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문화예술회관 관장 김형석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불혹을 지난 나이에도 아직 감정 조절에 서투르다. 신정아 사건으로 정치, 언론, 문화계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증스러움으로 진흙탕 싸움을 할 때 하고 싶은 말이 태산이었지만 쉬어가는 지혜로, 초연함으로 인내하려니 입이 괴로웠다. 끓어 넘치는 냄비 속에 영양가 있는 뭔가를 넣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 자위하며 침묵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손가락질 당할 때 배알이 있는 경상도 사내라면 분기댕천 할 일 아닌가? 왜? 미술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삶에 대한 회의와 불안한 미래로 방황하던 사춘기 소년에게 그림은 위안이고 안식이며 은신처였다. 그래서 미대에 진학했으나 졸업 후 시류에 휩쓸리다보니 붓을 꺾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사회생활을 하다 초대를 받아 가정을 방문하면 걸려있는 그림으로 그 집안의 가풍이나 문화수준을 가름하곤 했다. 출장길에 짬을 내 미술관 가는 길은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연인의 마음처럼 설레임과 기대로 행복했다.
익기도 전에 떨어진 열매지만 고향의 늘푸른 정자나무 같은 미술에 대한 애정으로 무지한 심미안(審美眼)을 총동원해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는 말아야 하겠기에...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암울하고 파행적이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 보다 공교육 획일화로 인한 전인교육(全人敎育)과 예술교육의 부재다. 신정아, 변양균 사건에서 보듯 국어, 영어, 수학만 잘하면 권력 엘리트가 되는 우리의 척박한 문화적 토양이 문제이다. 애호가 수준의 아마추어적 문화의식의 행정관료가 허위 학력자의 미인계에 넘어가 나락으로 빠진 것은 암기식 교육이 만든 태생적 한계이며 앞으로도 돌출될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국가나 기업을 대표해 외국 출장 가 회의탁자에 앉자말자 “얼마 수입해 달라. 얼마 수출해 줄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화예술 상식으로 서로를 소통하다 마음을 연 후에 본심을 드러내는 협상술(協商術) 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창의적 예술교육으로 감성과 상상력이 발달해 풍부한 예술교양과 문화마인드로 무장한 선진국 엘리트들에게 기죽다 보니 이게 아니다 싶어 급히 먹은 떡 체한 격인가?
추락하지 않으려면 취약한 분야를 보강하자. 초등학교 산수를 배우는 수준의 사람에게 미분, 적분 등 수학 공식만큼 난해해진 현대미술을 하루 아침에 가르칠 수는 없지만 4년제 미술대학에서 실기와 이론을 적당히 학습했으면 알 현대미술의 지식도 모르면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믿고 맡기는 게 전정한 프로정신이다. ‘반풍수(半風水) 집안 망친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사진처럼 그린 고전주의, 사실주의 그림에 심미적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시각은 짝퉁에 현혹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건강한 미술을 위해 극복해야 할 허상 중 하나가 '솔거 콤플렉스'이다. 황룡사(皇龍寺) 벽면에 천재화가 솔거가 그린 노송도가 ‘진짜 소나무’ 같아 참새가 내려앉아 쉬려다 떨어져 죽었다는 설화가 아직도 걸음마 수준의 대중들이 미술관 가는 길 벽에 그려져 미술을 왜곡, 호도하고 있다. 마음속의 솔거를 죽여야 미술이 산다. 그래야 유쾌한 미술, 재미있는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종교와, 사랑에 버림받은 후기인상파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예술은 구원이었고 그의 화려하고 역동적인 노란색은 창작에 대한 처철한 아픔과 고통, 고독의 결과물이다. 추상표현주의 대표적인 화가 잭슨 폴록은 2차 세계대전의 살육과 야만을 목도하고 아뜨리에에서 태평스럽게 아름다운 꽃이나 여인을 그릴 수 없어 붓을 던지고 물감을 뿌리며 피 튀는 기법과 깨어있는 작가정신으로 저항했다. 고흐의 숨어있는 고독을 만나고 폴록의 투철한 시대정신을 이해시키는 창조적 발상법으로 교육을 해야 한다. '창조적 리더십론'을 강조한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생물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곤충학을 집대성한 파브르를 가르쳐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리더를 꿈꾸는 당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 요즘 평생교육이 유행이다. 그러니 음악, 미술 등에 대한 안목을 길러 폭탄주에만 취하지 말고 문화예술의 향기에도 취해 보자. 세계 10위권 진입을 눈앞에 둔 경제대국 국민이라면 문화수준도 국제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세금 공제해 주는 문화접대비 제도도 벌써 시행되었다. 미술사(美術史) 암기와 학력고사 점수라는 우울한 추억으로 눅눅한 불륜의 모텔을 나와 시각적 사유의 체험적 진실, 상상력과 직관, 그리고 감성적 유희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창조의 집으로 돌아가자.