공에 대비하였답니다.
문 좌우에 급하게 경사진 돌계단을 내어 오르내리게 하였고, 육축 위 사면에 낮은 여장이 둘러쳐 있고, 이 전돌담에 작은 협문을 내었습니다.
문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다락집으로 겹쳐마 팔작지붕입니다.
서문은 동문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축조하였습니다. 옛 부산진성일 때 서문을 金壘門(금루문)이라 하였는데 본래 자리가 지금의 성남초등학교 근처였는데 1974년 지금의 자리로 당겨 와 개축하였답니다. 여기 서문의 육축 중앙에는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기단을 축조하면서 좌우 가장자리에 南徼咽喉(남요인후) 西門鎖鑰(서문쇄약)이 새겨진 隅柱石(우주석 - 갓기둥)을 기단 속에 끼워 넣었답니다. 이 우주석은 원래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었는데 서문인 금루관을 복원하면서 이 자리로 이전하였답니다.
이 말의 뜻은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국경이요’(남요인후 - 272㎝에 폭이 46∼94㎝),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서문쇄약 - 높이 277㎝에 폭이 62∼71㎝)는 뜻으로 임진왜란 후 왜적을 크게 경계한 당시의 시대적 정신을 표상한 유물이랍니다.
서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공원 곳곳에서 일본식으로 쌓아올린 성돌을 만나게 됩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성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하면서 본래 우리 성을 허물고 자기들 축성방식으로 성을 쌓았답니다.
우리 성이었을 때 오늘날의 증산에 있었던 부산진성의 內城(내성 - 本城)과 여기 子城(자성)을 함께 허물고는 1593년 왜장 모리 데루모도(毛利輝元 -모리휘원) 부자가 일본식의 성을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일설에는 모리 부자는 부산진성을 허물고 오늘날의 증산에다 성을 쌓았지만 여기 자성은 왜장 아사노 요시나가(淺野辛慶 - 천야신경)가 선조 31년(1598년) 축성과 함께 외곽 구축까지 끝냈다는 이야기도 전한답니다.
또한 일본은 이 성을 小西城(소서성)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1597년 정유재란시에 왜장 고니시(소서)가 주둔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답니다. 또한 성이 둥근 환의 형태를 띄고 있다 해서 丸山城(환산성)이라고도 한답니다.
또 山頂(산정)에는 장대가 있어 이 장대를 萬公檀(만공단)이라 불렀는데 이는 왜군이 물러난 뒤에 부산진 지성에 명나라의 원군으로 왔던 萬世德(만세덕) 장군의 부대가 일시 주둔한 적이 있어 그의 공을 기리는 萬公檀(만공단)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랍니다.
그 후 만세덕이 귀국한 후 새로 성을 새로 쌓고 사대문을 축조하여 오늘날 좌천동 바닷가에 있던 부산진 첨사영을 이곳으로 옮겼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 후에는 여기가 부산진 첨사영이 주둔하였답니다.(상세한 내용은 ‘수영사적공원과 수영성 사람들’을 참고바랍니다.)
이 성과 증산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1598년 11월 22일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모두 불살라 버려 지금처럼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답니다.
1939년 도꼬갱교(都甲玄卿 - 도갑현경)이 쓴 釜山府史原稿(부산부사원고)에는 당시 자성대로 옮긴 부산진성은 둘레가 5,356척이라 하였습니다. 동문을 鎭東門(진동문), 서문을 金樓關(금루관) 남문을 鍾南門(종남문), 북문을 龜藏樓(구장루)라 하였고, 성내에는 객사인 拱辰館(공진관), 동헌인 劍嘯樓(검소루), 濟南樓(제남루 - 폐문루)를 비롯한 관사들이 있고, 성 바깥으로 진남루(관문), 진남정(주사 대변소), 목장창(진의 동쪽 10리), 대치창(진의 동쪽 15리), 석포창(진의 동쪽 45리)등이 있었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부산진성의 지성이자, 임진왜란 때는 왜성이 되었다가, 다시 임진왜란이 끝나고는 부산진 첨사영이 되었던 여기 자성대는 비교적 넓은 터에 자리 잡았지만 일제 침략기에 성내의 군사시설들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서문인 있던 성남초등학교 쪽과 부산진시장쪽은 전차 선로를 부설한다면서 성벽과 성문이 파괴되었고, 동쪽 또한 매축되어 주거지와 선창이 되었고, 남쪽바다 또한 매축되었고, 북쪽은 도로와 시가지가 들어서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자성대에서 어디를 살펴보아도 바다를 만나기가 어려운데(정상에 오르면 멀리 큰 배들과 육중한 크레인들의 머리만 보인답니다.) 그건 모두가 매축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성의 정상으로 올라가 봅시다. 여기에는 將臺(장대 - 장수가 올라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대)인 鎭南臺(진남대)가 있고 그 옆으로 조그마한 비석이 서있는데 충장공 천만리 장군의 유적비랍니다.
