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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Weg]시작은 늘 이렇게.

조규영 |2007.10.14 13:33
조회 55 |추천 0

 

다시 시작이다. 길을 잘못들었을 때, 일을 망쳤을 때, 계획이 어긋났을 때,

 

그리고 사랑이 떠났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생각하기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다시 시작하게 되는 동기는 대부분 자의가 아니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든지, 회사에서 쫓겨나든지, 계획이 엉망진창일 때,

 

그리고 혼자 남겨졌을 때가 아니라면.

 

그러면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거야'

 

 

아마 나도 그 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독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말이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속에서 모두 지우고 새로 시작하자고.

 

내가 탄 비행기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했다.

 

오후 5시에 도착했고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는 11시 50분에 있었다.

 

마치 유리로 된 거대한 불가사리 모양의 공항을 동서남북 두 번씩 왕복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무슬림 복장을 한 여자들과 빈 라덴 표 수염을 기른 남자들 부탄의 꼬마 수도승을 연상케 하는 노랗고 붉은 옷을 걸친 작은 스님들 동양인 백인...

 

 


 

 

출발시간 3시간 전부터 나는 게이트 앞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돈키호테. 저명한 서울대 모 교수가 몇 년여에 걸쳐 드디어(?) 한국 번역문학사에 길이 남을 성과를 거두었다는 자화자찬으로 역자서문의 대부분을 할애한 두꺼운 책이었다.

 

어렸을 때 밤잠을 설치며 읽었던 재미난 모험은 노교수가 번역을 해선지 왠지 맥이 빠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돈키호테가 눈에 푸른 빛의 광기를 뿜어내며 이상한 행동을 할 때는 노교수가 흥분을 했는지 과도한 묘사가 이어졌다.

 

 

책을 보다 게이트 앞에서 졸고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났다. 어느새 시간은 11시가 넘었다. 분위기를 보니 곧 안으로 들여 보내줄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다시 게이트 앞으로 가니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출국 심사대에서는 소지품 등을 체크하고 있었다.

 

검색대에서 검사를 받고 안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전면의 통유리를 통해 우리가 탈 비행기가 보였다.

 

사람들이 출입구 쪽에 몰려 있었다.

 

나는 멀리 떨어져 아무도 없는 곳에 앉았다.

 

활주로는 젖어 있었고, 바닥의 물에 붉은 색 조명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 그러고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오렌지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검은 무언가가 시야를 가리며 지나갔다. 긴 금발 머리의 백인 여자였다.

 

검은 진에 검은 반소매 티셔츠 커다란 루이비통 여행 가방. 키가 180은 넘어보였다.

 

출입구 쪽으로 가던 그녀는 다시 방향을 뒤로 돌렸다.

 

그리곤 자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 옆에 털석 주저 앉는다.

 

"제기랄 어느새 그쳤네. 아까는 그렇게 쏟어지더니. 안그래요?"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씨익 웃더니 젖은 금발머리를 말아 마치 상투머리처럼 묶는다.

 

오렌지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안에만 있어서 몰랐어요. 비가 왔는지.."

 

"여기 사는거 아니에요?"

 

"아뇨."

 

"아, 미안해요. 동양사람들은 다 똑같이 보여서."

 

"괜찮아요."

 

"독일은 왜 가요? 여행 아니면?"

 

"그냥..."

 

"비밀이라면 말 안해도 돼요."

 

출입구 쪽 사람들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시아는 처음이었는데. 마치 신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 이번이 처음이에요 독일가는거?"

 

"네."

 

"그럼 즐거운 비행. 아마 안에서는 나 못 볼껄요."

 

눈을 찡긋하더니 그녀는 가방을 들고 탑승구 쪽으로 갔다.

 

재미있는 여자였다.

 

나는 탑승구에서 보딩패스를 확인하는 직원이 손을 흔들 때까지 앉아 있었다.

 

열심히 찾아본 건 아니지만 정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13시간 동안 자고 먹고 자고 먹고를 반복했다.

 

가끔 앞 좌석 뒤에 붙어 있는 모니터를 통해 지금즈음 어디 위를 날고 있구나 생각하기도 했지만 마치 수면제를 먹은 듯 이내 골아 떨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현지 시각으로 아침 7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잠을 그렇게 잤는데(아니면 그렇게 자서 그런지) 정신이 몽롱했다.

 

입국심사대에서 영어로 '무슨 일로 왔어요?' 묻길래 독일어로 '독일어 배우러요'라고 했다.

 

남자는 독일어로 '벌써 잘하는데요.'라며 도장을 쾅 찍어줬다.

 

 

한참을 기다려 짐들을 카트에 싫고 나가는 곳으로 가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기분이 어때요? 지금 독일인데!"

 

어제 블랙 금발 여자였다.

 

"어.. 몽롱한데요"

 

"나 지금 빨리 가야는데, 이제 어디로 가요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내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고 그녀의 표정은 대답을 재촉했다.

 

"아뇨 본에서 지낼거에요. 그 전에 잠깐 여행 좀 하.."

 

"아하 그래요? 그럼 잘가요~ 내 이름은 율리아에요. 알아둬요."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손을 팔랑 팔랑 흔들면서 사라졌다.

 

정신이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 서 있던 나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여행을 할 동안 내 짐들을 맡아줄 삼촌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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