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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만 보세요. 세번째

이강순 |2007.08.28 03:32
조회 137 |추천 1
5. 백귀난행, 부일협력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부일행위를 했다.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의 악의 전쟁에 협조했다. 신의주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는 교회조직을 전쟁보조 기구로 개편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에 따르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 동안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2000원을 모아 바쳤고,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위문회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 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1942년에 열린 제42회 총회의 보고를 보면 장로교단은 교회당 종 1540개와 유기(鍮器) 2165점과 12만여원을 모으고 마련하여 일제에 바쳤다.

경북노회 노회장 송창근 목사는 산하 교회들에게 명령하여 교회의 종과 철제 물건과 유기를 관청에 갖다 바치고 그 보고서를 노회에 올리도록 했다. 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이러한 친일 ‘애국’ 활동은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친일 부역은 ‘조선예수교장로교도 애국기(愛國機) 헌납 기성회’ 회장 정인과 목사를 포함한 일부 친일파 목회자들만의 소행만은 아니다.

감리교회는 1944년에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로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을 붙인 애국기 세 대를 살 수 있는 돈 21만원을 헌납했다. 모금은 ‘성도의 헌금 전액과 교단 소속 교회 병합에 의한 폐지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충당하는’ 방법에 따랐다. ‘교회병합 실시 명세표’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냈다.

광주지역 기독교는 세 교회당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폐쇄, 매각하여 일제에 바쳤다. 금정교회는 교구장의 사무실과 주택으로 사용되었다. 광주지역에서 예배를 드린 곳은 양림교회당과 중앙교회당 뿐이었다. 향사리교회, 구장정교회, 일곡동교회, 유안동교회를 폐쇄하고 부동산과 재산을 팔아 일제의 군수물자구입비로 상납했다.

밀려난 목사들은 농사를 짓거나 소일했다. 이러한 친일행각을 한 광주지방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총 책임자는 정경옥 목사(전 감리교신학교 교수)였다. 장로교의 성갑식, 백영흠, 조아라 목사가 그 아래에서 친일행각을 하고 있었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했다. 교회는 연맹회비를 한 사람당 20원씩 받았다. 당시의 <동아일보> 평기자의 월급이 20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거액이었다. 교회는 이렇게 받은 회비, 헌금 등을 가지고 일제의 병기 구입에 사용하라고 헌납했다. 병기 헌납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교회는 또 연맹회비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인을 제명시킨 일이 있다. 그들의 이름을 교인명부에서 삭제했다. 예컨대 광주 송정제일교회 당회록은 “당회로서는 전 교인에게 교회의 의무 실행과 국민의 직무에 열성을 다하여 국방헌금과 연맹원의 의무에 충성을 다하게 하되 불이행 시에는 교인의 명부에서 제명하기로 가결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솔선수범 친일행각이 어느 정도로 열광적이고 열성적이었는가를 입증한다.

광주시내의 어느 교회당의 종을 떼려고 왜경이 일꾼들을 데리고 왔다. 종이 종각에 단단히 붙어 있는 탓으로 분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경은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때 그 교회 담임목사는 시내에서 산소 용접기를 빌려가지고 와서 종을 강제로 분해하여 관청에 갖다 바쳤다. 솔선수범 일제에 충성을 바쳤다.

한국교회는 앞 다투어 전승축하기도회를 가졌고, 위문품을 보냈다. 기독교 인사들은 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김활란, 백낙준 등은 이곳저곳에 강연하러 다니면서 조선의 젊은 남녀들에게 일제의 전선에 나가 그 애국적 정열을 나라를 위해 바치라고 외쳤다.

<동양지광>(발행인 박희도) 등의 친일 잡지에 글을 써서 젊은이들을 전장(戰場)으로 내몰고, 친일 부역을 하도록 부추겼다.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발행하는 <청년>은 기독교 단체와 지성인들이 민족배신 친일행각에 어느 정도로 광분했는가를 말해 준다.

일명 채필근신학교라고 불리는 평양신학교(1940 설립)는 한 달간 황민화를 위한 재교육을 실시하는 등 일제의 교화기관 구실에 충실했다. <장로회보>는 이 학교의 졸업반 학생들이 1941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까지 '성지참배'와 '내지견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신사참배를 했다고 보도한다.

1941년 12월 24일자 신문은 ‘내지견학기’를 싣고 있다. 학생들을 인솔한 김관식 목사는 나중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초대 통리로 선출되고 광복 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주도했다.

그 무렵 노회들이 총회에 올린 보고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중에 잘 지냈사오며…” 하는 따위의 말로 일관한다. 평북노회는 “관내 각 교회의 교인 수는 증가하지 못하였으나 신앙생활은 질적으로 향상하였사오며… 관내 각 교회 지도자를 시국에 적절한 지도자로 양성코자 하오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성노회의 보고는 특히 인상적이다.

위문편지, 위문품, 상이장병 위문금, 유기헌납, 국방헌금 등으로 비상시국에 처한 국가에 성의를 표했다고 하면서 “조선신학교와 연합하여 국민총력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역자 및 신자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 일본 건설 등을 인식시켰으며”라고 보고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교정치 권력에 충성을 바친 이러한 종교행위를 한 것은 출세와 영달이 그 목적이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 앞서 ‘모범’을 보였고… 경쟁적으로 그들이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신사참배를 통해 보여주었다” 한국교회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이런 일들을 ‘솔선려행’(率先勵行)했다.

일제가 신사참배에 대한 굴복만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부일협력을 요구하고 교회의 ‘창부화’를 강요할 때 한국교회는 일제의 작부(酌婦)다운 기고만장한 행태를 연출했다. 반민족 배교집단으로, 이교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일제와 신도교의 창기로 변해 있었다.
6. 면직, 제명, 사임압력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회자들을 파직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거창읍교회 목회자 주남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부터 광복 때까지 옥살이를 했다. 경남노회는 ‘주 목사에 대하여 거창읍교회 위임목사 해제를 통보’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노회의 압력을 받은 교회는 그 가족에게 사택을 비우라고 강요했다.

장로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면직시키고, 이기선 목사를 제명하고, 한상동 목사에게 압력을 가하여 사면하게 했다. 상당수 목회자들이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목회지를 사임한 사람들은 자의로 사표를 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압적으로 축출되었다.

7. 비인도적 행각, 사회참여의 실패, 민족배신

평양노회(노회장 최지화)는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있는 주기철에게 산정현교회 목사직 사표를 종용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그를 면직시켰다. 노회는 그의 가족을 사택에서 끌어냈다. 사택 문에 못을 박아 봉쇄했다. 평양신학교 교수 고려위 목사가 그 집에 거주하다가 동네사람들이 거듭 비난하자 그곳을 떠났다.

최훈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가족을 끌어내던 바로 그 목사가 광복 후에 “한국장로교회에서 유력한 목사로 추대 받는가 하면, 현 ㅇㅇㅇ 목사는 얼마 전에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이와 같이 신앙양심이 마비되면 못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가 저지른 이 같은 비인도적인 행각은 비일비재했다. 목사에게는 그가 책임져야 할 식솔이 있다. 교회는 목사의 가족이 오갈 데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걸인이 되어도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핍박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과 재산을 침탈당한 동족을 돌보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기는커녕 항일자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을 괴롭혔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일면 그 시대의 사회참여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교회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이다. 이웃사랑, 사회참여, 문화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일본민족주의 제례(祭禮)인 신사참배에 적극성을 보이고 친일행각에 솔선수범한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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