1974년에 세워진 진남대는 부산시가 자성대를 정비하면서 중층 누대를 설치하고 鎭南臺(진남대)라 명했는데 그 현판을 남쪽을 향해 달았답니다. 이름에 맞추려는 의도였지만 지금 그 현판을 보려면 아주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남쪽은 벼랑 끝이랍니다. 이는 남쪽을 진압하겠다는 뜻으로 세운 장대겠지요.
주변을 쇠살로 출입을 금지해놓아 꼭 감옥에 갇힌 형상이라 답답하기만 합니다. 장대를 설치할 때 좀 더 정상 가운데에 설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래층에는 개방형으로 만들어 툭 트인 형상으로, 그 일부를 마루로 설치하였고, 상층으로 오르면 하층보다는 줄어든 누각집을 올려놓았답니다.
여기 장대 바로 옆에는 천만리 장군의 기념비가 서 있는데 그 전면에는 摠督將花山君潁陽千公之碑(총독장화산군 영양천공지비)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공적을 기록하고 있답니다.
이 기념비 옆에 따로 세워져 있는 "충장공 천만리장군 유적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공신이신 천만리 장군은 원래 중국 영양 사람으로 자는 원지, 호는 사암이시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의 영양사로서 이여송과 더불어 조선에 출정하여 평양 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시고 정유재란 때는 마귀 장군과 함께 나와 울산, 동래 등 남방 싸움에 참전하시었다. 명군이 돌아갈 때 장군께서는 그대로 조선에 머물게 됨에 나라에서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리시고 화산군에 봉책하여 그 공을 길이 빛나게 하였다. 이 유적비는 한 때 왜인들에 의해 매몰되었던 것을 1947년 후손들이 되찾아 세운 비이니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기를 우리는 맹세해야 되리라 생각한다.
1975년 3월 20일 요산 김정한 짓고 창남 고동주 쓰다. 김해 김차수 새김.
영양 천씨 부산종친회
이 영양 천씨들은 지금도 해운대 석대동에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답니다. 전국적으로는 약 103,000여명(2000년 현재)의 영양 천씨들은 모두가 천만리 장군의 후손들이랍니다.
이 땅에 영양 천씨의 뿌리를 내린 천만리 장군은 본래 명나라 사람으로 중종 38년(1543년)에 태어났습니다. 자는 遠之(원지), 호는 思庵(사암)으로, 그의 시조 千巖 공이 西蜀(서촉) 終北山(종북산) 천고봉 萬刃巖(만인암) 밑에 살아서 천고봉에서 ‘천’자를 따고, 만인암에서 ‘암’자를 따서 이름을 千巖(천암)이라고 지었답니다.
천만리 공은 1555년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과에서 12세의 어린나이로 급제하여 황제를 뵙고 후한 상을 받았으며, 1571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총절사가 되어 북방의 몽고5부병을 섬멸시킨 공으로 내위진무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자들의 무고를 받아 8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뒤에 풀려나 태청전수위사 겸 총독오군수에 승진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만리는 황제의 명을 받아 총수사 이여송과 더불어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서 두 아들 祥(상)과 禧(희)를 데리고 철기군 2만을 인솔하여 조선에 건너와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답니다.
전란이 평정되자 명나라 장병들은 귀국했으나 만리는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땅에 남아 우리나라 千氏(천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지요.
