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배경이 되는 ‘산샤’는 끊임없이 변한다. 바로 어제까지 존재했던 돌무더기가 오늘 무너지고 함께했던 사람과의 내일은 기대하기조차 어렵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까맣게 익은 등을 맞대고 담배를 나눠 필 뿐, 말이 없다. 그 어떤 것도 확실히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운 산샤 속의 공간들은 자신을 스쳐가는 바람에게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중국의 화가 리우 샤오동은 이런 건조한 산샤를 자신의 화폭에 담기 위해 붓을 든다.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지아 장커는 리우 샤오동과 산샤를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다.
에는 상반된 두 가지의 속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은 리우의 그림 속에서 각각 ‘느림’과 ‘빠름’으로 구분되어진다. 리우는 커다란 화폭을 이어서 산샤의 풍경대신 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선택한다. 색이 바랜 옷을 입은 그들은 말없이 흐르는 산샤의 강물처럼 하나씩 캔버스를 메우기 시작한다. 타는 듯한 햇빛을 받으며 벽을 허무는 그들의 눈동자에 익숙해질 무렵, 새로운 화폭이 관객을 맞이한다. 리우는 이어서 산샤의 노동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콕의 멋스러운 아가씨들을 그림으로 담는다. 바로 여기서, 서로 다른 시간의 충돌이 일어난다.
각각의 시간은 중국의 결코 혼합될 수 없는 이야기를 섞어내려 노력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아 장커의 눈으로 바라보고 리우 샤오동의 그림으로 읽혀지는 중국의 현실과 미래를 보여준다. 하지만 중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적하지는 않는다. 또한 의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지도 않는다. 과거 진행과 미래 진행의 단절되고 손실된 중간단계의 시간을 지아 장커는 복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 시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아 장커의 시선에 비친 사람들의 표정은 질문에 대한 답을 건넨다. 리우가 하나씩 나누어 풀어내는 군상의 모습은, 혼자서 일정 부분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각자’의 사연이다. 때문에 은 아주 조용한 그들의 공기를 담는다. 잔혹하지만 그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에서 한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를 기분 나쁜 표정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남자를 담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결국 둘의 실랑이는 중재되지 않은 채 끝나버리고, 이내 카메라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사는 것으로 인해 엮어져 나가는 크고 작은 흐름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지적인 하나의 시선. 그리고 그에 대항하여 움직이지 않으려 인상을 찌푸리는 당사자의 시선.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반복되는 카메라와 남자의 싸움을 바라보면서, 에서의 지아 장커는 또 하나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강자’로 대변되는 카메라가 담는 현실의 시간을 부인할 수 는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끊임없이 일어나고 또한 그래야만 하는 ‘삶’에 대한 문제이기에 우리에게 눈을 막을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을 무조건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지만,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힘든 기록이다. 씻을 수 없이 먹먹한 가슴을 뒤로 한 채 다시 리우의 그림을 바라본다. 영화 속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은, 너무나 가깝게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