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고의 취업난으로 대기업 공채에 합격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또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와 맞먹는 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지만 국내 여성 패션브랜드 중에서도 '명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구호(KUHO)의 디자이너 엄세희 씨는 이러한 취업난을 겪지 않았다. 대학교 4학년이던 지난 2002년 9월, 국내 최고 권위의 신인 디자이너 등용문이라 일컬어지는 '제20회 대한민국 패션대전(이하 패션대전)'에서 대상(대통령상)의 영광을 안아 그 해 10월 특채로 입사한 것이다.
별다른 취업 준비를 하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연합동아리인 전국 대학생패션연합회(O.F.F., 현재 B.I.F.로 통합, 변경)에서 2학년 때부터 1년간 활동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의상디자인 전공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옷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을 때였어요. 그런데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쇼를 통해 옷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죠."
청담동에 소재한 캠퍼스 위치도 디자인을 배우는 데 유리한 점이 많았다. "사실 공부하기에 바쁜 대학생들이 패션 브랜드를 알기는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학교가 우리나라 패션의 중심지에 있으니 명품부터 캐주얼까지 많은 브랜드를 알고, 여러 스타일을 접할 수 있었죠."
입사 후, 패션대전에서 받은 부상으로 이탈리아의 유명 패션학교인 마랑고니로 1년간 유학을 다녀왔다. "마랑고니에서는 '디자인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우리나라는 바로 디자인에 들어가는데 마랑고니에서는 영감(inspiration)을 받는 방법과 이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을 배우죠."
대부분의 대학생들처럼, 3학년이 된 이후에는 학과 공부에 매진하느라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과제와 학업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유럽과 동남아 등으로 여행을 많이 떠났다.
"여행은 재충전의 시간이잖아요. 특히 다른 나라의 독특한 색감과 디자인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자연스레 디자인학도다운 생각이 묻어 났다.
"우리나라의 옷이나 건축물에는 딱딱한 느낌의 색감이나 직선이 많은 편이에요. 튀지 않으려는 전통적 사고방식의 영향인지 안정적인 색을 선호하고요. 하지만 동남아 같은 경우 금색이나 붉은색 등의 화려하고 강렬한 색이 시선을 확 끌지요. 유럽의 경우 다양한 색을 믹스 앤 매치(mix and match)하는 것이 발달해 있어서 독특한 칼라 배합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고요. 건물에서도 아치형 곡선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사람은 아는 만큼 보고, 관심 있는 것을 눈 여겨 보게 되는 법. 그녀는 해외여행을 하면서도 색채와 디자인에 대한 눈썰미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디자이너'라고 하면 우아하게 앉아서 흰 종이 위에 쓱쓱 예쁜 옷을 스케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금부터 그런 환상은 과감하게 내던지도록 하자. 특히 엄세희 씨와 같은 기성복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은 더욱 할 일이 많다.
이번 가을 시즌을 예로 들어 보자. 보통 브랜드 내에서는 팀별로 역할이 나뉜다. 베이직한 옷(레드라벨이라고도 한다)을 디자인하는 웨어러블 팀, 시즌의 유행을 주도하는 트렌드 팀, 브랜드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컬렉션 팀, 차별화된 '명품'을 만들어 내는 블랙라벨 팀 등이다. 이 중 엄세희 씨는 웨어러블 팀이다.
먼저 MD(머천다이저, 상품기획자)와 함께 그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와 트렌드의 변화 등을 고려해 한 시즌의 컨셉을 잡는다. 그 다음 소재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색은 어떤 종류와 톤을 쓸 것인지 등을 정해 월별로 기획을 짠다. 물론 최소한 두세 달은 앞당겨 기획해야 시즌에 맞는 옷을 출시할 수 있다.
이제 디자인만 하면 끝일까? 천만의 말씀. 하나의 디자인이 옷으로 탄생하려면 먼저 디자인-가봉-수정-샘플-drop/fix-Q.C.(quality confirm)의 기본 단계를 거친다. 이 중 한 단계라도 통과하지 못하면 가봉부터 다시 해야 한다. 몇 번씩 수정을 거치고 샘플을 만들어도 정작 샘플이 나오면 생각과 다른 모양이거나, 다음단계에서 drop되어 애써 디자인한 옷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천신만고 끝에 옷 한 벌 탄생! 이제 정말 끝일까? 아쉽게도 답은 '아니다'. 한 그룹 안에서 크로스(cross)가 가능하도록 코디를 맞추고 부속품이나 장식품을 챙기고, 디자인을 평가하고…. 많은 사람들의 환상과는 달리, 디자이너는 발로 뛰는 직업이다. 게다가 손으로도 뛰어야 한다!
이처럼 디자이너는 혼자 일하는 직업이 아니다. 모든 과정에서 사람과의 대면을 통해야만 결과물을 창조해낼 수 있는 직업이다. 뛰어난 감각만으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기성복의 경우 브랜드의 성격이나 분위기에 맞춰 디자인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하면 곤란해요."
의견이 잘못 전달돼 엉뚱한 샘플이 나오거나 브랜드 컨셉과 맞지 않는 액세서리가 도착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디자인을 이해시키고 의견을 조율하는 능력도 필수다. 엄세희 씨의 말이 이를 요약해 준다. "디자인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머리로 생각한 것을 옷으로 만들어 내는 게 어려운 거죠."
그러다 보니 엄세희 씨는 디자이너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을 끈기와 밝은 성격이라고 꼽는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야 하는 활동적인 직업이기 때문에 성격과 친화력이 정말 중요해요. 디자인이 몇 번씩 컷을 당해도 좌절해선 안 되고요. 체력은 물론 필수겠지요?"
주 5일제 근무가 확산되는 추세지만, 그녀와 인터뷰를 한 날은 토요일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토요일 늦은 오후까지 디자인실에서 가봉한 옷을 수정하고 있던 엄세희 씨. 그렇지만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디자인을 하면 '예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또 자유롭고 개방적인 디자인실의 분위기는 다른 부서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것들이죠."
팁으로 올 가을과 겨울 트렌드까지 살짝 알려 준, 친절한 엄세희 씨. 올 하반기 트렌드가 궁금하다고? 그건 구호(KUHO) 매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