이때 조정에서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여 資憲大夫(자헌대부 - 정2품의 품계)로 奉朝賀(봉조하 - 전직고관을 대우하기 위하여 특별히 내린 벼슬)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에 봉했으며 30결의 賜牌地(사패지)를 하사하고, 맏아들 祥(상)은 한성부 좌윤(한성 판윤(오늘날 서울 시장) 밑의 자리다.)에, 차남 禧(희)는 평구도 찰방에 각각 임명하였습니다.
그 후 숙종 때 왜란을 평정한 은혜를 잊지 못하여 명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궁중에 大報壇(대보단)을 설치하고, 화산군 千萬里(천만리)도 함께 享祀(향사)하도록 했으며 忠壯(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답니다.
부산진에서는 천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유적비를 자성대에 세우고 매년 관민 합동으로 제사를 모셔왔으나, 일제강점기에 유적비를 철거하고 제사를 금하였습니다. 해방 후 1947년 뜻있는 유지들과 후손들이 유적비를 되찾고 새롭게 새겨서 비석을 세워 매년 10월 9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답니다.
동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나옵니다. 최영 장군하면 고려 말 왜구가 들끓을 때 왜구를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운 분이시지요.
장군은 고려 말기의 혼란한 내외 정세 속에서 고려를 지탱하려 했으나, 이성계에 의해 제거되었고 이로써 조선 건국을 위한 이성계의 지위는 확고해졌지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遺訓(유훈)을 종신토록 명심하여 名利(명리)를 돌보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답니다.
장군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데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赤墳(적분 - 붉은 무덤)이라 불린답니다. 이는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 ‘내 죽으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유언에 따라 그렇게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게 민간에서는 또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요. 이곳 자성대에서도 매년 음력 5월 단오날에 祠堂(사당)에서 ‘최영 장군제’가 열리는데 이 또한 장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원혼을 달랜다는 뜻도 있지만 왜구를 물리친 장군을 기리기도 하고, 또한 고기잡이라던가 여러 가지 일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실시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최영 장군은 무속신앙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어 전국적으로도 장군을 모신 사당이 많이 있답니다.
장군은 돌아가신지 8년 후에 이성계에 의하여 武愍(무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답니다. 이는 이성계가 선배였던 장군을 올바르게 평가한 것이랍니다.
이제는 새로 복원한 영가대로 가 볼까요.
永嘉臺(영가대)는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행과 관련이 깊은 부산의 명소였답니다. 광해군 6년(1614년)에 당시 경상도 관찰사 권반은 부산진성 서문 밖의 호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고자 이때 바다에서 퍼 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이곳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답니다. 이 정자가 바로 永嘉臺랍니다. 영가대란 이름은 권반의 고향이 안동인데, 이 안동의 옛 이름이 永嘉(영가)였답니다. 영가란 뜻은 ‘두(二) 물(水)이 만나서 아름다운(嘉) 경관을 자아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二水最嘉(이수최가 - 두 물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가장 아름다운 곳)를 뜻하는 말이랍니다.
1624년 일본 사절의 접대를 위해 조정에서 선위사로 파견된 李敏求(이민구)가 성밖에 축조된 대를 보고 감탄하여 이를 쌓은 권반의 관향을 따라 ‘영가대’라 호칭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답니다.
광해군 9년(1617년) 回答兼刷還使(회답겸쇄환사)였던 吳允謙(오윤겸)이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이후 통신사행은 줄곧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일본으로 갔답니다.
통신사행은 조선후기 한일관계를 밝혀주는 대표적인 선린사절로, 선조 40년(1607년)부터 순조 11년(1811년)까지 모두 12차례 파견되었는데, 처음 3회는 회답겸쇄환사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국정 탐방 및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을 데려오는 역할로 갔었던 것에서 붙인 이름이고, 조선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1636년부터 1811년까지 총 9차례로 일본국왕의 요청으로, 막부가 있는 에도(현 동경)에 파견된 사절이었답니다. 통신사행은 8개월에서 1년여 간의 긴 여정으로 거친 대한해협을 건너가기란 무척 힘든 일정이었답니다. 그래서 출발 전에 영가대에서 안전 항해와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를 올렸답니다.
올해는 지난 5월 4일에 조선통신사 일본 파견 400주년 기념으로 영가대에서 사신들이 일본으로 떠날 때처럼 해신제를 지냈답니다. 해신제도 제사니까 밤에 지낸답니다. 그날도 밤 7시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1. 준비과정 2. 奠幣禮(전폐례) 3. 初獻禮(초헌례) 4. 亞獻禮(아헌례) 5. 終獻禮(종헌례) 6. 飮福受胙禮(음복수조례) 7. 籩豆(변두 - 철상과 같은 의미) 8. 望燎禮(망요례)의 순으로 진행되어 일반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와 순서가 동일하였답니다.
이렇게 해신제를 지내던 영가대가 지금 자성대 공원 동쪽 담 모서리에 樓亭(누정)으로 중창해놓았습니다. 높은 대지위에 계단을 설치하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을 인 이익공양식이랍니다.
원래 영가대가 이렇게 누정이었는지 알 수 있지만 아무래도 어설픈 중창으로 말이 많답니다. 장소도 이곳이 아니고 말입니다.
원래 영가대는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에 있었답니다. 영가대라고 하니 바닷가에 접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는 전혀 바닷가가 아니라고 하실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앞에도 말했듯이 여기는 대부분 바다를 매축한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도 철로변에 조그마한 1칸 블록소형 창고같은 스레트 지붕의 집이 있는데, 이 집의 문을 열면 전설따라 삼천리같이 꼭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 안에 비석이 하나 있답니다.(예전에 집집마다 있던 조그마한 연탄 창고를 상상하면 된다. 물론 그 집을 열면 벽면들도 연탄 창고처럼 새까맣고 제관이 입었을 것 같은 옷이 걸려있다.)
전면에는 ‘영가대기념비’라고 새겨있고, 서편 측면에는 단기 4284년 10월 15일 한청북부구단부와 한청범2동단부가 세웠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단기 4284년은 서기 1951년으로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이곳에 세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부산은 전쟁통에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을 터이고, 이로 인해 화재나 수마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들은 통신사가 일본으로 드나들면서 그들의 안전을 빌었듯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액막음으로서 영가대가 존재했던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아마도 영가대의 옛터로 추정이 된답니다. 그러나 철로변이고 다시 여기에 영가대를 복원할 수가 없었던 동구청에서는 지금의 자성대 자리에 영가대를 중창했답니다. 복원이라면 예전의 모습대로 지어야 했을텐데 완전 새롭게 지었으니 중창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창(구청에서는 복원이라고 하겠지만) 당시부터 말이 많은 영가대였답니다. 우선 영가대는 본디 자리는 고사하고 진경 그림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물가에서 옮겨 놓은 억지춘양을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자성대는 부산성의 한 부분으로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성을 함락하고 성의 동남부에 일본식 성을 쌓아 지휘소로 이용했던 곳이랍니다. 부산시민들은 왜 하필이면 자성대 자리에 영가대를 조성하느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였지요. 일본에 대항하고 싸웠던 ‘항일의 자리’에 일본으로 떠나는 친선 사절단의 유적지를 함께 조성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답니다.
그러나 저러나 마땅한 터를 잡지 못한 구청에서는 여기에라도 영가대를 복원해놓은 것에 만족했겠지요. 더군다나 해신제까지 지내게 되었으니 동구에서는 문화상품으로서 멋진 이벤트를 하나 개발한 셈입니다.
한편, 영가대는 경치가 빼어나 시인 묵객은 물론 이곳을 거쳐 간 통신사행들이 많은 시를 남겼답니다. 그중 인조 14년(1643년) 막부 장군 이에쓰나(家網 - 가망)의 탄생을 축하하러 갔던 종사관 申濡(신유)의 글을 살펴보면 영가대의 위치나 거기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 잘 드러나 있답니다.
高臺蕭瑟出雲端(고대소슬출운단) 높은 대가 소슬하게 구름 끝에 솟았는데
陂水千尋石色磻(피수천심석색반) 언덕 밑 천길 물에는 돌그림자 서려 있네.
艦穩如藏大壑(함온여장대학) 배들이 평온히 큰 구렁에 숨겨져 있는 듯
海中終日自波瀾(해중종일자파란) 바다 가운데에는 온종일 물결이 치는구나.
(1643년 신유 「영가대」)
여기 조선통신사와 영가대 이야기는 다음에 한 번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젠 일신기독병원 옆에 있는 정공단으로 가 봅시다.
정공단은 부산진성을 지키다 돌아가신 첨사 정발 장군과 그와 함께 순사한 분들을 위하여 비석을 세워 모신 제단이랍니다. 영조 42년(1766년) 첨사 李光國(이광국)이 부산진성 남문 터에 축조하였습니다.
병원 가는 길의 좁은 골목길에서 높이 쌓아올린 계단을 올라가면 외삼문이 나오고 그 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에는 忠壯公鄭撥戰亡碑(충장공정발전망비)가 비각에 모셔져 있고, 그 앞쪽으로 부산진 첨사들의 비석이 놓여 있으며, 왼편에는 관리사로 사용하는 집이 있습니다.
충장공정발전망비는 영조 37년(1761년) 경상좌수사였던 朴載河(박재하)가 세운 것으로 원래 영가대(부산진시장 근처편의 철길 옆에 있던)에 있는 것인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가 놓이게 됨으로서 헐리게 되어 이곳으로 옮겨 왔답니다.
그 외에 惟政大師(유정대사) 忠義碑(충의비)가 있었으나 80년 정공단 정화공사 때에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겼답니다. 공원 안 놀이기구로 시끄러운 산비탈에 사명대사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아래편에 유정대사의 비각이 놓여있답니다.(유정대사가 곧 사명대사입니다. 사명당이라고 하지요.)
다시 내삼문을 통하여 정공단으로 올라가봅시다.
정공단에는 단 중앙에 충장공정발장군비가 세워졌고, 단의 서쪽에 별단으로 남향한 李庭憲(이정헌)공의 비와 ‘戰亡諸公碑’(전망제공비)가 있고, 맞은편에는 烈女(열녀) 愛香(애향)과 忠僕(충복 - 충성스런 하인) 龍月(용월)의 비가 나란히 놓여있답니다.
정공단에는 앞뒤로 두개의 단이 있는데, 앞에는 큰 비석이 놓였고, 뒤에는 조그맣고 옛날의 비석이 놓여 있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원래 있던 자그마한 비석을 훼손하여 땅에 묻어 두었던 것을 해방이 되고 다시 그 비석을 찾아서 비를 세우면서 원래 자리보다는 더 위편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는 앞쪽에는 큰 비석을 세우면서 생긴 일이랍니다.
원래 정공단의 위에 있던 건물(부산진육영학숙)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작은 비석들을 올려 세웠답니다. 그리고는 비석의 글씨도 잘 보이지 않고 너무 낡아서 크게 잘 생긴 비석을 원래 비석이 있던 앞쪽에 새로 만든 것이지요.
이광국 첨사가 세운 옛날 비석은 높이가 80,4cm, 넓이 27.5cm로 가운데가 충장공전망유지로 쓰여 있고, 4개의 작은 비석이 좌승지 이정헌비, 전망제인비, 충복 용월비, 열녀 애향비로 앞의 비석은 여기 비석의 확대 비석입니다.
정공단의 제사는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던 음력 4월 14일에 거행되었답니다. 그 후 계속하여 첨사에 의하여 제향이 이어져 왔으나 1895년 갑오경장으로 첨절사제도가 폐지되자 그 후에는 지방민의 정성으로 모아진 享祀禊(향사계)에서 계승하여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07년 순종 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이 현상을 보고 하사금을 내려 정공단의 유지와 그 제사가 단절되지 않게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일제의 눈을 피해 향사를 계속 이어 왔는데, 1942년이 되자 일제는 祀檀(사단)도 폐쇄시키고 유물 비품도 몰수하는 악랄한 정책을 썼답니다.
그러다 다시 해방이 되어 그해 11월에 향사계를 재조직하여 향사를 계속 이어갔답니다.
1958년 4월에는 재단관리를 부산진향우회에서 사단법인 정공단보존회로 이름을 바꾸어 매년 음력 4월 14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